신념과 신앙 사이에서
“NCCK가 주목한 오늘, 이 땅의 언론 시선(視線)”(도서출판 동연 간, 2017년)에 실린 글 중에 거의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가슴으로 함께 울었던 2016년 사건이 눈에 띠어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에서 교우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상기했습니다. 2016년 5월 28일에 서울 지하철 구의역 9-4번 승강장의 안전 문을 점검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하청업체 직원 김 군 사건이었습니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대학에 가기 위해 140만원의 월급 중에 100만원씩을 적금하며 살던 성실했던 한 청년의 죽음은 참 많은 아픔으로 저에게도 새겨져 있습니다. 책에 김 군 어머니의 절규가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첫째아들에게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쳤는데 둘째 아들에게는 절대로 원칙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p,24.) 저는 개인적으로 김 군 어머니의 절규와 통곡을 가슴으로 이해했습니다. 너무나 귀했던 아들, 그리고 사랑했던 아들을 잃어버리고 앞세워야 했던 부모의 피멍울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아들 스스로의 꿈을 꽃피우려던 노력이 물거품 되게 한 이 구조적인 악의 테두리 안에 있었던 어머니의 소리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김 군 어머니의 그 통분의 한(恨)에 저도 동의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조심스러운 멘트이지만 김 군 어머니의 그 분과 한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철저히 이성적인 감성적인 차원이라는 전제 하에서입니다.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한다면 지성적 성찰 안에서라는 전제입니다. 이 말을 직설적으로 감히 말한다면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스펙트럼으로는 그 분의 한 서린 결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절대로 성실하게 살라고 그리고 원칙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이 기막힌 절규에 제가 신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김 군 어머니의 이 외침은 신념이지 기독교 신앙적인 행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목사로 살면서 나름 고집을 꺾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려고 했던 목사로서의 마지노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최선이라고 평가받는 신념이라도 그것을 주군이 원하시는 신앙으로 둔갑시키지 말자는 치열함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예수의 멱살을 붙잡고(에피티마오)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겁박하던 베드로에게 ‘사탄아 네 뒤로 물러서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비수의 의미는 주님의 뜻이 신앙의 내용이어야지 예수를 죽게 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신념이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흔들릴 수 없는 주님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는 무거운 짐이고 십자가이기에 아무나 짊어질 수 없다.”, “교인의 3대 중심은 하나님, 교회, 담임목사이다.” 근래 아들에게 기필코 교회를 넘겨준 한 원로 목사가 던진 설교를 빙자한 신념 심기입니다. 그 자의 이 신념이 지금 한국교회를 넘어지게 하고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신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를 그에게 던져보면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서울 대도시의 대형 교회 목사의 신념이 신앙의 자리를 꿰찬 오늘, 목양의 현장에서 목회하는 조그마한 지방 교회 목사는 너무나 버거운 또 다른 하나의 싸움을 더해야 하는 참담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21세기 종교가 문화라고 압박하고 있는 참담한 교회 현실 속에서 성도들 역시 너무나도 당연히 신념을 신앙이라고 우기고 있는 무시무시한 궤변과 불신앙이며 이로 인해 도무지 쓰러지지 않는 교회 안의 엘리압과의 싸움들입니다. 골리앗과 싸우기도 버거워 실신직전인데 이제는 교회 안에 있는 신념이 신앙인 줄로 확신하는 무서운 영적 세력들과 싸워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엎드림 밖에 없어 신앙의 주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얼굴을 파묻고 절규하며 웁니다. 하나님께 하가(시 1:2)합니다. 이렇게. “주여, 목사와 성도의 중심이 하나님만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