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아들
신학교를 다닐 때 참 상식적이지 않았던 그러나 그러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다부지게 먹게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라고 할까 싶은 신형 골품제가 유감스럽게도 신학교 안에 존재했던 기억입니다. 신학교 동기는 물론, 선후배들의 면면을 보면 목사 아들, 장로 아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편애(?)가 음으로 양으로 당시에 존재했던 기억입니다. 우리는 당시 목사 아들을 성골, 장로 아들은 진골로 불렀으니까요. 물론 저 같은 일개 평범한 집사 아들은 그냥 남자 무수리였죠.(ㅎㅎ) 이렇게 말하면 당시 성골과 진골들은 펄쩍 뛰겠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OMS 장학금이라는 교외 장학금이 있었습니다. 미국 선교 단체에서 신학교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던 기부금 형식의 물질이었는데 이 장학금 혜택 역시 순차적 서열 식으로 지급되었으니 신라시대의 골품제 이름을 딴 말들이 회자된 것도 무리수는 아니었습니다. 뭐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졸업 이후에 현장에 나가서도 임지를 결정하고 사역지를 선택하는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들 앞에서도 언제나 무수리 출신들은 멘 땅에 헤딩을 해야 고루함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현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이러한 고토(孤土)에 있었기에 무수리 출신들은 더 많이 노력하려고 했고, 더 민감하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지난날들을 달려왔기에 말입니다. 제 아들은 저의 신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성골입니다. 아, 물론 저는 목회에 성공(저는 이 단어를 제 단어로 사용한 적이 없지만)한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아들에게 소위 말하는 성골의 혜택을 줄 수도 없고 준적도 없지만, 아들은 가끔 저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목사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너 아무개 목사 아들이지! 이에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그냥 아들에게 미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들에게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태생적으로 아들이 극복해 나아가야 할 ‘목사 아들’ 이라는 심리적 트라우마-누구보다도 반듯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나름 공부도 잘 해야 하고,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되고, 모범적인 아들이 되어야 함-를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가끔 외부에서 강사로 오는 아버지의 선후배 목사님들이 그냥 친근감의 표시로 불러 주는 “아무개 목사의 아들” 이라는 호칭이 아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조금은 무거운 말들이 요 근래 이해되는 것을 보면 나는 무수리 출신이고 아들은 성골 출신이라는 괴리감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서울 모 장로교회의 원로 목사가 아들에게 본인이 시무한 교회를 물려주는 세습 문제로 교계가 들썩이고 있는 것은 물론 이제 이 이슈는 대한민국 사회 그물망에 걸려 대부분의 상식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비난을 당하고 있어 씁쓸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에비에게 던져지고 있는 그 어마 무시한 돌팔매질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들에게도 안겨주려는 그 아버지 목사의 용기(?)가 참 대단도 하지만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인 질 윌리스의 ‘소저너스’ 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아들 목사 역시 전공을 무색하게 만드는 세습 강행에 대하여 참 아프고 또 아프다는 말 밖에는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아쉽습니다. 언젠가 한 유명했던 청년 목회자가 당시 청년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슬로건이 이랬습니다.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만들자.”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지금 선지동산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아들에게 에비로서 저는 그저 소박하게 바라는 슬로건과 같은 당부가 하나 있습니다. 상식을 기적으로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들이 목사가 되어 사역할 때 즈음, 상식은 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하기에 말입니다. 무수리 출신 목사 에비가 성골 출신 예비 목사가 될 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