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출판 새물결플러스 대표인 김요한 목사가 쓴 ‘상식이 통하는 목사’ 에 보면 ‘먹사라는 오명’이라는 제하의 칼럼이 등장합니다. 그는 특히 ‘먹사’ 라는 단어에 대하여 매우 치욕적인 별명이라고 가슴 아파하며 이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급 호텔에서 음식 먹기 피하기, 미식으로 유명세를 탄 곳에 일부러 찾아가는 것 절제하기, 고급 음식을 성도들이 대접할 때 정중하게 사양하기” 등등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면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목사들이 ‘먹사’ 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 중에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김 목사의 글은 보편타당함으로 긍정받기에는 허점 많이 보입니다. 조금 심하게 역설한다면 그의 글은 상당수 많은 목회자에게 도리어 대못을 박는 내용이 담보되어 있어 유감스럽기까지 합니다.
어깃장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김 목사가 지적한 대로 ‘먹사’ 로 비난받아야 할 목사보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것은 물론 끼니를 거르는 가슴 아픈 목회자들이 태반이기에 말입니다. 해서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목회의 마음이 하루에 12번씩 스멀대고 올라오지만, 그 삭막한 현장에서 단 한 가지 예수께 받은바 사명 곧 구원의 은혜라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경 받아야 할 목회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농촌 목회를 하던 단독목회 시절 자급 7만원으로 생활을 해야 했기에 까마귀가 날라준 떡과 고기를 먹고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던 엘리야처럼 섬기던 교회의 노 집사님이 퍼 날라주시던 아침 끼니 고봉밥의 사랑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그 사랑에 감격해 눈물지으며 목회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동역자들은 현장에서 이런 눈물이 담보된 성도들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기에 ‘먹사’ 라는 타이틀이 본인도 모르게 억울하게 붙어진 것에 대하여 더 큰 자괴감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가 말을 툭 던졌습니다.
“아무개 지체가 야쿠르트를 신청했데요. 그래도 그 지체가 당신 건강을 꾸준히 챙기네요. 특별히 기도하면서 드세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지난 14년 동안, 지체가 정말로 꾸준히 부족한 사람의 건강을 위해 사랑을 전해주고 있음이 떠올라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먹사’ 로 목사를 몰아붙이는 작금인데 그래서 어느 경우에는 왠지 죄인 된 모습으로 움츠릴 수밖에 없는 시대인데 성도의 작으면서 큰 사랑에 못내 눈시울이 충혈된 것은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속물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성도들이 대접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데, 서울에서 목회하고, 대학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는 친한 친구들이 여름휴가 때 찾아와 시골에서 목회하는 동기 목사 위로한다고 소고기 요리 잘하는 집 소개하라는 말에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치도곤을 당해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이제는 도리어 교우들이 뭔가를 접대하면 부담스러워하는 지경까지 이른 삭막함의 목양터가 되어 갑갑하기에 그지없지만 왠지 야쿠르트 사랑은 감사로 다가오니 아이러니합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또 한 명의 ‘먹사’로 치부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침에 야쿠르트를 꺼낼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하나님, 야쿠르트 사랑에 눈물 흘리는 목사로 계속 살게 해주십시오. 지체를 강복하시고.”
조만간 그 지체에게 역시 사랑이 담긴 따뜻한 저녁 식사 한 번 대접하렵니다. 그 지체는 저녁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직장에 다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