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들어선지 이제 10일 정도가 지났습니다. 정치적인 색채에 따라 평가는 다르지만 인터넷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문장이 이런 것이었습니다.“이게, 나라다.”, “이민가고 싶었던 나라에 다시 이민 오고 싶은 나라가 된 것 같다.” “한 사람만 바뀌었는데도 이렇게 살맛나는 세상이 되다니!” 등등이었습니다. 헌데 이런 긍정적인 모드 중에 제 눈에 특히 띠었던 문구가 이것이었습니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이 문구가 눈에 띤 이유는 창립 8주년 기념 주일을 보낸 뒤, 셀 사역 중에 아이스브레이크를 하는 시간에 향후 9주년 우리 세인교회가 지향하고 싶은 점을 나눌 때 지체들이 했던 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목사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교회가 지금처럼만 달려가는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이 문장은 동시에 교회내의 여타 소그룹들에서도 공히 같이 공감한 토로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노라면 성도들이 교회의 만족도에 대하여 느끼는 감도가 나름 높다는 방증이기에 사역의 한 복판에 있는 목사로서 기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지체들 간에 회자되는 이야기와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구동성으로 반응되고 있는 표현이 동시에 오버랩 되어 목회 현장이 날마다 거칠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기에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소개한 문장은 한 부분에서 수정되어야 함을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에서 ‘덜도 말고’의 의미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허나 ‘더도 말고’의 의미는 조금 깊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진보하는 것은 교회의 날마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양아들 디모데에게 권하는 글 중에서 저는 이 권면을 목회 시작부터 지금까지 곱씹으며 목양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제가 바울의 이 권면에 필이 꽂힌 이유는 ‘성숙’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더도’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포기할 수 없는 의무라고 믿기에 ‘더도’에 대하여는 성숙한 교회로의 진보라는 대명제임을 인식하고 우리들이 더 활발하게 감당해야 힐 문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더도’는 ‘지금처럼’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출처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여행 중에 쿠바 해변에서 낚시를 하는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 낚시꾼이 너무 프로급이라서 그런지 고기를 낚는 것이 능숙하여 여러 차례 큰 고기를 잡는 것이 보였습니다. 헌데 너무 이상한 것은 대어를 낚을 때마다 그 어부는 물고기들을 다시 바다로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목격자가 너무 이상해서 가까이 가 그에게 물었습니다.“아니, 그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왜 다시 풀어주는 것입니까?”어부가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변했습니다.“제가 가지고 온 투망의 크기가 그 물고기를 담을 수 없어서요.”저는 이 글을 맨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마음으로 다짐한 것이 있었습니다.‘투망의 크기는 어부의 크기이다.’우리가 섬기는 공동체가 지금보다 ‘덜’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결코 저 또한 반대입니다. 자존심 문제이기에. 그러나 지금보다 ‘더도’는 욕심이 아니라 교회의 비전 크기의 문제이기에 믿음의 진보 즉 성숙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천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근주 교수가 ‘예레미야 특강’에서 교회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며 당부한 것처럼 ‘수직적 차원에서의 교회 본질적 테두리’를 벗어나 ‘수평적 차원에서의 교회 본질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장(場)으로 세인의 미래 공동체의 장을 펼침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자존감 있는 우리 세인교회(世認敎會)가 되기를 두 손 모아 봅니다. 봄 햇살이 너무 눈부신 날입니다. 교우들에게 샬롬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