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7:15-22
제목: 비웃지 말라
서론)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7:45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거의 3m에 육박하는 장대한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외친 선언입니다.
다윗의 이 외침을 단순히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호기스러운 제스츄어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이 선언 속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신학적 기초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 관점에서 출발하는 보폭 떼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점에 사로잡혀 떼는 걸음걸이입니다.
세속의 관점은 외형 싸움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은 원리의 싸움입니다.
세속의 원리는 칼과 창과 총의 우월성을 갖고 있는 자가 이긴다는 것이지만 , 반대로 칼과 창이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신앙의 관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원리입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보았던 골리앗은 이스라엘이 보았던 골리앗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았던 골리앗은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본 골리앗은 다섯 개의 물맷돌을 아무렇게나 던져도 너무 큰 표적이라 쉽게 넘어뜨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무장하여 싸우는 원리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원리가 무엇일까요?
오늘 저는 본문 해석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 이후 24년이 되는 어느 날, 아브람에게 오셨습니다.
오셔서 24년 전에 말씀하셨던 창세기 12:2-3절의 말씀을 재확인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우리가 지난 강해를 통해 주지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 말씀은 24년 동안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아브람은 13넌 전인 85세의 나이에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본인의 의지대로 아들을 낳았던 아브람의 나이 99세에 오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개명해 주셨습니다.
너는 한 가정의 아비(아브람)가 아닌 열국의 아비(아브라함)가 될 것이라고 하시며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본문 15-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두 가지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아브라함에게 전달됩니다.
⓵ 네 아내 사래(공주, 한 가정의 어미)의 이름을 사라(열국의 어미, 여러 왕들의 어미)로 바꾼다.
⓶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 아들에게 복을 주어 그에게서 여러 왕이 나올 것이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이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자 일하심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 아브라함의 반응을 본문 17-18절이 보고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전형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며 일하신다고 하는 방법이자 원리에 대해 수용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표현을 아브라함이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 나이 100세, 아내의 나이 90세가 된 지금, 하나님이 말하신 말이 가당한 일인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 셈입니다.
아브라함의 강력한 불신앙의 반발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응이 본문에 있습니다.
웃음입니다.
웃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짜하크’는 그냥 웃음이 아닙니다.
실소(失笑)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언을 듣고 비웃던 아브라함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 훈계하기에 이릅니다,
13세가 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극단의 불신앙을 보이고 있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양보하지 않으시는 멘트를 그에게 남깁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시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갈의 고통을 들었기에 주었던 아들 이스마엘도 훗날 12명의 아들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곧 부족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일러주는데 이 약속은 창세기 25:12-18절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예고는 1년 뒤인 내년에 약속한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면 다시 언약을 세울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상상하고 추측하기로 하나님의 마음이 적지 않게 섭섭하셨을 것이라는 점이 짐작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에 대한 유감이 ‘그를 떠나’라는 문구에서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의 마음입니다.
이상 본문 이해를 통해 오늘 설교의 레마를 찾겠습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웃는 자가 되지 말고 웃는 자가 되십시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 90세가 된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를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믿는 자는 오늘의 시대 사고로 접근한다면 아마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정신병자 취급에 대한 일반적인 지론을 뒤집어엎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은 창세기 21:1-8절에서 여지없이 성취됩니다.
21장 강해 시간에 살피겠지만 감동의 장면을 미리 앞당겨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 사라의 나이 90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쯔하크’ 즉 ‘웃음’이라고 명했다는 점과 사라가 아들을 낳은 후에 고백했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라고 번역한 ‘쩨호크’는 앞에서 언급한 비웃음 ‘짜하크’와 어원이 같은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애 합니다.
후자의 웃음은 모두가 공히 긍정의 웃음, 즉 기쁨의 웃음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갈무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99세의 아브라함, 89세의 사라에게 오셔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부가 웃었던 웃음은 불신앙으로 가득 찬 비웃음이었지만 꼭 1년 뒤인 아브라함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일어난 기적 같은 득남의 은혜를 맛 본 부부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리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똑같은 사람에게 일어났던 웃음과 비웃음을 판가름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 차이입니까?
어불성설입니다,
99세의 아브라함과 100세의 아브라함, 동시에 89세의 사라나 90세의 사라에게서 믿음이 성장했다거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창세기 17-21장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도진개진이었습니다.
그 증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창세기 18:10-15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돔의 죄악을 확인하러 온 천사들을 아브라함이 극진히 대접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예고한 아들 탄생에 관한 최후 메시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시 최종적으로 확인하신 득남 예고의 메시지를 사라가 뒤편에서 듣고 웃었다는 보고는 두 사람이 끝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득남의 신탁을 믿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얻기 직전까지 전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불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결국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로 인해 엄청난 기쁨의 웃음을 웃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 정황에 따른 해석을 전제할 때,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웃음의 근원은 사람들의 어떤 상황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당사자들은 믿지 않고 심지어 비웃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고 이로 인하여 당사자들을 비로소 웃게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늘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얻게 되는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가나안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거민을 본 시각의 차이입니까?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작은 그림만 본 해석입니다.
긍정적인 보고를 여호수아와 갈렙이 본 것도 10명의 정탐꾼이 보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보는 대상이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민수기 14:9절입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본 것은 가나안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과 연관된 기사 하나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태복음 14:28-32절을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갈릴리 호수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30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개역개정판은 헬라어 ‘아네모스’를 ‘바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이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유진 피터슨의 번역은 조금 다른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거세게 이는 파도를 내려다보는 순간’
저는 유진 피터슨의 번역이 더 뜻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걸을 수 있었던 시간은 그의 시선이 ‘주님’을 보았을 때까지입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가 파도를 보는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빠졌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언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성도가 언제 웃습니까?
주님의 신실하신 일하심과 약속을 붙들어 맬 때 웃습니다.
성도가 언제 비웃음의 존재로 전락합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하심을 믿지 못할 때 비웃는 존재로 떨어져 나갑니다.
명심하십시다.
웃음과 비웃음의 차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일주일을 사는 동안, 우리들은 삶의 현장에서 백가지의 문제로 울고 웃습니다.
담임목사는 교우들이 울지 않는 인생이 되도록 중보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웃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도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스스로가 웃을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웃는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신실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일어납니다.
바라기는 세인 지체들 모두가 하나님을 향해 기쁨의 웃음을 올려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