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할례의 신학적 의미2024-03-08 17:19
작성자 Level 10

2022년 6월 2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예순 여섯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17:23-27

제목할례의 신학적 의미

 

서론)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하용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강해 3, 두란노, 220.)

제가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믿음은 유익이 되는 것에 대한 취사선택이 아니라오히려 보이지 않는 길(유익이 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함)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살피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피력하고 있는데 정답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이 무엇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갈 바를 알고 가는 것은 지도 따라 움직이는 상식의 일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들리지 않지만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나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믿음의 보폭을 디딘 첫 걸음마라고 보아도 괜찮은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어느 날찾아오셨습니다.

오신 뒤에 25년 전에 맺으셨던 언약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아브라함에게 맺은 언약에 대한 실천적 증표로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보았던 창세기 17:10-11절을 복기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 이스마엘에게도돈을 주고 산 아브라함의 종들과 그 집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들 모두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셈입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예외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싶은 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을 것을 강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는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창세기 17:12-14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할례의식에 대해 왜 이토록 강조했을까요?

4가지로 답을 제시한 월터 브루그만의 주석은 귀담을 만합니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45-246.)

⓵ 할례 행위 자체가 소속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⓶ 이스라엘 안에 있는 진지하고 헌신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 할례였다.

⓷ 할례는 신앙을 동력화 하는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⓸ 기독교인들에게 세례가 새로운 삶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할례는 구약적인 의미에서의 세례다.

적확한 갈파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여 할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 할례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겠다는 순종의 선언입니다.

 

본문을 시작하는 23절을 보십시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하나님이 이토록 중요시 여겼던 할례에 대해 아브라함은 본문에서 조금의 의심 없이 즉각적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였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입니다.

이 날이라고 개역개정판에 번역된 단어는 원어에 보면 정관사 가 있습니다.

헤 욤”(!wyh)

번역하면 그 날그 시간이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시간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명령하신 명령을 받은 그 날에 즉각적으로 시행했음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이라는 믿음의 행위는 즉각적으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앙의 단초는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머뭇거리는 순종과 즉각적인 순종과 예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전자의 경우입니다.

모세와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이 80세가 된 모세를 부르셔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모세는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 바로가 나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합니까?

Ⓑ 바로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 입술이 둔합니다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기드온을 봅니다.

기드온에게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 내게 명령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징을 보여주세요내가 드리는 제물을 사르십시오.

ⓑ 내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기에 미디안에게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양털을 마르게 하고 주변은 이슬이 있게 해 주십시오그 반대도 보여주십시오.

공통분모가 보이셨습니까?

머뭇거림이라는 불순종이 보입니다.

왜 이들이 머뭇거리며 불순종하였습니까?

계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정반대인 후자의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5:5절에 나타난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수고를 했다는 것은 계산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한다는 말은 내 계산을 뛰어넘겠다는 고백입니다.

순종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 더마리아를 보십시다.

누가복음 1: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고백은 내가 만일 죽는 일이 있어도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일사각오의 고백입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은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종이라는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면에서 앞에서 언급한 하용조 목사의 지론이 정답입니다.

믿음이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푼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이다.”

본문에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겠다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24-2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이 구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돋보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자였음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미온적인 신앙 때문에 계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본문 정황에 등장하는 할례 시행은 이런 미온적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뒤집어엎는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이스마엘의 나이 13세에 공히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말은 아직 이삭이 태어나지 않은 시기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이삭이 탄생되는 것을 본 뒤에 하겠다는 저울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겠다는 의지의 첫걸음을 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아브라함 식솔들의 할례시행 기사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는 순종의 사건이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겠다는 신앙의 선언이 할례시행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친구 목사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목사사모님한테 너무 잘 해주지 마라사모를 보고 침을 흘리는 순간치매가 시작되는 거라니까.”

친구의 농을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치매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치매는 우리가 교육받고 학습했던 일체의 기억들을 무력화시키는 질병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는 아픈 삶을 마감해야하는 것이 치매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자기 생각은 존중 받아야 하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이런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내 생각을 귀중히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의 생각을 존중받고 싶어 하십니다.

소중한 것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완벽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완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생각과 하명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례는 바로 이런 행위의 기초였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도 내 생각이 살아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로 살아가는 자이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선택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이사야 55:8-9절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