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마지노선이 있습니까?2024-03-08 17:17
작성자 Level 10

2022년 6월 8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예순 세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17:9-14

제목마지노선이 있는가?

 

서론)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폴란드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유대인들이 강제 구금되어 천하가 공로할 홀로코스트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용소에 아침이 밝으면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들은 목에 걸고 있는 노란색별을 차고 다니는 유대인들 중에 몇 명을 취미로 쏴서 죽이는 만행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란색별 명찰은 독일군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공할만한 악행은 아우슈비츠에서 지속되었는데 일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노란색별 명패는 죽음의 표적이 된 셈입니다.

누가 이 표적을 착용하고 싶었겠습니까?

허나 수용소 내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 명패를 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표적이었던 명패를 떼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나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정신은 정말로 대단한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들이 보인 부정적인 행보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는 목사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먼저 선택한 민족이라고 해서 그냥 무조건 그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목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948년에 팔레스타인들에게 행해진 유대인들의 종족 청소 작전과도 같은 만행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약속한 땅을 차지한다는 명분으로 진행한 팔레스타인들에게 행한 폭력적인 행위가 아우슈비츠 만행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동시에 지금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을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과 분리하기 위해 쌓아올린 거대한 담쌓기와 같은 만행에 대해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련의 일들은 자기들만이 당한 유대인 학살에 대한 피해자 코스프레 현상과 같은 궤변에서 나온 기형적 산물일 것입니다.

이렇게 변질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행태는 유감천만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유대인들의 긍정적 정신의 기초에 대해 잠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이스마엘이라는 변칙적인 믿음 안에서 아들을 낳은 지 13 년 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 주셨습니다.

한 개인의 가문을 책임지는 아버지에서 민족의 아버지로 축복의 외연이 확장된 것입니다,

이 복은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주어질 복입니다.

하지만 이 복의 확장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책임의 시작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재확인하시면서 아주 중요한 행위를 명령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시면서 할례의 세부적인 강령에 대해 본문 11-14절에서 자세히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깊이 들여다보면 할례 예식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⓵ 할례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작업입니다,

⓶ 유대인 남자라면 반드시 태어난 지 8일이 되는 날에 이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⓷ 혹시 이방인 중에 유대인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도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⓸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선민 공동체에서 탈락될 것을 공포합니다.

4가지를 종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 요건이 할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는 선민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영적인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할례 예식에 대하여 강경한 원칙을 강조하셨을까요?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믿는다는 표징이자 강력한 증거로 할례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교훈은 할례라는 행위라기보다는 언약이라는 정신적 내용입니다.

할례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밀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밀라’ 즉 할례라는 이 단어는 독단적으로 쓰이지 않고 상용 단어 하나가 덧 붙여져 사용됩니다.

바로 언약이라는 단어 베리트입니다,

결국 할례라는 단어를 쓸 때는 베리트 밀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즉 언약의 할례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베리트’ 즉 언약에 대해 부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리트는 문자적으로 반으로 쪼개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결국 반으로 쪼갠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언약 체결 기사입니다.

창세기 15:5절을 복기합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한 번성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어 15:7절에서 의미 있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가나안 땅을 주어 그 땅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를 펼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구속사의 철저한 도구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을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환상이 바로 동물들을 둘로 쪼갠 사건입니다.

소위 말하는 언약 체결 예식을 행하신 것입니다.

동물을 반으로 쪼갠다고 번역한 쪼개다’(바타르)라는 단어가 언약’ (베리트)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왜 이것을 중요하게 설교에서 다루는가 하면 할례 예식이 곧 언약을 실천하는 증표의 시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63번째 창세기 강해를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공유해야 할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드려야 하는 성도의 마지노선을 반드시 지키는 것입니다.

 

마지노선이라는 용어는 군사 용어로 사용됩니다.

빼앗겨서는 결코 안 되는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오늘의 용어로 사용될 때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저는 이 단어를 오늘 설교 제목으로 설정했습니다.

영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양보해서도 안 되며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계선이 바로 영적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영적 할례이기도 합니다.

 

주존감(主尊感)을 잃지 않는 믿음입니다.

 

풀면 이런 뜻입니다.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감정입니다.

언제든지 이 영적 교훈을 드릴 때만 단골 메뉴로 교우들에게 소개하는 구절이 사도행전 26:29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동시에 빌립보서 3:7-8절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이 선언하며 고백했고 또 살아냈던 이 삶의 내용을 이렇게 정의하는데 주저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받은 할례였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유대인임을 지켜가는 마지노선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달고 있었던 노란별 명패와 같은 선민공동체의 마지노선과 같은 자존감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사는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 시대를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압도하시는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일하시는 시대인 오늘우리가 견지하고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없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비록 내 생식기에 표피를 자르지 않더라도 날마다 주님을 위해 내 자아를 죽이고 주님만 드러나게 하려는 주존감이라는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주간 소그룹에서 나누었던 박영선 목사의 글 구원 그 이후’ 제 1과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해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하나님은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약속하셨다는그 꿰어 맞출 수 없는 출발선과 결승선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없습니다이 갈등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시고 선언하신 목적지와 그것을 이룰 수 없는 나의 상태가 너무 이율배반적이고 도저히 연결될 수 없어서 느끼는 황당함으로 고민하는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이 갈등이 없는 자에게는 신앙의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박영선, “구원 그 이후”, 무근검, p,15.)

프랑스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마지노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여 그었던 마지노선은 프랑스가 목을 걸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그어놓았던 절대선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지킬 수 있는 선이 마지노선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신의 자리에 등극한 호모 데우스의 시대인 21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마지노선이 흐릿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근래제 개인 기도 시간에 절절하게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인 저는 물론세인 교회 지체들이 영적 삶의 현장에서 제발 치열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영적인 의미 없는 일주일을 사는 자들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선 자들인지 묻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날동안 하나님과 관계된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는지 조차도 질문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박영선 목사의 지적대로 신앙적 성숙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말의 갈등도 없는 자가 21세기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말하는 자가당착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지난 주간에 교단 목회자 축구대회에 얼굴을 비치고 왔습니다.

경기 순서가 아닌 지방회 목회자들이 천막에 경계 없이 앉아 이런 저런 담소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회 소속 젊은 목회자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서울 지방회 어느 교회가 부교역자 대우가 꽤 괜찮은 데 다음에는 그 교회에 지원서를 내 볼 생각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또 어느 큰 교회 목사님에게 얼굴 도장 찍었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이런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종합하면 이런 이야기의 내용들이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들렸습니다.”

줄 잘 서자고.

주님을 향한 치열함이 없는 목회자재앙입니다.

할례 예식은 육체의 표피를 잘라내야 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고통이 따른 예식입니다.

생후 8일 된 아이에게 할례 예식을 명한 이유는 아마도 육체의 고통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시기라는 것을 감안한 하나님의 배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십 구 세 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었습니다.

날카로운 돌멩이로 마취도 없이 생식기의 표피를 베는 할례 예식의 당사자가 겪어야 할 고통은 무척이나 컸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이 수반된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믿고 승리하는 쾌거를 얻을 수 있는 복 된 자가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여러분은 어떤 영적 마지노선을 갖고 있습니까?

블레즈 파스칼이 말한 내용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인간은 은총 없이는 지워지지 않는 자연적 오류로 가득 찬 존재일 뿐이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민음사,p,62.)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간섭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오류 가득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그 언약과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그 약속을 향한 믿음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영적 마지노선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