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1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20번째 강해) 제목: 다시 나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3:3-7 서론) 저와 여러분은 지난 수요일 설교 시간에 밤늦은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폈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유대 종교의 회원일 가능성이 높은 단시 종교적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나누었습니다. 더불어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장지에 매장되어 있는 예수님의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늦추기 위해 향유 100 리트라 라는 엄청난 양을 가지고 온 경제적인 면에서도 꽤 괜찮은 지역 유지였음도 살폈습니다. 이렇게 주후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뭐 하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듯 꽤나 잘 나가던 인사였던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한 혁명적인 사건을 보고, 동시에 예루살렘 지역에서 이런저런 이적을 보인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고 추론했습니다. 그만큼 종교적 심성이 강한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니고데모는 주변 여론이 두려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깊은 밤과 같은 상태였음을 요한복음 저자가 의도적으로 기술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을 전제하여 예수님과 극적 만남을 경험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이 오늘 텍스트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본론) 2〜3절을 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변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주께서 예루살렘 각처에서 행하신 표적들을 높이 평가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종교성이 강한 니고데모가 자기를 칭찬하고 있는 저의를 모를 리 없는 주께서 니고데모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직격(直擊)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교훈한 것입니다.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을 가진 니고데모는 주님의 이야기를 듣자 가장 생물학적이며 원초적인 말로 반응하며 주님께 되물었습니다, 4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주께서 알려주신 거듭남의 의미를 생물학적인 차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지성의 소유자 니고데모의 되물음에 아파하며 탄식하신 주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주님이 방향성은 분명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또 들어가는 방법을 ‘다시 남’이라고 천명하신 견고한 방향성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고 하신 대목에서 주님이 얼마나 ‘다시 남’을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이 이렇게 엄중하다면 ‘거듭남’이라는 기독교가 말하는 교리적 내용을 신자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동시에 거듭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해석할 수 있는 척도로 주께서 제시하신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도 접근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거듭남’이라는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많습니다. 해서 논쟁의 빌미가 된다고 할 정도로 예민한 단어가 ‘거듭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가장 복음적이고 안전한 해석을 택하려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개선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을 뜻한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불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Ⅰ』, 325쪽) 저는 개인적으로 바레트 교수의 주석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자연인이 있는데 그 사람의 속성과 본성은 악하다고 성경이 명시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더불어 인간 본성에 대해서 쐐기를 박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저는 바울의 선언에 조금도 이견을 달지 않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런 본성을 소유한 존재가 인간이기에 우리는 자연인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존재임을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레트 교수는 3절에서 ‘본다’라고 기록한 단어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본다’라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책, 327쪽) 바레트의 말대로라면 5절에서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전한 메시지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그렇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죄성,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방법이라는 말로 해석해도 타당성이 있는 성경적 증언입니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접근은 실로 강력한 시사점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줍니다.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로 내 삶의 전 인격이 변화되는 상태가 거듭남입니다. 2) 물과 성령으로 나는 거듭남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물과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4장 강해에서 만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주께서 주고받은 말씀을 소개하면서 물의 신학적 함의를 해석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13〜14절을 만나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주께서 주시는 물을 먹는 자는 영생의 샘물이기에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임을 교훈하셨습니다. 이와 아주 유사한 교훈을 요한복음 7:37-39절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저는 소개한 요한복음에 기록된 두 구절을 통해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두 개의 어휘로 구분해서 언급했는데 단어는 각기 다르지만, 두 단어가 의미하는 영적 의미는 같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제 해석을 맞춘 것은 고전적인 주석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캘빈의 해석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캘빈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성령께서 이 둘째 탄생(중생)의 주가 되신다는 말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사람이 두 번 태어나는 것은 자연 현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에 의하여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이라는 낱말은 같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쓰고 있다. (중략) 그리고 이 물은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고, 우리가 전혀 불모의 상태로 태어났을 때, 우리 위에 부어진 그의 능력을 따라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이라는 원기를 옮겨주는 것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물은 단순히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고 소생케 하시는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 (존, 캘빈, 『신약성서주석-요한복음』, BSMP, 98〜99쪽) 조금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메시지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함을 받는 도구가 물이며, 그 역사를 이루도록 돕는 중보자가 성령인데 이 두 개의 역동이 콜라보를 이루는 사역이 다시 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은 두 개의 단어로 해석해야 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게 하는 역동적인 수단과 주체이기에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신학적인 함의를 살펴보았으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잇대어 이해해야 합니다. 이 이해가 다시 나야 한다는 거듭남에 대한 오늘의 해석이자, 오늘 레마이기도 합니다. ※ 내 중심적인 삶의 방향성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이 다시 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온 이들이 흔히 착각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신비적 사건을 경험하거나, 치명적인 질병에서 고침을 받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일련의 일을 통해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헌신하고, 세속적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역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스러운 일은 그것만이 거듭나는 방법이라고 고정화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비적인 일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으로 선회하고 살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한 자들의 증거는 본인들의 삶의 질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삶의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정말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그리고 마음으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한 후, 하루를 살았던 나를 대단히 엄격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에 여러분의 평가가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루를 살았는데 내 삶의 뒷마당을 반추해 보니, 내 삶의 자국이 온통 나를 위한 내용이었다면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더 많은 자입니다. 재론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정결케 하는 물과 그 정결케 한 주체자가 성령님인데 그분의 만지심을 경험했다는 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 영적 경험이 거듭남이라면, 그 사람은 그 경험의 순간부터 나 중심의 삶이 정말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를 역동하시고 바르게 인도하는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며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당연히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듭난 자의 삶은 이기적 삶이 아니라 철저히 이타적 삶을 살아낸다는 말입니다. 어제 100번째 독서 여행을 마쳤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콜라보로 엮은 『동주와 빈센트』라는 책을 플레이스 영 심방을 갔다가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읽다가 ‘길’이라는 동주의 시에 멈추었습니다. (윤동주, 『동주와 빈센트』, 저녁달, 42쪽)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일본 강점기 제국주의 시대, 나라를 잃은 한을 품고 저항시를 쓰다가 29세 요절한 윤동주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절절한 시어 중, 마지막 연이 나를 타격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인은 잃은 나라, 조국을 생각하며 아파합니다. 나라를 잃게 된 이유는 나를 찾지 않았던 무감각이 사로잡았던 미개함 때문임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함이라고 자신을 결기합니다. 자아가 갖고 있었던 사고의 변화를 선언한 셈입니다. 시인의 이 정신은 고스란히 살아 오늘도 우리를 각성하게 해줍니다. 독서하다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시인은 너무나 사랑했던 내 조국에 대한 관심을 단 일초도 놓은 적이 없는 시대의 정신이었는데, 나는 얼마나 목사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았는가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오늘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전 인생을 바쳐 사역하고 있는 신학교 후배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잠시 방문하여 인사차 들려 섬겼습니다. 후배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아프리카로 가라 해서 갔습니다. 카메룬 영혼을 품으라고 해서 품었습니다. 그렇게 달린 지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제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사랑의 목적입니다.” 적어도 거듭난 이들은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알기에 이후로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내 삶의 목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법, 하나님이 지켜가기를 소망하시는 생각으로 내 삶을 확정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시인이 고백한 고백은 정답입니다. 시편 57: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래전에 김기석 목사의 저서 『삶이 메시지다』를 읽다가 벼락같이 다가온 글로 인해 전율하는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김 목사가 어려 고향 시골에서 살 때, 경험했던 아버지의 농사를 추억하는 글이 있습니다. “겨울 한복판에 봄이 우뚝 서는 것처럼 농사는 겨울에 시작되는 것이다. 겨울에 무엇보다 중요한 농사는 객토 작업이었다. 하천 부지의 충적토나 붉은 빛을 띤 산지의 토양을 떠내 토질이 약해진 논 위에 길게 펴는 작업은 아버지가 가장 공을 들였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또 그 벼 그루가 남아 있는 논을 몇 번씩 갈아엎어 그 속에 계분 같은 것을 넣어 주기도 했다. 아버지, 아직 벼 심을 때도 아닌데, 왜 논을 간대유? 그래야 흙 속에도 공기가 스며들어서 땅이 기름지게 되살아는 거여.”(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126쪽) 농부들은 농한기에도 땅을 생각하며 산 이들입니다. 그들은 단 한시도 땅에 대한 생각을 저버린 적이 없는 이들입니다. 아마도 가장 정직한 농부들이 땅을 생각하는 그 사랑의 마음이 이듬해 아름다운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게 하는 제일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자가 거듭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대는 그대만을 위한 삶을 줄기차게 살고 있습니까? 거듭남을 재고하십시오. 그대는 거듭난 자가 아닐 가능성 100%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내 중심적인 삶의 방향성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할지라/주는 너의 큰 상급 큰 도움이시라 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영을 부으사/크신 사랑 안에서 주를 보게 하소서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기도 제목 ① 하나님,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외의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거듭난 이의 마음입니다. 이를 이루게 하옵소서. ③ 12월 22일에 영혼을 구원할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옵소서. ④ 12월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⑤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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