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19번째 강해) 제목: 기대하심 본문: 요한복음 3:1-2 서론) 우리는 예배 시간, 설교를 듣기 전에 항상 이렇게 인사합니다. “말씀에 기대를 거십시다.” 우리는 왜 말씀에 기대를 걸어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에 기대를 거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대하시는 것이 또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그리 쉽게 접근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부터 살필 요한복음 3장은 기독교의 신학적인 교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해하고 경험해야 하는 필수적 내용인 ‘다시 나는 것’ 흔히 하는 말로 ‘거듭나는 것’, 혹은 ‘중생’에 대한 성경적 증언으로 아주 대표적인 텍스트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몇 주 동안 교우들과 수요일 예배를 통해 이 교리의 세밀한 공부와 더불어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과정으로 들어가는 본문 1-2절을 다루려고 합니다. 말씀에 기대를 거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성경 말씀입니다. 저 역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 텍스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충격적인 사역을 나누었습니다. 성전 정롸 사건은 당시 유대 종교 권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임을 감안할 때, 대단히 충격적이자 혁명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 정화 사건이 끝난 뒤의 보고인 2:23-25절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도 받았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복기한다면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혁명적인 사역을 마치자, 그의 행보를 보고 다수의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믿었다고 보고하면서 요한복음 저자는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자기를 믿는 그들에게 자기의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고 보고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표적을 믿는 자들의 한계성을 예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하여 이런 개운치 않은 영적 여운을 남긴 요한복음 저자는 3장에서 기독교 교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단추를 매는 듯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본문은 매우 함축적인 글로 요약되어 있기에 조금 세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출신의 지도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니고데모임을 요한복음 저자는 밝힙니다. 그의 직책은 ‘바리새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지도자’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르콘’을 다른 성경 버전에서는 ‘관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대체로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한 의원들에게 붙이는 단어이다 보니 아마도 니고데모 역시 공의회의 의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입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주후 1세기 당시 부유층에 속해 있던 인물일 가능성 100%입니다. 요한복음 19:39-40절을 봅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숨을 거둔 이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자신이 거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빌라도에게 전했고, 빌라도가 이를 허락하자 자신의 소유인 다른 시신을 한 번도 매장한 적이 없는 개인의 무덤에 안치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더불어 사 복음서 전체에 공이 등장하는 인물이 소개되는 데 오늘 본문에 처음 소개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죽음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시신을 거둔 아리마대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으로 몰약과 침향을 혼합한 향유(방부제) 100 리트라를 가지고 온 니고데모는 예수의 시신을 싸고 있는 세마포에 함께 매장하였다고 보고합니다. 1 리트라가 약 327그램임을 감안할 때,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위해 드린 100 리트라는 3,270그램일 것입니다. 통상 왕의 시신을 안장할 때나 쓰일 정도의 엄청난 가치고 양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니고데모가 대단히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자, 금력이 있었던 자가 니고데모입니다. 당시 사회적 구도로 조망할 때, 전혀 남부럽지 않은 상위 1%에 해당하는 인물이 니고데모였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연배가 한참 아래인 예수를 밤에 찾아왔습니다. 왜 밤에 찾아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대목입니다. 타인의 이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목할 수 없는 밤에 예수님의 처소로 찾아온 것입니다. 찾아와 한참 연하의 인물인 예수에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2절을 다시 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유대 율법의 본거지이자 총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충일한 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나사렛 출신의 시골뜨기 노숙인인 예수에게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님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실로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여겨지는 장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파격의 고백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해 보는 것은 ‘다시 남’이라는 교훈을 새겨보기에 앞서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기에 오늘 설교를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답을 위하여 다시 2절을 만나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분명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 극진한 예를 갖춘 이유는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진행하시면서 여타 지역에서 보여준 표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에 니고데모가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율법주의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는 물론, 예루살렘 지역에서조차 예수께서 일으킨 여타 표적들의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것이고, 그 소문은 니고데모에게 적지 않은 관심거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가 속해 있었던 유대 종교의 틀 안에서 도무지 볼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는 권위를 예수께 부여한 셈입니다. 나이가 어렸고, 나사렛이라는 볼품없는 동네 출신이지만 바로 이런 배경을 갖고 있었던 예수에게 니고데모는 집중하게 된 것이고, 더불어 초면인 예수께 나온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니고데모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작금의 권력을 나름 내려놓은 양보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꺼림직한 일이 니고데모의 행보 안에 보입니다.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①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온 시각이 밤이라는 점입니다. ‘밤’으로 번역한 헬라어 ‘뉘크토스’ (νυκτὸς)의 문자적인 의미는 깊은 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후 1세기 사람들이 모두가 잠에 깊이 들어 있을 오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고데모가 깊은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그가 세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유대 권력자가 가뜩이나 그가 속한 종교 권력의 요주의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예수를 방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임을 모를 리 없었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간 방문 시간을 밤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문자적인 해석에 대해 동의하지만, 대단히 날카로운 신약학자의 주석에 더 집중하는데 먼저 그의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랍비들은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는 이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밤은 그 말의 문학적 의미 이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방문했다는 것은 단순히 몰래 방문했다는 그런 의미 이상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니고데모는 참 빛의 현존으로 오기 전까지 처해 있었던 어둠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으리라는 것이 더욱 개연성이 있다.”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Ⅰ』, 322쪽) 저는 이 해석에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유대 율법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바리새인이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영적 어둠에 놓여 있는 나약했던 존재라는 바레트의 지적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② 표적 신앙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주께 와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이런 표적을 보일 수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의 권능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권능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이 토로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출애굽기 3: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미션을 주시면서 약속하신 메시지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또 다른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예레미야 1:19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소명자로 부른 뒤에 그에게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는 미션을 하달하실 때 준 말씀입니다. 북방에 존재하는 바벨론에 의해 유다를 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환상을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여주면서 이로 인해서 유다인들이 너를 미워하여 치겠지만, 내가 절대로 저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천명하면서 예레미야에게 약조하신 것이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등장한 니고데모가 예수께 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이라는 사족을 달고 토로한 내용은 예수를 모세와 예레미야와 같은 동급의 선생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2절을 시작하는 첫 말머리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1-2절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예수를 만나기 전의 니고데모는 종교인이었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믿고 있는 이들의 공통 분모는 종교인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기 이전, 그는 철저한 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그러하듯이 표적 신앙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다른 종교적 인물과 예수님을 동일시했고, 결국 그는 세간의 여론이 두려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종교적 만족과 의문에 대한 종교적 답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오늘도 이런 니고데모 성향의 종교인들이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근원이자, 진리이자. 길임을 인정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수단 삼아 종교적 이익과 혜택을 받음은 물론,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예수께서 표적을 행하심으로 인해 쏟아부어 주기를 바라는 자들이 산재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경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1-3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예수께서 잔인한 십자가형을 당하신 뒤에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개인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의 형편은 민간인들이 접근하기가 대단히 부담스러운 형편이었습니다. 그 형편을 마태복음 27:62-66절에서 보고합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대단히 살벌한 구조였고, 접근 불가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장소로 장례 향품을 가지고 접근한 이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여인들은 무덤에 갔다고 예수의 시신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고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셔서 약속한 갈릴리로 가셨다는 층격적인 전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 소식을 숨어 숨죽이고 있는 사도들에게 알립니다. 그때 사도들의 반응을 누가복음 24:11절이 소상히 증언해 줍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이 기록에서 주목할 단어를 교우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따랐던 12명을 호칭할 때 “제자”(μαθηταῖς)로 많이 지칭합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4:32절 같은 경우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그런데 유독히 누가복음 24:10-11절에서는 ‘제자’가 아니라, ‘사도’(ἀποστόλους)로 표기했습니다. 누가복음 24:10-11절입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누가의 의도적인 표현법일 것입니다. ‘제자’는 신앙의 행동을 같이하는 길벗의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직책에 더 많은 의미를 두는 표현법입니다. 누가는 적어도 24장에서 예수를 끝까지 따랐던 그리스도인은 여인들이며, 사도들은 종교적인 직책을 갖고 있던 자들임을 비평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술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세인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이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밤에 찾아온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의 니고데모가 아니라,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자신의 소유 중에 엄청난 것(100 리트라)을 주께 드렸던 니고데모일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어느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아우성을 쳐서 이분이 장로 선거에서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장로가 안 되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공부를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도 나왔습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공인 회계사도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갖추고 있어서 이 정도면 사회적으로 안정을 얻었고, 이제는 종교를 하나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제가 한 3년 정도를 다니니까 세례도 주고 집사도 주었습니다. 나는 안 하겠다고 했는데 교회에서 마침 부를 수 있는 호칭도 없고 하니까 그냥 집사를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집사가 되었습니다. 직업이 공인 회계사라서 교회에서 일군이 부족한 터라서 교회의 재정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제 직업이 공인 회계사인데 재정부 일을 못하겠습니까? 완벽하게 처리해 나갔습니다. 재정부 일을 맡다 보니 교회의 살림을 알게 되었고 교회가 하는 일은 많은데 재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안타까운 나머지 나에게는 돈도 있고 해서 좋은 일을 한다는 뜻에서 헌금을 조금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리 집사에서 안수집사로 안수집사에서 이제는 장로로 선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수집사까지는 그럭저럭 버틸만했는데 장로로 선출이 되기에 이른 지금, 나는 도무지 양심이 괴로워서 안 되겠습니다. 정직히 말하지만, 나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주워 들었던 풍월로 예수를 인정하는 종교인인데 어떻게 장로의 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장로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글이라 책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책 옆 공간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안수집사는 장로가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하십시다.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대는 종교인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수 타오르는 인생의 사막 길을 걸을 때/갈급하여 지치고 쓰러지던 발걸음 생명수는 어디에 솟아날까 어디에/애태우던 발걸음 생명 샘을 찾았네 사막 길이 끝없어 쓰러지고 말 때에/그 누군가 다가와 생명수를 주시네 인자하신 그 모습 나의 구주 예수님/두 팔 벌려 날 안고 참 평안을 주시네 인생길이 험하나 낙심하지 마세요/생명이신 예수님 그 안에서 살면서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를 마시며/영원토록 샘솟는 소망으로 살아요 저 천국이 내 가슴 설레이게 하네요/광채 나는 주 영광 끝없이 핀 꽃무리 유리 바다 황금 길 열두 진주 문들과/주님 계신 저 천국 내가 갈 곳 저 천국 기도 제목 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소서. ② 세인 공동체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양육되게 하옵소서. ③ 22일, 전도축제가 피상적인 행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은혜가 임하는 사역이 되게 하소서. ④ 내가 구원할 태신자와 잃은 양을 그날에 드리게 하소서. ⑤ 유종의 미를 거두는 12월이 되게 하소서. ⑥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