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8) 제목: 의탁하지 않으신 주님 본문: 요한복음 2:23〜25 서론) 시편 46:10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인이 고백한 이 찬양의 노래가 담고 있는 영적, 신학적 의미는 엄청납니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엄청난 선언에 담지 된 신학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시인이 앞서 말한 구절이 이를 부연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이 구절은 히브리어 ‘הַרְפּ֣’(하루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멈추다’ 혹은 ‘중지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46:10절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로 알려진 시편이 46편이기에 이 시에 담긴 영적 정황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고라가 누구였지요? 레위의 아들이었던 고핫의 손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정통 레위 지파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라의 행위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행보였습니다. 지성소의 지성물을 옮기는 막중한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의 직을 탐함으로써 모세에게 반역했다가 땅이 꺼지는 재앙을 만나 그 땅속에 파묻혀 죽임을 당함으로써 멸문지화를 맛보았던 불행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시편 42편부터 49편이 고라 자손이 노래한 시라는 점입니다. 대단히 불행한 인생을 마감한 조상을 둔 후손이라면 그 조상의 영향으로 거의 부정적인 씨앗의 열매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 시편 42〜49편에 이르는 고라 자손들의 노래는 이런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입니다. 이들이 남긴 노래들은 42〜49편 부제 그대로 ‘마스길’ 즉 ‘적절하고 아름다운 ‘교훈’들로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도 앞에 소개한 46편은 절정입니다. 고라의 자손은 이렇게 노래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개진합니다. 시편 46:1〜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렇게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고라의 자손의 고백은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읊조린 10절에서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다시 10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인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열조가 레위 지파라는 기득권층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결과에 따라 비참한 최후를 맛보았던 것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알았기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만이 온전한 신앙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각인한 결과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만이 고라 자손들에게는 절대적인 명제이자 요소였을 것이기에 자신들의 신앙적 집중을 방해하는 일체 소리, 유혹, 달콤한 사상, 이론 등등을 향해 잠잠하고 자기 소리내는 것을 중단할 것임을 강력하게 선언한 것이 시편 46:10절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본론) 이제 본문으로 향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장은 본문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어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본문입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정수를 소개하는 3장을 잇는 가교의 역할로 본문을 기록한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복선을 알려주고 있는 구절이라는 신학자들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23절을 강해하겠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이 구절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자칫 간과할 수 있는 교훈을 바로 잡아 주는 은혜를 줍니다. 무엇일까요?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세뇌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활동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했던 장소가 갈릴리 지역이었다는 점입니다. 실로 그런 접근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이면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공생애 3년 기간, 머물렀던 시간과 방문했던 횟수가 갈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행보가 갈릴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께서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머무시는 동안 행하셨던 기적 사역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결국 23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적지 않은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추론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기적을 베푸신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23절 후반절은 보고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루살렘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는 보고입니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표현은 ‘믿었으나’라고 번역함으로 이어지는 24절을 불안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믿었으나’라는 표현은 그다음에 나오는 절이나 구를 부정문으로 만드는 반위(反位) 접속의 조사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24절은 이렇게 보고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3절과 24절을 이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시고 베푸셨던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믿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반응하셨을까요? 영어 성경 NLT 번역으로 요한복음 2:24절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그렇게 반응하실 수밖에 없었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NLT 요한복음 2:24절: But Jesus didn't trust them, because he knew human nature.” 번역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본성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 자들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의 해석이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소개합니다.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에 기초한 믿음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 곧 단단한 땅이 아닌, 위로부터 오시는 분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었으나’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외모로 보지 않는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 강해』, ivp, 60쪽) 주님은 얄팍한 인간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 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보이는 기적을 보고 믿는 그 얕은 믿음에 주님은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넘어갈 수 있지만 주님은 그 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2025년, 제천세인교회의 교회 표어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 이 표어를 정하면서 주제 성구도 정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시편 46:10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아프고 아픈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매우 못 견뎌 한다는 재앙입니다. 왜 오늘의 세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에 못 견뎌 하며, 그렇게 인정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까? 그렇게 되면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압박하는 사탄의 전략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보이는 것은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발휘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12월 독서 여행에서 함께 나누게 될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제시한 13번째의 모략은 오늘도 여전히 섬뜩하게 합니다. 그 문장을 소개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제쳐놓은 채, 세상의 기준과 관습과 유행에 따르게 하는 편이 좋은 게야”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80쪽) 세상의 관습, 기준, 유행은 다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확신을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보이는 것 중의 영원한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보이는 것을 토대로 믿음을 가졌다고 떠벌이는 이들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 오래가지 않을 껍데기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이 그 증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 본 자들이 주님을 벳세다에서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주님이 그 자리를 떠나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한 번 본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에게 마약이었습니다. 포기하지 못한 그들은 주께서 가버나움으로 동선을 옮기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주님을 추적하여 그곳까지 따라갑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힐난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는데 왜 우리 허락을 받지 않고 이곳으로 피신했냐고 항의합니다. 이런 적반하장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따라온 그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보여달라고 압박합니다. 이 소위를 알고 계신 주님이 그들에게 결정타를 먹입니다. 내가 보여줄 진짜 기적은 생명의 떡인 나를 믿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1)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 보이는 기적을 요구한 그들이 예수님의 진정성이 있는 참 진리를 소개받고 취한 태도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66절은 서글픈 구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무리만 떠난 것이 아니라,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도 주님을 떠나갔다고 요한복음 저자는 고발합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에 혈안이 된 신자들의 민낯을 여지없이 보여준 장면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보이는 기적 때문에 믿겠다고 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주께서 취하신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4〜25절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으로 윗 구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속속들이 아셨고, 그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도움 없이도 그들을 훤히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이다.” 탁월하신 주님의 행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경종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해제를 통해 수요일 예배에 주시는 레마를 우리는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정수는 보이는 점(點) 된 인간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선(線) 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설교문을 작성하다가 이재철 목사의 글이 눈에 띄어 인용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믿음은 일시적 동의가 아니라 지속적 수용입니다. 믿음은 자기 강화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 부인입니다. 믿음은 여건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여건에서도 불변적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지향입니다. 믿음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인 동시에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길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Ⅰ』, 홍성사, 225쪽) 순례 6일째 되는 날 오스트리아에 있는 할슈타트를 방문했습니다. 호수와 같이 어우러져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동화 같은 마을에 위치한 할슈타트성당 한복판에 공동묘지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음산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마치 잘 다듬어진 화원같이 예쁘기 그지없는 공동묘지였습니다. 눈여겨 보다가 묘지 비석에 기록된 한 비문이 제 시선에 들어왔습니다. “Ich dachte, die Person, die ich liebte, würde bis zum Ende bei mir sein … ” “내 사랑했던 사람, 끝까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영원히 함께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7〜18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영원하지 않은 인간에게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 스스로 완벽하셨기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는 믿음과 완벽한 주님께 의탁하는 삶입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영적 삶의 태도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영광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 제목 ① 보이는 기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② 사람을 의탁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삶을 의탁하는 신앙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③ 11월 마지막 주간에 실시되는 2024년 제2차 말씀 저녁 집회에 기름 부음을 주옵소서. ④ 12월 22일 영혼 구원 축제에 구원받을 이를 보내 주옵소서. ⑤ 담임목사의 사역이 지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역동이 있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