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3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7) 제목: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본문: 요한복음 2:18-22 서론) 아주 오래전에 선배 목사께서 섬기던 교회에서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똑똑한 선배셨는데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름 놀랬습니다. 후에 이유를 알게 된 사건의 전말은 선배의 유일한 취미가 낚시였는데, 낚시를 나갔다가 주일 저녁인지를 모르고 예배를 놓쳐 버린 것이 화근이 되어 불가피하게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고충이 나름, 이해되는 일이었습니다. 친구 목사 한 명이, 골프에 관심이 많습니다. 언젠가 사석에서 제게 이렇게 아픔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설교하는데 갑자기 회중석이 필드로 보였다. 순간, 아찔했는데 성도들이 머리가 골프공으로 보였다. 나는 그날 예배를 드린 게 아니라, 필드에서 유유자적한 말도 안 되는 놀이꾼으로 전락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그 사람의 영적 수준입니다. 어제 교단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진행된 전도사 교육의 한 강의를 맡아 섬겼습니다. 강의 중에, 지성적 영성을 잃지 않는 후배들이 되어 달라고 권면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Q/A 시간을 가졌는데 강의에 참여한 전도사 중의 한 명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지성적 영성을 함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목사님이 지향하시는 영성 훈련이 있으십니까?” 기실, 이 질문은 강의한 참석한 전도사에게만 받은 질문은 아닙니다. 여타 강의에서, 혹은 신대원 강의 중에 정말로 많이 받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때는 지금이나 질문을 받으면 똑같이 두 개를 답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말씀 묵상이고, 또 다른 하는 엎드림의 영성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밀려오는 감동은 이론으로 설명 불가입니다. 엎드림은 개인의 영성입니다. 서재에서 말씀 묵상을 마치고 매일 한 셀을 위해서 머리를 숙이는 엎드림을 실천합니다. 새벽에 보편적 제목의 엎드림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영적 내공으로 빠져드는 것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목회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그 목회자의 수준이자, 그 목회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수준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본론) 오늘 저는 본문에서 보는 시각 즉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여정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실례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강력한 행동을 보이자, 그 성전을 대상 삼아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던 이들이 반론을 제기하며 예수께 대항합니다. 이들의 대항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미 유대교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나사렛 촌뜨기 출신의 예수가 그리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께서 여타 다른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대중적 여론이 예수께 대단히 호의적이었고, 조금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예수께 열광적이었기에 단지 표면적으로, 물리적 방법으로 예수를 제어할 수 없는 분위기인 것만큼은 사실이었기에 예수의 반대자들은 에둘러 불만을 표합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것은 표적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언자나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자라면 눈에 보일만한 표적 정도는 행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구태를 여지없이 종교인들이 요구한 셈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한 글에서 갈파한 내용은 적확합니다. 고린도전서 1:22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이 요구했던 표적 신앙은 매우 위험하고 심지어 해롭기까지 한 종교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6:1〜2절을 살펴보십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오병이어가 일어났던 벳세다로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가 요한복음 저자는 갈릴리 지역에서 병자를 고친 주님의 치유 사역을 표적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그 표적을 다시 또 보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표적 신앙의 위험이 얼마나 해로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는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사역의 동선을 옮기신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온 이들을 면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6:24-26절을 나눕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는 백성들의 의도를 아신 주님은 제자들과 급히 그곳을 피하여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이튿날 무리는 예수께서 벳세다에 계시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떼 지어 가버나움으로 옮깁니다. 이윽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예수께 대놓고 항의하기에 이릅니다. “랍비여, 우리도 모르게 언제 이곳 가버나움으로 이동했습니까?”(요 6:25) 이들의 저의를 아신 주께서 직설한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6:26절을 만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주님은 한술 더 떠서 유대인들의 아주 못된 저의를 고발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빙자한 안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무리들의 시커먼 속내를 들킨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하며 동의합니다. 표적 신앙의 위험성은 보이는 것만을 믿게 한다는 폐해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게 하는 결과는 신앙의 본질과는 다르게 비본질도 유익만 되면 얼마든지 수용하게 하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기형적 행태로 변질되게 한다는 점에서 경계 또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 안에 있었던 장사치, 환전상, 자릿세를 받아먹으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종교 모리배들이 예수께 요구한 것은 무슨 권리도 성전에서 이 소동을 피우냐는 항의였습니다. 이 저의를 너무 잘 아셨던 주께서 이들의 항의에 즉답한 말씀을 본문 19〜21절이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주님이 대항하신 답변은 이미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보이는 성전 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치욕의 대상 그 자체이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이 치욕적인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삼 일만에 다시 성전을 세울 것이라고 천명하신 점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에 임할 다시 살아나심을 염두 해 발언이었습니다. 결국 무엇을 강조하는 말씀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프로젝트는 건물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한복음 17번째 강해 설교를 통해 세인 지체에게 주시는 분명한 레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지금 내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묻고 계신다는 교훈입니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걷는 신앙의 목표는 어디이며 무엇입니까? 혹시 예수를 이용하여 떨어지는 세속적 안락함의 부스러기가 목적입니까? 보이는 것에만 추구하는 세속적 유익함 쪽입니까? 마가복음 3:1〜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이 구절이 시사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와 연관하여 적용해 본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보셨던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 반면 바리새파 종교인들이 보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일이었다는 교훈입니다. 종교가 외형화 되면 본질은 사라지고 맙니다. 종교 체계의 유익만을 위한 행동은 공통의 선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형식화되면 공통의 유익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말 그대로 본말전도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이런 기형적 산물인 헤롯 성전을 허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성전이 허물어져야 예수가 목적이 되고 방향성이 되기에 역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22절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면서 성전 정화 담론을 마무리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렇습니다.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신 성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의 입을 통해 확인합니다. 한강 작가가 쓴 시집이 있습니다. 나름 난해한 시어들이 담겨 있는 시집입니다. 그녀는 시집에서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니”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37쪽) 이 시어를 읽다가 작가가 한 모임에서 밝혔던 지성적 사고가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기대의 아픔을 직시하고 투쟁하는 최고의 지성을 갖고 있는 문학인이 본 시야이자 스펙트럼입니다. 저는 작가가 이런 성찰을 하는 지성인이기에 그 안에서 ‘채식주의자’도, ‘작별하지 않는다’도, ‘소년이 온다’도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보는 눈이 아픔을 직시하지만, 그 아픔을 이기는 방법은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그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픔에 대한 눈물 흘림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공포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강 작가의 읊조림을 이렇게 영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사탄의 공격이 엄청나게 드셉니다. 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 사탄의 공격이 눈에 크게 보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크게 보이는 사탄의 공격이 두려워 원치않게 그 유혹에 함몰되는 경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다합니다. 크게 보이는 그 공격이 노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공격에 주눅 들지 않고 부단히 싸우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어떤 것과 싸우는 존재입니까? 크게 보이는 세속적 영역과 사탄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입니다. 이것을 이미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설파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더불어 바울도 움츠리지 않고 직설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지금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에 서재에서 묵상한 성서 일과는 시편 37:23-24절이었습니다. 그날 시인이 노래한 노래가 크게 울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리고 그 울림을 묵상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성서 일과에 대한 울림이 크다. 야훼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신다니 말이다. 모든 이가 그런가? 그렇지 않다. 야훼께서 걸음을 정하고 인도하는 이는 그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신다. 감사하고 놀라운 일은 야훼께서 그렇게 정한 이들의 발걸음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한 점이다. 야훼의 작품이다. 넘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넘어짐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넘어짐이기에 그의 백성들이 가는 길은 기쁜 길이 된다. 자녀들이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야훼의 손이 그를 붙들고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항거할 수 없는 은혜다. 하지만, 이것을 전제할 때 그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전혀 가볍지 않다. 왜? 야훼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하는 당위가 있기에 그렇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 사랑을 받은 내가 해야 할은 잘 사는 일이다. 오늘도 잘 달려가자. 야훼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드신다.”(10월 21일 묵상집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그날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왜 이것이 보였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본 것이 여러분의 신앙 수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주만 바라볼찌라 기도 제목 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에게 시선을 떼지 않게 하옵소서. ② 11〜12월에 맡겨주신 태신자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③ 자발적인 기도 스케줄에 따라 기도 불침번 사역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④ 세인 교회 다음 세대가 영속적으로 승리하도록 ⑤ 담임목사 부부가 종교 개혁지 순례를 건강하게 마치고 돌아오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