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6) 제목: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3) 본문: 요한복음 2:13-22 서론) 오늘은 마가복음 12:41절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께 드렸던 두 렙돈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이 담론이 주는 교훈을 우리는 너무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물질을 많이 헌금한 부자보다 훨씬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신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이 담론에 대해 접근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과부가 부자들보다 헌금을 많이 했을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산술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마가복음 12:42〜44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과부가 드린 두 렙돈(헬라적인 화폐) 즉 1 고드란트(로마적인 화폐)는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요? 오늘, 우리나라의 사회적 관점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025년에 노동자들이 1시간을 일하고 받는 시급이 10,030원으로 결정되었다는 고용노동부의 발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편의상 성인들이 일하고 받는 최저 시급이 10,000원이라고 할 때 과부가 넣은 시급의 금액 한 고드란트는 1,000원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1,000원 헌금을 넣은 과부와 풍족한 가운데 헌금한 부자들과의 금액 차이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차이가 있는 게 분명하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보고가 예수님의 발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과부가 더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결론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주께서 억하심정으로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주님의 계산이 서툴렀기에 그랬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주님의 시각이 전제된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41절을 다시 복기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예수님의 시각은 헌금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편에서 헌금하는 자들을 보셨던 시각은 ‘어떻게’ 였습니다. 쟈크 엘륄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돈에 대한 우리의 행실을 지켜보고 계신다. 즉 우리가 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보신다.” (쟈크 웰륄,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 106쪽) 적어도 주께서 과부의 헌금을 높이 평가한 것은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을 지키고 사는 이들이 정면으로 이 율법을 무시하며 살았기에 같은 마을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과부가 단 돈, 두 렙돈으로 연명하고 있도록 방치했는가를 질타하는 것이 과부의 두 렙돈 담론에 담겨 있는 신학적 함의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주목하는 일 중의 하나는 돈에 대한 공정성과 올바름이라는 전제를 갖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께서 허락하신 돈을 선용하는가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주께서 돈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텍스트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론) 헤롯 성전으로 올라가신 주님이 그곳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을 강력한 물리적 도구를 이용하여 내쫓으셨음을 지난 수요일 예배를 통해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같은 맥락에서 내쫓김을 당한 두 번째 부류를 소개합니다. 14〜15절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렇습니다.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더불어 그들이 쌓아둔 돈다발을 쏟아 버리셨습니다. 도대체 성전 안에 돈 바꾸는 자들이 왜 있어야 했을까요? 당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약 20마일 정도에서 유대인들이 제사를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인원이 약 220만 명 정도였다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설명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인원이 유월절을 비롯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동시에 이렇게 모인 수많은 이들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통용되는 화폐는 로마 황제가 그려진 드라크마를 사용했는데, 거룩한 하나님께 드려질 성전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적으로 사용하는 화폐인 세겔로만 드려야 했습니다. “성전세의 지불 수단은 그 가치가 두로의 반 세겔이었는데, 이것은 평균 7,2g의 은이었다.” (에크하르트 슈테그만, 볼프강 슈테그만 공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동연, 206쪽)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 통용되던 드라크마로는 성전세로 드릴 수 없었기에 그 돈은 유대인의 고유 화폐인 세겔로 바꾸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드라크마를 세겔로 환전하는 이들이 성전에 존재했던 이유였습니다. 환전은 공짜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통화 및 일상적인 통화를 이것과 바꾸어주기 위해서 성전 당국은 환전상을 고용했으며, 이들은 반 세겔마다 8%의 추가액을 자기의 수당으로 챙겼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크마를 세겔로 바꾸어주는데 환전상과 그 환전상을 고용한 헤롯 성전을 관리하는 산헤드린 종교 집단이 서로 마음을 야합하여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주께서 보이신 반응이 바로 15〜16절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말 그대로 대대적으로 성전을 정화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예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치신 주님의 의도는 성전이라는 장소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인데, 그런 장소를 장사하는 곳으로 변질시킨 것은 결국 야훼 신앙을 변질시킨 범죄였기에 주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상을 엎으셨다고 이해했습니다. 큰 차원에서 같은 맥락이기는 하겠지만 환전상과 그 환전상을 고용한 성전 당국자들에 대해 추상같은 죽비를 내려치신 주님의 행위는 미묘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왜 주님은 성전을 정화하면서 환전상을 내치는 행위를 단호하게 진행했을까요? ※ 성전의 세속화를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24년의 감각으로 이 레마를 적용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으로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스데반의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에 적지 않은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 일은 거대해지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플랜 A가 발효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3〜4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유대 종교 집단이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 격인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이어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던 강도가 강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박해를 피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와 같이 사역하던 빌립 집사 역시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피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극히 기피하던 장소인 사마리아로 내려간 빌립은 그곳 백성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합니다. 그러자 누가는 사마리아 성읍에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말 그대로 건강한 부흥이 사마리아 성에 임한 것입니다. 마치 1900년대 초에 영국 웨일스 지역에 이반 로버츠가 이끈 부흥의 물꼬처럼 사마리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빌립 집사의 사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가 보고한 사마리아에 임한 영적 부흥을 계속해서 살펴보십시다. 사도행전 8:9〜13절을 읽겠습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실로 엄청난 부흥이 사마리아 성에 임하자, 사마리아 성에서 마술을 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던 시몬이라는 박수무당이 빌립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믿게 되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더불어 마술사 시몬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빌립을 따라다니는 팔로워가 되었음도 밝힙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며 부흥을 일으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이방인의 땅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반신반의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해 진위를 판단하려 합니다. 이윽고 사마리아에 파송된 베드로와 요한은 그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음의 능력과 승리를 눈으로 확인하고 믿는 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 세례까지 나타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신비로운 광경을 보게 된 종교성이 다분한 시몬이 행한 반응을 사도행전 8:18〜19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소위 말하는 시몬의 청탁입니다.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었던 시몬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권능을 사고 싶었습니다. 충분히 자본주의적인 이론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되는 구석입니다. 하지만 시몬의 청탁을 받은 베드로는 대단히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사도행전 8:20〜21절을 읽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단호한 비판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팔려는 말 그대로 사이모니즘(simonism) 즉 성직 매매주의가 얼마나 질 나쁜 죄인지를 베드로가 선포하며 시몬을 질타합니다. 오늘도 사이모니즘이 여전히 교회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사고파는 행위들입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현격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전 사례를 보면 은사를 받게 해 준다는 광고가 기독교 일간지에 빈번하게 광고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은 분, 예언의 은사를 하고 싶은 분, 신유의 능력을 맛보고 싶은 분, 심지어 입신하고 싶은 분”까지 실로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홍보 문구들이 홍수처럼 봇물 터졌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담임목사 셀에서 나누었던 『성숙자 반』 제8과 성령의 은사 챕터에서 이재철 목사께서 이렇게 개진한 글이 있습니다. “은사는 선물인데, 선물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사 혹 선물을 주셨다면 어떤 의미로든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재철, 『성숙자반』, 홍성사, 331쪽) 이것을 전제할 때, 너무나 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넘쳐나는 홍보물이 주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사를 마치 집회를 여는 단체나, 강사가 주는 것으로 호도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가치 있는 영혼으로 보지 않고 물질의 머릿수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경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참람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산술적인 숫자나, 인간이 만들어 낸 물질의 가치로 평가할 수 없는 절대 불가침이 일입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묵과하거나 방치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조장하는 경우, 그 교회가 바로 헤롯 성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참 귀한 말씀을 통독했습니다. 아볼로파에 의해서 자꾸만 부화뇌동 되던 지혜의 가치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에 팽배하던 헬레니즘 철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혜 숭상주의가 서로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고린도 교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바울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지혜를 믿음의 대상으로까지 올려놓은 자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성토하며 선포한 구절을 묵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또한 바울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4:19〜20절에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성전을, 교회를 세속화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떠납니다. 성전을, 교회를 물질이 통하는 교회로 변질시키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서론에서 소개했던 쟈크 엘륄의 고언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어떠한 경우든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이 말은 두말할 것 없이 자본주의를 향한 경고다.” (쟈크 엘륄, 위의 책, 58쪽) 나는 엘륄이 경고를 가슴으로 받습니다. 다만 이 명문을 이렇게 패러디하면서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렇습니다. 엘륄의 명제는 자본주의만을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엘륄의 경고는 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교회가 물질적 가치로 평가되고 평가하며 평가받는 순간,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세속화된 타락된 집단에 불과합니다. 아니, 교회가 세속화되면 세상의 세속 집단보다 더 위험한 집단으로 변질되어 해롭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을 물질적인 가치로 판단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물질적인 세수하는 망령된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를 멀리 떠나 살면서 주를 멀리 떠나 살면서 세상 죄에 지친 이 몸이 탕자처럼 갈 길 모르고 몸도 맘도 병들었다오 온갖 죄와 허물 속에 방황하던 그 길 버리고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눈물만 흘렸다오 거친 세상 험한 그 길을 방황하다 지친 이 몸이 목자 잃은 어린양처럼 갈 길 몰라 헤매었다오 온갖 죄와 허물 속에 불신하던 그 길 버리고 죄인 오라 부를 때에 눈물만 흘렸다오 캄캄하고 어두운 길을 홀로 걷다 지친 이 몸이 무거운 짐 병든 마음을 모두 주께 맡기었다오 온갖 죄와 허물 속에 교만하던 그 길 버리고 우리 주님 만나던 날 눈물만 흘렸다오 기도 제목 ① 주님, 세인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게 하옵소서. ② 주님, 하나님의 능력이 자유자재로 역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③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과 전쟁이 그치게 하옵소서. ④ 세인 교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 되게 하옵소서. ⑤ 지역 셀이 성령으로 충만한 소그룹이 되게 하옵소서. ⑥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