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2024년 12월 18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21번째 강해): 믿음입니다.2024-12-18 14:37
작성자 Level 10

20241218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21번째 강해)

 

제목: 믿음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3:8-15

 

서론)

 

종교개혁지순례 기간, 만났던 여러 경험들이 있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였던 얀 후스의 흔적을 따라가기 위해 체코에 머물렀을 때, 구 시청 건물에 세팅되어 있는 그 유명한 천문시계를 보았습니다.

EBS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해서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었지만 현장에서 본 천문시계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잠시 그날 촬영한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보겠습니다.

(천문시계 퍼포먼스 시청)

시간마다 채 40초 정도 진행되는 이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 있는 관광객들이 체코 프라하로 몰려듭니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아래 시계 판의 오른쪽에서 조각된 해골이 등장합니다.

그 해골은 매 정시를 알리는 종을 당깁니다.

그 시간에 왼쪽에 있는 조각된 세 모형의 인형들이 등장하는데 그 인형들은 일제히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 퍼포먼스를 보입니다.

이 인형들은 탐욕, 욕심, 증오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죄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은 해골이 뜻하는 죽음이 곧 다가오는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오기로 똘똘 뭉쳐 죽음에 대항하고 있음을 교훈하는 퍼포먼스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위의 시계가 있는 창문이 열립니다.

그곳에서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바울, 그리고 열두제자가 나타나 돌아가면서 관광 온 사람들을 내려봅니다.

의미는 죽음이 다가오는 인간들에게 주님을 위해 전 인생을 산 우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들의 삶을 드리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울림일 것입니다.

체코의 천문시계를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구 시청 광장에 몰려 들었습니다.

전 세계 관광객은 거기에 다 모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정말로 수많은 인파가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매일, 이 정도의 인파가 40초가 안 되는 그 퍼포먼스를 사진에 담고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벌 떼처럼 몰려든다는 설명했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구 시청 광장을 빠져나와 그곳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개신교회로 알려진 베들레헴 교회에 들어가 교회 전경과 내부를 보면서 격정이 몰려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천문시계 광장에 몰려 있던 인파와는 전혀 다르게 썰렁하기 짝이 없는 을씨년스러운 교회 환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삐걱거리는 기물 소리, 여기저기에 먼지가 쌓여 있는 성물들, 성령의 온기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퇴락한 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천문시계가 주었던 퍼포먼스의 의미는 분명 성서적이고, 복음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전락해 버린 한 교회의 퇴락된 모습을 통해 이제 기독교적인 교훈, 성경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엄청난 구속사의 은총이 현대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럴 수밖에 없도록 망가졌을까?

왜 얀 후스가 목숨 걸고 성경적 복음을 사수했던 땅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굳이 답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올곧게 사수하지 못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구속사 은총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만해 지니까 교회의 본질인 예수를 문화화시켰고, 그 예수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주는 서비스를 행함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주군 되심을 희석화했습니다.

이렇듯 서구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기독교까지 흔들리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이라는 성경적 믿음의 본질을 변질시켜 그냥 위대한 인물, 유럽이라는 지역에 적지 않은 종교적, 문화사적 영향을 미친 성인 정도로 예수를 치부한 결과물이 오늘날 유럽 기독교의 쇠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와 이웃한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우리보다 200년이나 앞섭니다.

엔도 슈사쿠의 걸작인 침묵에서 말했듯이 일본 가톨릭 신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정도도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국가주의는 교회를 핍박했고, 교회가 국가주의에 굴복함으로 인해서 교회가 서양 교육을 받고, 교제하는 장으로 전락 됨으로 인해, 유명무실할 정도로 나약한 교회로 퇴보한 역사의 교회가 일본 교회입니다.

하지만, 200년 선교가 늦은 한국교회가 일본교회에 비해 선방하며 달려온 것은 초기 교회가 성서를 중요하게 여겼고, 복음의 본질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기에 그나마 한국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금 한국교회 역시 퇴보되고 쇠약해지는 이유를 굳이 진단하라면, 교회가 문화화되고 있는 세속적 부흥이 교회를 침투한 것이 제일 원인일 수 있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한국교회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과 많이 유리되고 있기에 그렇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저는 신앙의 승패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유대 종교가 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 구원이라는 감격 등등에 대해서 예수께 질문해 그 비결을 터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을 너무 잘 아셨던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만이 그런 것들을 얻게 된다고 교훈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의 교사와 같은 직을 갖고 있었지만, 영적으로 무지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의 의미라고 이해하며 지극히 생물학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아신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오늘 본문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성령과 물로 다시 나야 한다는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8절을 읽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구절은 메시지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 곧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내 말에 놀라지 마라. 너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너는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하나님의 바람, 곧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위로부터 태어난사람도 다 그와 같다.”

주님이 설명하신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인간의 언어나 지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나, 해석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바람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바람의 정체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바람이 존재하듯 거듭난다는 것의 신비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현상은 존재한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접근하신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본문 1112절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하나 입히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거듭남이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신비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겠는가를 힐문하신 셈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니고데모 같은 유대 선생은 물론, 우리 같은 범인(凡人)도 다시 나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의 신비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해서 절망적인 교리가 거듭남의 교리처럼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니고데모에게 반문하신 주님은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거듭남의 신비를 남김으로써 거듭나는 이들에게 그 신비로운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혜의 여백을 소개합니다.

본문 1315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도 메시지번역도 만나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밖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백성에게 보고 믿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러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 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마다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자신의 정체를 설명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태어난 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파송하셨기에 이 땅에 온 이가 예수님 당신이심을 선포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내려보낸 유일무이의 존재, 더불어 다시 하나님에게로 승천할 유일한 존재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적시하신 주님은 결정적인 본인의 사역을 구약성서의 예를 들면서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호르산으로 행군하다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이 불평한 자들을 불 뱀에 물려 죽게 하시는 심판을 내리셨음을 보고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불 뱀에 물린 자들이 다시 사는 방법을 주셨는데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셨고 그것을 쳐다보게 하신 일입니다.

민수기 21:89절을 만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에서 매달아 단 놋 뱀의 의미를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저자가 명시합니다.

14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더불어 이렇게 선포하신 주께서 하나님이 다시 하늘로 올린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약속한 장면이 오늘 연이어 보고한 본문 15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봅니다.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난다는 신비로운 하늘의 일을 설명하다가 막바지에 갑자기 민수기 21장에 서술된 불뱀과 놋뱀 전승을 소개하셨을까?

민수기 21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호르산으로 가다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린 자들이 생겨납니다.

죽었고 또 죽어갑니다.

상황의 긴박성을 안 모세는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며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를 들으시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를 다시 살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 장대에 불뱀을 만들어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불뱀을 의미하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패역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합니다.

여기서 쳐다본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 중에는 구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찮은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며 저항하면서 쳐다보지 않은 자가 있을 것이고, 살기 위해 쳐다본 자들일 것입니다.

쳐다본다는 말을 오늘의 언어로 대체하면 믿는다는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의 신비로운 은혜, 즉 하나님이 직접 구상하셔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시나리오가 펼쳐질 무대로 창조한 인간이 죽어가는 광야인 이 땅을 삼으셔서, 그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아들 예수를 삼아 무대 위에 올려 그를 죽게 하신 사건이 구속사입니다.

그 구속사라는 시나리오의 핵심은 장대에 달린 놋뱀인 예수를 쳐다보기만 하면, 불뱀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 살기에 물려 죽어갈 수밖에 없는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에게 민수기 21장을 실례로 소개한 예수님의 의도는 거듭남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오늘 설교의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 거듭남이라는 교훈입니다.

 

거듭난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을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는 거듭난 자이고, 거듭난 자라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곱씹고 또 곱씹으며 날마다 되새김질해야 할 믿음의 꼭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한국에도 이런 교회가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4050년 전에는 미국교회도 아마 이런 교회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명성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교세도 제법 있었고 엘리트들도 나름대로 많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점차로 하향 곡선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아주 질 나쁜 경향이 있었는데 부임한 목사들이 조금만 자기들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신자들이 힘을 모아 퇴출을 시키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이 교회에 대해 세간이 붙인 치욕적인 별명이 있었는데 “RANDOM CHURCH” 막 돼먹은 교회라는 오명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역설적으로 신자들이 꽤 많아 목사들을 좋은 조건으로 청빙하려 했지만, 기피 1호의 교회로 낙인찍힌 교회였기에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에즈베리 신학대학교 출신의 아주 촉망받는 챨스 데이빗이라는 젊은 목회자가 자청을 해서 청빙에 임한 것입니다. 주변에서 데이빗 목사를 만류했습니다. 젊은 시절 망가질 수 있다는 간곡한 만류를 했지만, 그는 그 교회에 부임을 결심했습니다. 에즈베리 신학대학은 서울신학대학교와 공동학위과정을 조인한 미국의 아주 건전한 웨슬리안 교단의 신학대학입니다. 데이빗 목사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임해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대개의 목회자가 알듯이 데이빗은 이 교회가 왜 이렇게 망가진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영적으로 진단해 보니까 그 교회의 중직들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들었던 풍월을 읊으며 척하는 신자들이었고, 명목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데이빗 목사는 목회의 초점을 신자들이 무엇보다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해서 부임한 이후 3개월 동안 매주의 설교를 동일한 설교를 선포하였습니다.

제목: 거듭나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3:35

이 설교를 무려 3개월이나 설교했습니다. 문자 하나 바꾸지 않고 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통상적으로 해 왔던 것처럼 이 교회의 중직들은 부임한 목사를 실력없는 목사로 인정하고 사임 압력을 넣었고, 결국 데이빗은 사임하게 됩니다. 데이빗은 부임 3개월 만에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신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마지막 고별예배 설교였습니다. 속으로 신자들은 고별예배 설교만큼은 그래도 다른 설교를 하겠지, 사뭇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고별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막 돼먹은 교회라도 마지막 예배라서 그런지 숙연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설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데이빗 목사는 강단에 서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그동안 배운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지난 3개월 동안에 이 설교를 해 왔습니다. 이제 여러분 마지막으로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다시 또 전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을 마지막으로 선포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anew, he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리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바로 그 순간, 설교하는 그 자리에 교만하게 앉아 있던 신자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폭포수와 같이 임했고, 마지막 설교에서까지 이 설교를 하는 담임목사의 영적인 능력에 성도들이 굴복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는 회개의 영이 임하는 자리가 되었고 자신들의 교만하고 거듭나지 못함을 자복하는 통곡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이 성도들이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하고 지금 미국에서 강력한 주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교회는 지금도 미국에서도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복음적인 교회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라는 교리는 교리가 아닙니다.

거듭난 자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서 전혀 요동하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형식적 신자들이나, 명목적 신자들이 아닙니다.

거듭난 자들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종교를 문화화시킨 시대, 그 종교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거듭남이란 종교가 문화가 된 시대를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은 거듭난 자들이기에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편리한 대로 종교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어떤 젊은 아이돌 여가수가 부른 apt라는 뮤직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파트 아파트를 연신 외쳐대는 중독성이 있는 노랫말에 수많이 이들이 중독되어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영어 가사가 대부분이라 이해를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는 그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얼굴에 키스해 줘, 얼굴에 키스해 줘. 당신의 전화로 보냈지만, 진짜로 당신 입술에 키스하려고 해요. 빨간 하트, 빨간 하트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와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걸 줘.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처럼 나를 원하지 않니, 내가 지금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나를 필요로 하지 않니. 내일 자고 오늘 밤은 미쳐. 그냥 나를 만나면 돼

기독교가 자리를 잃으면 성적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는 노래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에 마비됩니다.

2024년 이 시대를 다시 정상적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 시대로 만들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친양하고 기도합니다.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소망 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 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쉴 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황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 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 주 예수 찬양하네

 

기도 제목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서서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교회에 구원받을 영혼을 보내 주옵소서.

하나님, 12월 사역이 행복하고 은혜롭게 마무리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2025년 세인교회를 하나님이 인도하옵소서.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