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0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4) 제목: 주연 같은 조연 본문: 요한복음 1:6-9 서론) 오늘은 여호수아 14:8-12절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이 텍스트의 배경을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수장이 되어서 가나안 입성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성실히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가나안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도 무너뜨렸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가나안 땅을 접수하였습니다. 차지한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제비뽑기를 통해 아홉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반(半) 지파였기에 각각에게 차지한 땅의 기업을 분배했습니다. 문제는 서쪽 지역이었던 헤브론 지역이었습니다. 이 땅은 아낙 족속 중에서도 가장 난폭하기로 이름난 아르바가 아직은 점령하고 있던 땅이라 이 땅을 선호할 만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땅을 맡아 굳이 힘들여 차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렙은 달랐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던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갑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40년 전의 일을 여호수아에게 상기시키며 갈렙은 그때 야훼께서 약속하셨던 땅, 즉 헤브론이라는 산지를 나에게 달라고 요청합니다. 요청하면서 들랬던 멘트가 바로 그 유명한 여호수아 14:11-12절입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이 구절을 음미할 때마다 저는 갈렙보다는 여호수아에게 더 많이 집중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40년 전에 가나안 정탐을 나갔던 12명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 무리 속에 있었습니다. 이미 아는 것처럼 그 12명 중의 10명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여호수아 14장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살필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일인자로 서서 가나안 점령과 입성이라는 하나님의 미션을 성취하는 강력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반면, 갈렙은 40년 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여호수아의 사역에 방해가 되지 않게 초야에 은둔했던 것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40년 만에 다시 역사의 복판으로 갈렙이 홀연 등장합니다. 등장하여 40년 전에 함께 역사 무대 정면에서 하나님께 동등하게 인정받으며 활동했던 여호수아 앞에 나타납니다. 아마도 갈렙에게는 만 가지 회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뒤처진 것 같은 열등감, 여호수아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 등등이 갈렙에게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니 한편으로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대하는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도 이해할만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앞에서 소개한 텍스트에 보고된 갈렙의 토로와 요청안에 여호수아와 관련된 그 어떤 회한이나, 감정적 서운함이나,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불만이나 불평은 단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지도자 여호수아가 갖고 있을 법한 헤브론 땅에 대한 고심을 일거에 날려주는 갈렙의 속시원한 영적인 지원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볼 때, 갈렙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동역자였겠습니까? 앓고 있는 이를 뺀 것 같은 감사가 여호수아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 14:13-15절을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렇게 정의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습니다. 갈렙은 역사의 무대에서는 분명히 조연이었지만 야훼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주연이었다고 말입니다. 본론)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대단히 간결하게 그의 등장을 소개합니다. 본문입니다. 6-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복음서 저자는 요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이오안네스’ 즉 ‘요한’이라고 보고합니다. 뜻을 풀면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자비한 성품의 소유자로 복음서가 소개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단호한 원칙주의자이자 불의에 대해서는 호리(毫釐)라도 용인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요한의 일생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계하에서 판단하는 성공주의적 잣대로 해석하면 대단히 실패한 삶을 산 사람의 모형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이 땅에 태어났고, 가장 절정기였던 애논 근처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신분 시절, 아주 잘 나가던 종교적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게 지켰던 시기였지만, 예수에게 그 모든 영광을 빼앗긴 초라함이 그에게서 보고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아버지 사가랴가 걸었던 유대 종교적 지도자로 그 대를 이었다면 순탄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영광을 박차고 유다 광야 근처에서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으로 만족하며 괴기스러운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충분히 세속적 영광과 종교적 기득권을 차지할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였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청빈의 삶을 선택했던 세례자 요한은 누가 보더라도 세속적 관점에서 살필 때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의 죽음도 시쳇말로 말하면 비참한 개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 안디바가 그의 이복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은 것을 두고 비난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요한은 안디바에게 살해당하는 순교자가 되고 맙니다. 불의에 대해 저항한 것이지만,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니,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그의 삶은 순조롭지 않게 막을 내린 비운의 주인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삶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비극적 삶을 살고 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신앙적 삶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적인 관점으로 볼 때 세례자 요한은 조연과 같은 역할을 맡은 이였지만, 그를 조연으로 여기는 것은 성서적 성찰에 대해 깊은 영성이 없거나, 아니면 얄팍한 외형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형태가 불러온 오류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 즉 구속사의 흐름으로 짚어볼 때 그는 최고의 조연 역할을 할 주인공이었습니다. 본문 7-8절을 다시 음미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세례자 요한이 이 땅에 온 목적은 빛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증언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우리는 이미 여타 다른 복음서를 통해 섭렵했습니다. 후에 살피겠지만 가장 종교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마음먹기에 따라 자기가 주류가 되고 주체가 되는 종교적 아성을 구축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유대 백성들이 신선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로 인해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생기자, 경계하던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인데 이런 세례를 베푸는 경거망동을 저지르는가를 혹평하며 묻자,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전했던 메시지는 곱씹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1:19-23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자기 신분의 선포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선포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외치는 자의 소리다.” 아주 비근한 예를 타 복음서로 넘어가지 않고 요한복음의 내증 안에 있는 정황으로 교우들에게 설명드렸지만, 이 메시지 안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충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빛나도록 준비하고 예비한 사역을 충실히 감당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형편과 정황에 따라 각자에게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성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분량대로 거기에 걸맞게 순종하며 사역하는 성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적 인지 부조화에 빠진 불신앙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연과 같은 조연이 누구입니까? ※ 조연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연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종편 방송에서 ‘밥이나 한잔 해!’라는 제목의 방송을 우연히 짧은 시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게스트로 나온 배우가 유해진이라는 배우였습니다. 고정 사회자들이 천만을 찍은 배우라고 소개하며 대환영하는 분위기여서 저도 그날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천만을 찍은 배우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 중에 유해진씨가 말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서기까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게 맡겨진 단역을 맡아 소화할 때, 험한 아르바이트할 때를 생각하며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주인공 역할을 맡아 연기할 때도 한 가지는 기억합니다. 나는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머리에 두고 연기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직 시절, 대통령 연설 담당 비서관을 역임한 고도원 작가의 저서에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한 청년이 배우를 꿈꾸는 데, 생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염려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하라고 답해 주었다. 배우의 길은 쉽지 않다. 한순간에 스타가 될 수도 있지만, 긴 터널 같은 무명의 시기를 견뎌야 할 때도 많다. ‘명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무명 시절을 버티며 근성과 연기력을 쌓아 왔던 사람들이다. 단역 하나를 따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10년을 넘긴 사람이 다반사다. 중요한 것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거다. 힘든 시간을 버티고 난 후엔 그만큼 내공이 쌓여서 누구보다 깊고 탄탄한 연기를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고도원, 『혼이 담긴 시선으로』, 꿈꾸는 책방, 75쪽) 두 예화가 마치 짜놓은 듯 매치가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조연의 역할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한 자에게 주연을 맡기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안 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세례자 요한은 빛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인생은 참 녹록하지 않은 고난의 인생을 살다가 삶을 마감한 자였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세례요한과 같은 인생을 살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21세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라질 것입니다.” 얼마나 해박한 이해이며 해석입니까? 하지만 이런 이해는 이해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준비된 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조연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11절을 읽어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여기셨습니다. 오래전에 세계적인 기독교 변중가로 알려진 오스 기니스의 걸작인 『소명』에서 가슴 뜨거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 기울이며 산 자의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청중 앞에서 살아낸 인생이다.” (오스 기니스, 『소명』, IVP, 13쪽) 엄청난 감동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위대한 청중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성실하게 자기의 사명을 다한 주연이었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2등을 1등처럼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이 신뢰했던 늙은 종 엘리에셀은 조연이었지만 주연 같은 조연이었습니다. 자신이 1등이 될 수 있는 모든 구비 조건을 다 가진 자였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1등의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조연이었지만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도구로 사용된 주연이었습니다. 바울보다 서열이 앞서 있었던 자였지만 그 자리를 내어 주는 아픔까지도 보듬고 끝까지 바울의 동역자로 섰던 바나바는 주연 같은 조연이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만을 보기를 역겹게 요구하는 주연입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관객 되어주신 조연입니까? 나는 후자를 택하렵니다. 그게 내 소망이기에 말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언제나 내 모습 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깨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기도 제목 ⓵ 나보다 더 나은 이를 인정하는 겸손함을 주옵소서. ⓶ 세속의 나라에 주연에 목매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조연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⓷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⓸ 여름 수련회, 여름성경학교가 은혜 중에 진행되게 하옵소서. ⓹ 환우들을 치료하여 주옵소서. (김현미 집사의 휴지기가 연장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