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3) 제목: 정체성 (2) 본문: 요한복음 1:4-5 서론) 우리는 지난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선재 하신 하나님이셨음을 나누면서 적어도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에서 흔들림이 없는 정체성을 소유해야 함을 첫 번째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져야 하는 나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저자는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피력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에 조금 더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이었던 예수님 안에 존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이었습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이 단어는 ‘조에’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단어입니다. 그 예를 성경의 내용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볼 성경 구절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이라는 이 단어가 원어 성경 3:16절에는 ‘조에 아이오니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4절에 기록된 단어 ‘생명’의 단어 ‘조에’입니다. 또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26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여기에 기록된 ‘생명’이라는 단어 역시 ‘조에’입니다. 적용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생명’은 인간이 코끝을 통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호흡을 하기에 유지하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완성하신 구원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요한복음 저자는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요한복음 저자는 이 생명에 대하여 대단히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생명은 삶을 유지하는 빛이었다. 그 생명의 빛이 어둠을 뚫고 타올랐으니, 어둠은 그 빛을 끌 수 없었다.” 의미가 선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갖고 계신 ‘생명’ 즉 ‘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유지하게 만들어 주는 빛이었습니다. 영적 공식이 이렇게 분명한데 유감스러운 것은 어두움에 짓눌려 있는 이 땅에 수많은 이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요한복음 저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땅이 온통 어두움이기 때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어두움은 태생적으로 빛을 싫어합니다. 빛이 온 세상에 비치면 어두움은 존재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데 좋아할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두움은 빛으로 오신 주 예수를 반가워할 리 없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본문 5절에 소개된 어둠은 2024년에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이었습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어둠’을 의미하는 단어는 ‘스코티아’입니다. 캘빈은 어둠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상하고 타락한 인간의 성품” (존 캘빈, 『캘빈의 신약성서주석 3-요한복음Ⅰ』, 성서교재간행사, 1980, 28쪽) 의미 있는 캘빈의 해석입니다. 캘빈의 갈파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즉 2024년의 ‘스코티아’는 무엇일까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조금은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는 어두움의 의미는 없을까를 묵상하다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주께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 무엇을 끄집어내기 위해 사회학자의 변(辯)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종교의 세속화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종교의 세속화가 더욱 진전되어, 종교 자체가 문화로 융해되어 버린 나라, 그곳이 바로 덴마크와 스웨덴이다. 종교가 문화로 분해되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가버린 나라, 그래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사례에 속할 정도로 극단적인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나라인 스웨덴과 덴마크를 지칭하여 ‘신이 없는 나라’라 칭한다.”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사게절, 2017, 103쪽) 그렇습니다. 2024년,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그리스도인 전체를 압살한 사탄의 세상은 종교를 문화로 둔갑시킨 고도의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빛이 굳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의 상태를 만들어 버리기에 2024년의 어두움의 정의로 꼭 들어맞습니다. 신앙이 문화입니까? 지난 6월 13일 목요일에 만난 성서 일과 텍스트는 베드로후서 2:19-20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저는 그날 이 구절을 묵상하고서 이렇게 묵상 노트에 다음과 같이 묵상 나눔의 글을 기록했습 니다. 묵상 제목: 누가 신앙생활을 취미라고 말하는가? “지금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육의 싸움이 아니다. 철저히 영적 싸움이다. 영적으로 패할 때, 닥치는 비극이 있다. 사탄의 종이 되어 어둠의 세력에게 전적인 지배를 당한다는 것과 이전 상태보다 패배 이후 상태가 더 심각해진다는 비극이다. 누가복음 11:24-26절은 언제나 나를 경성하게 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은혜를 맛보고 타락한 자의 말로는 더 나빠짐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전쟁이다. 『끙끙 앓는 하나님』에 보면 청파교회를 등록한 신자가 김기석 목사에게 했던 말이 담겨 있다. 청파교회로 수평 이동하여 온 한 새신자가 김기석 목사와 나누는 시간에 이렇게 말했단다. “예수 믿는 것도 참 힘든 일이지만, 청파교회에 와서 인생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 글을 읽다가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김 목사에게 그렇게 넋두리한 신자의 말을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신자는 참 행복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바르게 살고 똑바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 주는 교회에서 그 길을 제시받고 그 길을 살아내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신자야말로 정말로 행복한 성도가 아니겠는가! 치열하다는 것은 은혜요 감동이다. 깨닫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절망이다. 오늘 성서 일과 그대로 거짓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온 자의 말로는 깨닫지 못하는 회복 불능의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교훈에 나는 100% 동의한다.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니다. 레저 프로그램이 아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문화의 일종으로 변질시키려는 일체 시도와 싸운다. 신앙생활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더 나빠져 비극을 맛보지 않는다. 오늘 성서 일과는 비수다.” (6월 13일 이강덕 목사 묵상 나눔 노트에서) 오늘 요한복음 세 번째 강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론) ※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빛이라는 정체성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신앙을 문화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무서운 어두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의 이런 속삭임에 넘어가는 자는 빛에 거하면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살라고 강요당하는 사탄의 공격에 노출된 자는 어두움에 거하며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래서 2024년은 무섭고 두려운 시대의 복판입니다. 페이스북 친구인 한희철 목사가 어제 날짜로 뉴스 피드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어느 날의 기도 칠흑 같은 어둠 속 두 손을 들면 이내 어둠이 삼키지만 당신은 그런 나를 바라보십니다. 왜 우리가 여전히 빛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글이라 교우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우리들이 빛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빛에 거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를 여전히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의 지적대로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잠식한 시대 안에 있기에 어떤 이들에게 관심조차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에 거하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이 주목하시기에 우리는 빛에 거하며 빛을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어둠에 잠식된 이 땅이 섬기는 신을 맘몬이라는 해석하는 데에 많은 이들이 동의합니다. 저를 비롯한 이렇게 정의하는 이들조차도 모두 여기(맘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는 없습니다. 다만 영적 각성과 물들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치열하게 살 뿐이며 주군께 긍휼을 요청할 따름입니다. 펜데믹 기간에 김기석 목사가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는 것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이 많이 강퍅해졌다. 산술적인 공평함이 아니라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김기석, 『욕망의 페르소나』, 예책, 24-25.) 김 목사의 글을 읽다 보면 너무 선명해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명제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맘몬 앞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있을까를 곱씹다 보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전 분야가 모두 맘몬으로 잠식되어 있습니다. 근래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슈가 의료계 파업 이슈입니다. 의협에서 주장하는 논리는 정부에서 아무런 중장기 대책이 없이 의료인을 늘린다고 항변하지만, 그들의 주장 복판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부와 특권적인 전문성을 소수의 인력만이 갖고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맘몬적인 부의 소유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이기성에 근거한 숫자 논리임을 모르는 이 땅의 시민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분야에서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속셈은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타이틀을 앞세우기는 하지만 권력을 잡을 때 부여되는 맘몬의 유혹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 없습니다. 이렇게 세속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슬프고 또 슬픈 것은 종교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이자 목회자인 고진하가 쓴 시에 나오는 시어가 이렇습니다.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고진하, 『프란체스코의 새들』, 문학과 지성사, 18.)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시인은 노래했는데 교회 공동체 안에 여전히 팽배한 것이 예산, 결산 규모이고, 교인 숫자이다 보니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 기사 중에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35절을 소개합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난 자를 주막으로 데리고 온 사마리아 사람은 그가 하룻밤을 강도 만난 자와 머물렀던 주막 주인에게 하룻밤을 지낸 비용으로 2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의 몫을 1데나리온으로 계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술적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계산법으로 1데나리온이 아닌 2데나리온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희생이었습니다. 자기 외의 것을 포기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 주인에게 비용으로 건넨 2데나리온의 가치는 일반적인 나눔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뭐 그런 개념을 도입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담론에서 너무 놀라운 것과 감동적인 보고는 ‘비용이 더 들면’이라는 구절입니다. ‘비용이 더 들면’이라는 이 구절을 개역판 성경은 다른 단어로 기록합니다. 개역판 누가복음 10:35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부비’(浮費)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프로스타파나오’는 ‘추가된 비용’(additional charge)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약속한 ‘부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비용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큰 출혈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부비를 약속할 수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감동을 선사합니까?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빛에 거하던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빛에 거했기 때문에 출신 지역이나, 신분의 영역이나 지식의 유무에 따른 편 가름이 아닌 이런 감동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제 마태복음 5:13-16절을 읽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 열광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3〜14절 말씀에 대한 선명성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영어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며 만들어져 가는 유연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진행형으로 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선포는 대단히 단호한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는 빛 그 자체다. 너희는 소금 그 자체다.” 타협의 여백이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빛입니다. 만연해 있는 어두움과 타협하지 말고 그 어두움을 물리치는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이 땅의 소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다음의 기도 제목을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⓵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두움과 타협하지 않게 하옵소서. ⓶ 어두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능력을 주옵소서. ⓷ 맘몬이라는 신 바벨탑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⓸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⓹ 주일 이후 남은 3일도 말씀 붙들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