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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것을 믿습니까? (2024년 7월 17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5) 2024-07-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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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7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5)

 

제목: 이것을 믿습니까?

본문: 요한복음 1:9-14

 

서론)

 

저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제가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를 그들이 우리를 36년간 지배했기 때문에 일본을 싫어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발점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일본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무도함 때문입니다.

무도함은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 가치와 예의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과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유지하게 만드는 근본적 요소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일본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며 또한 이것이 그 나라를 제가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싫은 일본이지만 그럼에도 제가 존경하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이라고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진정성을 갖고제가 애도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인물이기에 그에게 마음이 간 것이 아니라, 제가 그를 존경하게 된 이유는 일본이 수여하는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 수상을 거부한 그의 용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제2차세계대전의 주범인 나라가 전후 조금도 그 전쟁 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그 옛날 그 천하가 공노할 군국주의 시대의 범죄를 두둔하며 여전히 그 국가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런 정부가 주는 일체 훈장과 명예는 치욕적이라는 것이 수상 거부의 이유였는데 저는 이런 그가 지닌 지성적 양심을 존중하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말하는 모든 것을 믿지 않습니다.

반면, 저는 오에 겐자부로가 그의 작품을 통해 전하는 단 한 마디의 메시지는 100% 믿고 동의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말한 성찰은 의미심장한 교훈입니다.

신앙은 하나의 관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동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한국기독교 연구소, 199)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며 그의 말씀에 동의하는 행위입니다.

 

본론)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만에 하나, 이 질문을 제게 던진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1:13절에 기록된 요한복음 저자가 갖고 있었던 믿음의 대명제를 이미 나누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던 것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역학적인 공식에 의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先在)해 있던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이었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육신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본문 14절을 보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자체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른바 성육신 사건입니다.

너무 많이 들은 단어라서 성육신 사건이라는 말 자체를 상투적으로 듣거나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육신이라는 이 엄청난 은혜가 임하기까지는 너무 중요한 하나의 전제 조건이 만족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조건일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결단하신 자기 비하라는 결단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다음과 풀었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또 하나의 구절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12:2-3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바울의 역설과 히브리서 저자의 토로를 종합해 보겠습니다.

성육신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까지는 하나님이셨고 태초부터 계시면서 창조주의 권위와 똑같은 권위를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행적 결단이 전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결단하신 선행적 결단 행위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비운 행위였습니다.

종의 모습을 가지신 것입니다.

사람 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끄러움 당함을 수용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인내하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결단하여 실행하셨기에 성육신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5가지를 몸소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없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제게 임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내려놓음입니다.

 

주님이 먼저 결단하셔서 실천하신 5가지의 삶은 자기의 권위를 내려놓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제 성서 일과 묵상 텍스트로 정한 구절이 사무엘하 6:16절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엘리 제사장 시절, 그의 아들들의 중 범죄로 인해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야훼의 법궤가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블레셋 땅에 있었을 때 야훼께서는 각종 징벌을 블레셋에게 내림으로서 블레셋인들에게 재앙과 공포를 주었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야훼의 법궤는 벧세메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이 돌아온 법궤를 들여보다가 70여 명이 죽게 되는 비극을 맛보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두려워한 나머지 기랏여아림에 있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보냈고 그곳에서 법궤는 20년간 머물러 있게 됩니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던 20년간 이스라엘을 치세했던 사울은 법궤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제일 먼저 야훼의 법궤가 20년간 오벧에돔의 집에 방치되어 있음을 알고 다윗성으로 법궤를 옮기는 프로젝트를 짰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윗성으로 야훼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오게 됩니다.

다윗성으로 법궤가 들어오던 날,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려주는 메시지가 앞에서 읽은 사무엘하 6:16절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은 뛰놀고 춤을 추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런 다윗의 행동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고 역사서 기자는 표현했습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다 보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교훈이 보입니다.

왜 다윗은 춤을 추고 뛰놀았을까?

왜 미갈은 그런 다윗을 업신여겼을까?

내려놓고 내려놓지 못하고의 차이 때문입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일은 다윗이 자신의 왕권 유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체면은 안중에 없었고 너무 행복해 춤추며 기뻐한 것입니다.

반면 미갈은 왕으로서 체신을 지키지 못하는 다윗이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권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과 미갈의 메시지가 주는 결말은 이렇게 역사가에 의해 보고됩니다.

사무엘하 6:23절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주를 위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나는 비극적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메시지입니다.

체면은 걸림돌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주께서 하나님의 위상을 버리지 않았다면,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라는 사실에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인 내가 왜 십자가라는 치욕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당신의 권위를 내려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위를 내려놓지 않았다면 저와 여러분은 오늘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권위를 내려놓으셨기에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셨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구속사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궁극적 은혜를 주께서 베푸셨기에 저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여백이 생겼습니다.

그 여백의 내용을 1213절에서 알려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영접하는 자라는 명시적 문구가 등장합니다.

도대체 영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교리적으로 접근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은 구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 1권 교재에 있는 대로 헤리 웬트 목사의 말로 인용한다면 영접한다는 것은 이런 세 가지 요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와의 교제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적으로 믿는 확신의 소유자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통상 믿음의 3요소를 믿음의 주체인 존재에 대해 아는 앎의 지식’, 그분의 행하심에 대한 동의’, 그리고 믿음의 주체가 이룬 일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에 국한하여 도대체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재조명한다면 이렇게 직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 예수께서 내려놓으신 그대로 나도 내려놓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 그분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본문 주석을 하고 나니 이렇게 제목을 변경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당신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지난 월요일에 이요한 목사를 만났습니다.

대화 중에 제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버지,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 한 명이 지난 6월에 아버지께서 섬기셨던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종강 예배에 참석했어요. 그 후배가 그날 아버지께서 전한 설교를 들었는데 은혜가 되었나 봐요. 몇 주 전에 제게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목사님, 제가 목사님 아버님 설교를 종강 예배 시간에 들었어요. 그날 예배에 참석했는데 강사 목사님이 전한 사도행전 26:29절의 메시지가 대단히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강사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 2030년 대들보이자 주인공인 여러분, 바울이 가졌던 주존심을 갖고 흔들리지 마세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바울이 갖고 있었던 주존심을 사수하세요. 그래야 종교가 문화가 된 시대, 신이 인간이 된 호모데우스 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그날 아버님 목사님이 전한 메시지를 앞으로 내 목회 철학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주존심이라는 단어를 아버님께 묻지 않고 사용해도 될까요?”

이 말을 들은 아들이 후배에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답니다.

출처만 밝히면 돼요. ‘주존심이라는 단어는 제천세인교회를 담임하는 이강덕 목사가 쓴 단어입니다.”라고.

서울에 소재한 대형성결교회 담임목사가 근래 설교 표절 문제로 곤혹에 처했습니다.

부목사가 담임목사의 설교 표절을 폭로하여 목회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회에서 표절 사건을 문제 삼아 부목사는 사임 처리하고 담임목사에게는 공 예배에 사과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락하는 것으로 정리했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백번을 양보하여 이번에 문제에 대해 담임목사 편에서 한마디를 거든다면 이렇게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의 설교의 분량이 너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표절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왜 표절하려 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나약함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축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님의 내려놓음을 다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하지 않은 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 그 자체입니다.

그분은 내려놓을 만한 것이 없는 완전무결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터럭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철저한 내려놓음입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절대로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려놓음을 실천하는 주님처럼 우리의 옛것, 우리의 죄악 됨, 우리의 욕심, 이기적 욕망 등등 옳지 못한 일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견지해야 할 믿음입니다.

 

결론)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이것을 믿습니까?”로 정했습니다.

신앙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기를 내려놓으셨습니다.

내려놓았기에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엄청난 특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취득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자들을 본문에 의하면 세상에서는 절대로 맛보지 못하는 복을 얻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본문 14절 후반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습니다.

내려놓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에서 탈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친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 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기도 제목

하나님,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동의하고, 확신하게 하옵소서.

교회학교 여름 사역이 은혜롭게 진행되게 하옵소서.

투병 중인 지체들을 치료하여 주옵소서.

세인교회가 건강한 부흥을 이루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