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3) 제목: 지나감이라 본문: 야고보서 1:9〜11 서론) 1992년 4월 30일에 청주 서문교회에서 32세의 나이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풋풋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풋풋했던 그때는 제게는 먼 시간이 흐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던 그날,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례를 진행하던 故 이만신 목사께서 이렇게 목사 안수기도를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아름으로 이강덕 씨에게 주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한 직분을 맡을 목사로 세우고자 안수하노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교회의 거룩한 성례전을 집례하는 권한과 안수와 축도권을 허락하노라” 저는 안수례를 행하시는 원로 목사님의 기도문이 끝나자마자 마음 굳게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이하고 목사로 세움을 받아 사역한 지 올해로 3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말 그대로 그 시간이 지나간 것입니다. 지난 33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목사의 사역을 감당했기에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등등 지나간 33년은 말 그대로 파노라마 같은 삶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회한보다 제게 더 진하게 자리 잡은 것은 그 시간의 유속(流速)입니다. 언제 그 시간이 지났지? 너무도 빨리 지나갔습니다. 바로 이 회한이 저를 사무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유속은 저만 경험하는 저만의 느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온 교우들 모두가 공히 느끼는 유속일 것입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에 영남제일교회 이상민 목사가 설 명절 인사차 제천을 방문했습니다. 잘 섬겨 보냈습니다. 이야기 중에, 이 목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보다 흰 머리가 더 없으십니다. 저는 이제 머리 옆으로 흰머리가 덮었습니다. 염색하면 일시적으로 가리기는 하지만, 염색 후에는 몸이 안 좋아지는 여러 징후가 있어 포기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할아버지 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40대 중반의 목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또 제 나이의 연륜을 솎아 보았습니다. 나는 언제 6학년 5반이 됐지? 어거스틴이 그의 걸작 참회록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름다움은 피고 지는 것, 핌으로써 존재하며, 자라나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다시 차츰 늙어져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늙는 것은 아니지만, 시들어 죽어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피어서 살아 있는 동안 속히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실상은 죽기를 더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의 정한 이치입니다.” (어거스틴, 『참회록』, 생명의 말씀사, 67쪽) 사정이 이러니, 시간이 흐르면 삶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공식이자, 도표입니다. 이 일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삶의 준칙이자, 거절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주일 예배를 통해 주목할 것은 이것을 인지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답 행하기를 놓치지 않는 여러분이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설교는 구절의 순서를 잠시 바꾸기로 한 설교입니다. 원래 야고보서 세 번째 강해의 텍스트는 5〜7절이어야 하지만, 그다음 구절인 9〜11절을 먼저 택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오늘 본문은 설 명절을 맞아 절기 설교로 감당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제하며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전체를 다시 읽겠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야고보서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부유한 자와 높은 위치에 있는 자를 지칭하며 그들을 향해 높음과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반면, 낮은 형제들은 주눅 들어서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겸하여 당부합니다. 왜 야고보서 기자가 이토록 단호하게 선언했을까요? 10절에서 그 답을 제시합니다. 권력과 부유함은 풀의 꽃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11절에서는 그 강도가 조금 더 강해집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그렇습니다. 권력과 부는 쇠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쇠잔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마라테세타이’ (μαρανθήσεται)의 문자적 의미는 ‘말라서 비틀어진다’라는 뜻입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최근에 펴낸 최신 성경 버전을 『새 한글 성경』이라고 하는데 이 버전은 야고보서 1:11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타는 듯한 열기와 함께 해가 떠올라 풀을 마르게 하니 풀의 꽃은 떨어집니다. 보기에 좋은 그 모습에 망가집니다. 이처럼 부유한 사람 또한 자기 일에 빠져 있는 동안에 말라 시들게 될 것입니다.” (새 한글 성경 야고보서 1:11)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10일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사자성어를 아십니까? “십 년 넘게 이어지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메시지는 꼭 위의 두 개 문장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지나가는 권력, 사라지는 부, 그러니까 결국 말라 시들어지는 무상한 세속의 가치에 목을 걸지 말라는 권면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더불어 이 권면은 나약한 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용기와 격려를 주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8:35〜43절에 배치된 바디매오 기사와 곧바로 이어지는 누가복음 19:1〜10절 행 간에 위치한 삭개오 메시지는 절묘합니다. 전자는 대단히 가난한 자를 상징하고, 후자는 매우 부유한 자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전자의 인물인 바디매오는 너무 가난한 인물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서 기자가 말한 대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라는 구절처럼 그를 결국에는 높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고, 후자의 인물인 삭개오는 부한 자의 상징이지만 다행히 자신의 부유함을 뽐내거나 자랑한 후안무치의 인물이 아니라, 야고보서 기자가 경고한 그대로 자신이 갖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쉬 사라질 풀과 같은 것임을 알고 물질이 아닌 주님을 선택한 대단히 지혜로운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로 누가복음 19:8절은 부유함을 가진 자들의 신앙적 회귀의 방법을 알려주는 시금석과 같은 구절로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렇게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두 인물, 바디매오와 삭개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1:9〜11절의 담론이 주는 영적 교훈은 대단히 명확하고 명징합니다. ※ 지나가는 것에 천착(穿鑿)하지 말아야 합니다. 레마를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단어로 바꾸어 말한다면 떨어지는 것, 그리고 쇠잔하는 것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라비틀어지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라져 없어질 것입니다. 제가 청년 목회를 할 때, 청년들을 불 질렀던 슬로건이 있었습니다. “주님, 녹슬어 없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닮아서 없어지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곱씹어 보아도 정답이지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제자도 삶에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성령 체험을 한 이후 베드로는 약 30년 정도 후에 이런 고백을 자신의 편지에 남겼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풀과 같은 것들, 떨어지는 것들, 썩어질 것들에 천착하는 삶을 살지 말 것을 선언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보겠지만 야고보서 저자도 이와 흡사한 선포를 합니다. 야고보서 4: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시편 기자도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시편 90:3∼6절을 곱씹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잠시 후에 사라지고 썩고 시들게 될 권력, 물질, 건강 등등에 목을 걸지 말아야 할 당위를 설명하는 메시지는 성경 지천에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은 붙들 것이 아닙니다. 놓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20세기 영국 최고의 영향력이 있는 작가 G.K. 체스터톤의 경구 하나를 소개합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 못해도 할 가치가 있다.”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 있는 사람, 124쪽) 기막힌 성찰입니다. 잘 못해도 가치가 있을 만한 일이라면 반드시 시도하라는 종용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잘 못해도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0:42절을 소개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저는 이 구절에서 짜릿한 감동을 겹으로 받습니다. 이 구절도 앞에서 언급한 새 한글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로지 제자라고 해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시원한 물이라도 한 컵 주어 마시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은 누구든 보상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새 한글 성경, 마태복음 10:41) 두 가지의 면이 보입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물 한 컵 대접하는 이들이 보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에게 작은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가치 있게 여기실까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로 사는 자들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저는 이 관점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거인이 아니라, 작은 자로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런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이들을 또한 가치 있다고 여기십니다. 가난한 자, 힘든 자를 돌보는 자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재론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주님이 주목하시는 대상이 큰 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께서 큰 자들을 대접하고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을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고 지난 33년을 달려왔습니다. 지난한 세월이기는 했지만, 힘들어도 또 누군가가 흔들어도 목사가 지켜야 할 한 가지 자존감을 지키며 달려온 건더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사가 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을 지키며 사역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것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목회였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수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더 아픈 것은 이런 목회는 앞으로 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상을 하는 시대적 정황과 영적 기상도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골수라는 소리를 들어도 양보할 수 없는 목양의 방법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입니다. 그것이 냉수 한 그릇밖에 안 되어 보이는 보잘 것이 없고 주목받지 않는 사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사역이라면 감당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읽었던 미국 최고의 크리스천 프리랜서 작가인 필립 얀시의 글이 떠오릅니다. “침묵을 피하고 고독을 멀리하라. 패배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 돈과 섹스와 높은 지위, 그리고 온갖 불평거리에 집중하라. 라디오(핸드폰)는 항상 켜놓아라. 군중 속에 머물라. 진정제를 과다하게 복용하라. 책을 읽으려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하지만 책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더 좋다. 신문에는 도움이 되는 광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외설적이고 그럴듯한 광고에 주목하라.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부재를 촉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얻을 수 있다.” (필립 얀시,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좋은 씨앗, 186〜187쪽)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등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을 거는 것이라는 비꼼일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비유입니다. 이 시대의 절정은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열광한다는 점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가치를 두지 않는 것에는 혈안이 되어 올인한다는 점입니다. 신 사사시대이자, 신 바벨탑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시대적인 영적 기상도를 진단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올인이 아니라 증간 지대에 있어도 괜찮다고 부추기는 영적 난맥상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불행한 시대가 야고보서가 저작된 시기였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기자는 단호하게 본문에서 선포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천착하지 말라고. 썩어질 것에 천착하지 말라고. 시들 것에 천착하지 말라고 종용했습니다. 중간에 서지 말 것을 강제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혹여 고향에 명절이라 찾아온 식구 여러분! 설 명절 연휴 기간, 지나갈 것들에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치 없다고 여기시는 것에 천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올인하십시오. 바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골로새서 3:1〜4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를/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네 눈을 들어 주를 보라/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