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2) 제목: 역설 본문: 야고보서 1:2〜4 서론) 언젠가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문경새재 도립 공원을 걷기 위해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날, 참 마음이 애잔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30대 중반 정도의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그 휠체어를 밀며 조령 관문 길을 올라가는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아들의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을 안 아버지는 운동 삼아 그렇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왜 아니겠나 싶어서 애잔한 마음으로 그 부자를 위해 화살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란 그 자체가 고난일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소회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태어나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4가지 고통을 生老病死라고 지칭한 것은 적절한 종교적 성찰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농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오면 대부분이 우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기가 막혀서 운다는 농이었는데 듣고 보니 의미가 그럴듯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탄생은 축하할 일이기는 하지만, 저들이 걸어가야 하는 삶의 노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반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세속적인 영역에 있는 사람이나 삶이 고달픈 것은 도진개진입니다.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전이 있습니다. 나 혼자 걷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보여준 광야 40년의 흔적을 추적하다 보면 구제불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아무리 양보해서 조망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제 불능의 이스라엘을 손 놓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에게는 책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회고하는 모세의 설교를 들여다보면 그저 감동의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 구절이 회고 설교 시작에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 1:31〜33절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 공동체였지만,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언하는 한 단어가 심장을 움직이게 합니다. “너희를 안으사” 반전이며 은혜입니다. 이런 감동의 반전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베드로전서 1:6〜7절은 정녕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감동의 압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생로병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성도를 응원하시니 기독교를 지칭하여 역설의 종교라고 해석하는 것은 실로 가슴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도 감동의 선을 지속해서 잇게 해 줍니다. 본론) 2〜3절을 주석함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저자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대상자들을 향하여 ‘내 형제들아’라고 호칭함으로써 영적 친근함과 연대를 이룹니다. “주후 1세기에 ‘형제’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델포스’는 원래의 의미는 같은 어머니의 배(腹)에서 나온 육신의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던 단어였지만, 유대적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했을 때,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단어를 새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 간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이상근, 『신약 주해: 공동 서신』, 18〜19쪽) 이 해석이 주는 통찰은 야고보서 저자가 자신이 쓴 이 편지의 글을 받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 지체라는 것을 전제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자는 그들에게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아, 시험을 당하면 온전히 기뻐하라. 그렇다면 야고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멀리 가지 말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세 가지 시험을 인용하면 성도가 받을 수 있는 ‘시험’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4:1〜11절을 보면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마 4:3) ②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마 4:6) ③ 내게 엎드려 절하라 (마 4:9) 사탄이 예수께 요구한 첫 번째 광야 시험의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직결되는 시험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이 시험의 신학적 의미는 물질의 문제가 우선이니까 그 우선적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 유혹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압박이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맹점을 정확하게 타격했기에 현대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으로 가기도 전에 완전 그로기 상태로 무너졌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만을 추구하게 될 때, 스며드는 비극이 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망각하고 살면 그건 짐승이지,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난 뒤에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경탄한 존재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였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 박사가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을 출간해서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빅터는 자신의 책에서 여러 죽음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장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주목하여 살아남은 그들이 어떻게 그 지옥에서 견뎠고 해방의 자유를 맛보게 되었는지를 술회한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남은 자가 갖고 있었던 공통 분모를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빅터 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 출판사, 121쪽) 결국 빅터 플랭클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갖고 있었던 공통 분모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였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줍니다. 두 번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퍼포먼스를 대중에게 보여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에게 이런 유혹을 던진 사탄의 공격이 실로 무자비합니다. 대중은 여론에 민감합니다. 정치인들은 여론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간과 쓸개도 내줍니다. 마태복음 27:23〜26절을 읽어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빌라도가 주목한 것은 대중적인 여론이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머리털 하나를 상하지 않은 기적을 보여주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으니 이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예수께 요구한 사탄의 유혹은 우리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인생들이 이 폭격을 당했고 또 당하며 실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내게 절하라는 대단히 도도한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절하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부와 영광 즉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극단적 권력의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이 예수께 제일인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유혹을 건넨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잘 알듯이 예수께서는 이 유혹 모두를 ‘기록되었으되’(마 4:4, 7, 10)라는 신명기 율법(신 8:3, 6:13, 16)을 인용하며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당했던 세 가지 시험이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험을 이기신 주님의 행보가 바로 마태복음 5〜7장으로 이어지는 산상수훈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도 시험을 이기신 이후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를 갖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을 수반해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야고보 기자는 수신자에게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2〜3절)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전례가 없다면 야고보 기자는 이렇게 선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셨기에 야고보는 매우 담대하게 야고보서 편지를 수신하는 믿음의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역설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시험이 오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여론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고통이 오는데 기뻐하라고, 넘지 못할 것 같은 기막힌 고난이 있는데 기뻐하라고, 엄습하는 아픔과 시련이 있는데 기뻐하라고! 이게 말이 되냐고 항변할 것입니다.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전언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렇다면 우리는 도전 정신을 갖고 질문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기뻐하라는 것인가? 저는 이 질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하려고 합니다. 왜요? 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반전입니까? 역설적인 반전입니다. 본문 3〜4절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시련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 의미를 갖게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시련이 주는 역설적 반전을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고 3절에서 보고했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야고보서 저자에게 동의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인내를 경험한 자만이 온전한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교훈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Living Bible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So let it grow, and don’t try to squirm out of your problems. for when your patience is finally in full bloom, then you will be ready for anything, strong in character, full and complete.” “그러니 인내심을 키우고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마침내 인내심이 만개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될 것이고, 성격이 강하고 충만하고 완벽해질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도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시련을 충분히 참고 견디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숙하고 잘 다듬어진 사람,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두 번역 모두, 인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련이 바로 이런 인내함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과정이 주는 선물이 바로 신앙인들에게 의미를 상실하지 않게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속적인 시험은 우리에게 의미를 갖지 말라고 압박하는 시험입니다. 작금은 의미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다그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의미를 지키는 것에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시련을 잘 이겨냄으로 주어지는 은혜인 영적 의미를 잃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인내함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삶의 현장에서 적지 않은 시험을 받은 인물입니다. 성경의 실례를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22〜23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궤계에 속절없이 무너진 실패자였습니다. 이윽고 이어진 가야바 뜰 안에서 보인 베드로의 행태는 절망적 실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마가복음 14:71절을 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님을 지키겠다는 시험에서 실패한 베드로의 민낯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심지어 이 구절은 성령 받은 이후에도 외식하는 유혹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보면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동반된 삶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그런 삶의 위기를 순간순간 맞이했지만,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이긴 뒤에, 순교를 앞둔 어느 시기에 같은 순교를 앞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발한 사자후(獅子吼)는 많은 감동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1: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반전이며 역설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메시지를 남긴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점을 주목합니다. 시험을 인내로 이긴 자에게 오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성장한다는 은혜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손양원 목사님께서 아들들 장례식 때 그 유명한 9가지 감사를 이야기하셨다는데 나도 몇 가지 감사가 생각나더구나. 첫째는 명절에 떠나지 않으셔서, 둘째는 주일을 피해 주셔서, 셋째는 월요일 새벽이어서, 넷째는 큰 추위가 지난 따뜻한 날 장례를 피해 주셔서, 다섯째는 가족 임종 예배 후 자손들 모두 만나 주신 것 참 감사했지. 떠나시기 전날 모두는 어머니(할머니)와 굿바이가 아닌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다. 이 땅에 어머니의 아들로 살게 하신 것을 감사드렸다. 기도해 주고, 귀한 사랑을 보내 줘서 정말 고맙다. 평안한 밤 되길 빈다. 친구 박상진 목사가” 어머님을 천국에 파송한 뒤에, 제게 보낸 친구 목사의 글입니다. 친구의 글을 읽다가 눈에 와 닿은 메시지는 이 구절이었습니다. “떠나시기 전날 모두는 어머니(할머니)와 굿바이가 아닌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체휼할 수 있는 의미입니다. 아주 고전적인 팝송인 닐 세다카의 명곡이 있습니다. 노래 제목입니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전부를 의미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여정을 경주하면서 시련이 올 때마다 그 시련을 인내함으로써 잘 극복하면 우리들의 영적 고백이 이렇게 확장될 것을 순전히 믿습니다. Jesus Christ means everything to me.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 해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 해 인내로써 모든 경주를 달릴지라 주를 의지하면서 주께 기도하면서 다 같이 걸어갑시다 다 같이 걸어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