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 제목: 왜 야고보서를 읽어야 하는가? 본문: 야고보서 1:1 서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성경 59번째에 위치한 야고보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하며 선언했던 바울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 1:17절을 목숨 걸고 지켰던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했던 야고보서 강해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루터가 야고보서를 이렇게까지 혹평한 이유는 자신의 신학이 ‘이신칭의’에 입각한 신학이었기에 이런 신학적 의도와 표면적으로 반대되는 각을 세운 것처럼 여겨지는 야고보서를 달갑게 여길 리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한 로마서에 반해, 야고보서 2:14절은 표면적으로 그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지지하지 않는 야고보서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은 나름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김학철 교수는 이런 미묘한 갈등에 대해 이렇게 자기 주석서에서 해제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평가가 널리 알려졌다. 그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루터가 보기에는 야고보서는 신앙의 중심을 선포하지 않는다. 신앙의 중심이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다. 믿음의 중심을 가르치지 않는 성경은 그 자리도 마땅히 내주어야 할 것이다.” (김학철,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야고보서』, 대한기독교서회, 9쪽) 이 주석의 글은 루터에게 있었던 한계를 나름 빗대 설명한 글이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루터가 평가절하한 야고보서를 두둔하고 있는 눈에 띄는 한 문장을 소개하겠습니다. “19세기 말, 독일의 주석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 (Johan Gottfried Herder)는 지푸라기 안에서도 탈곡하지 않은 곡식알의 영양물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했다.” (페인 퍼킨슨, 『현대성서주석-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유다서』, 한국장로교출판사, 153쪽) 역시 야고보서라는 정경을 지지하는 학자의 지론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해묵은 것처럼 여겨지는 토론의 주제를 저 또한 들고 나오지 않을 수 없어서 교우들에게 질문하며 야고보서 연구의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까?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까? 이 날카로운 질문의 답을 내기 위해서 섣부른 판단이나 주워 들었던 풍월로 답하지 말고, 종과 더불어 몇 주가 될지 모르겠지만, 야고보서 공부를 해 나가면서 가장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합리적인 조화를 이루는 답을 찾아낸 뒤에 두괄식 답변이 아니라, 미괄식 답변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기를 바라며 기대합니다. 본론) 작년 초에 차준희 목사에게 청(請)을 하나 받았습니다. 말씀 사경회 계획이 있으면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를 강사로 불러서 야고보서를 한 권 떼라는 청이었습니다. 임 목사가 일주일간 서부교회에서 진행한 야고보서 강해가 꽤 들을 만하다고 말하며 제게 권면했습니다. 친구의 권면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 역시, 야고보서 강해를 준비해서 적절한 시기에 세인 지체와 함께 씨름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일주일 사역으로 끝낼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닙니다. 앞으로 몇 주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교우들과 야고보서를 이 잡듯이 공부하며 야고보서에서 건질 수 있는 아직은 탈곡하지 않은 곡식알의 영양물을 발견할 수 있도록 경주할 것입니다. 같이 경주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일반 서신에 들어 있는 야고보서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발신자는 야고보이고,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12 지파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발신자를 추적해야겠습니다. 저자는 야고보입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여러 명의 야고보가 존재합니다. ① 예루살렘 교회 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막 6:3) ②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의 한 명이었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막 3:18) ③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서 순교 당한 역시 예수님의 12명의 제자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막 1:19) ④ 작은 야고보 (막 15:40) ⑤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 (눅 6:16) 등등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 야고보서를 기록하여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 편지한 저자가 누구일까요? 두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육신의 혈육이었던 야고보가 이 편지의 저자라는 학설이 전통적인 지론입니다. 복음서에 증언하듯 예수님의 육신 혈육인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던 이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이후, 회심하여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수장이 되어 안디옥 교회와 같은 이방 교회를 아우르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도자로 급부상했던 인물입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까지 총괄하는 감독이 되어 사역하던 야고보는 대제사장 안나스 2세에 의해 주후 62년에 계획 살인을 당해 순교했음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저술했다면 야고보서의 저작 연도는 그의 순교 이전 연도인 주후 62년 이전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습니다. 저자에 대한 두 번째 이론은 야고보서가 주후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헬라어에 능통하고 수사학과 신학 교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야고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기록한 서신이라는 학설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지지 기반은 야고보서에는 대단히 현란한 수사학적 헬라어 기법이 담겨 있기 때문임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김학철 교수가 이렇게 진단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다면 그리스어(헬라어) 교육을 받았을 개연성이 낮다. 야고보서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즉 70인 역을 인용하는데 헬라어 교육을 받지 않은 야고보가 이렇게 뛰어난 헬라어 문법의 글을 기록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학철, 위의 책, 13쪽) 그렇다면 누가 저자일까? 전자인가 아니면 후자인가는 독자들이 선택할 여분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두 번째로 야고보서 연구에 필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 편지의 수신자에 관한 이해입니다. 1절 후반절에 밝히고 있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저자와 연관한 분석입니다. 만에 하나 야고보서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이었다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당연히 예루살렘에 존재하고 있었던 유대적 기독교 공동체일 가능성 100%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이름을 대체한 익명의 저자라면 흩어져 있는 12지파는 마땅히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이방적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 지체일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까지의 글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에 대한 답을 가름합니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야고보서의 프롤로그가 주는 영적, 신학적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다시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가 되었든 관계없이 저자는 자기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정의합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저자는 하나님(θεοῦ)과 주 예수 그리스도(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를 ‘카이’(καὶ)라는 등위접속사로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이 기록 방법은 무심코 기록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갖고 의도적으로 표현한 기록입니다. 제1위 하나님과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서열적 관계를 동등함으로 여기고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유대 종교가 장악하고 있는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해석해 본다면 이건 반역이고 혁명이었기에 야고보서 기자의 이 표현법은 대단히 의도적인 도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 표현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극대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저자의 표현은 그다음에 연이어 나옵니다. 저자는 이렇게 강변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동등한 서열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δοῦλος)이라는 단어는 여타 다른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 즉 인권이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둘로스’ 즉 ‘종’입니다. 야고보 저자는 아주 기꺼이 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종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 권리마저도 포기한 존재라는 고백이 본문 1절의 ‘종’이라는 단어에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야고보서 저자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도 자기의 서신을 시작하는 글에서 야고보서 기자와 똑같은 인사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립보서 1:1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디도서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이렇게 바울도 자신을 ‘종’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때 사용한 단어가 바로 ‘둘로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 더 충격적인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담임목사로 재직했던 존 맥아더 목사가 쓴 『slave』를 10년 전에 만났습니다. 읽다가 충격을 받았단 대목들이 너무 많아 설교 자료에 수록해 두었던 몇 가지 내용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아주 중요한 이슈 하나를 책에서 제시합니다. “킹 제임스 번역본과 그보다 앞서 있는 제네바 성경을 포함한 거의 모든 영어 번역본들에서 오역으로 인해 ‘노예’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라졌다. ‘둘로스’를 번역한 ‘노예’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 성경 원문에 124회 등장하지만, KJV 성경 번역본에는 단 한 차례만 정확하게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은 조금 나아졌을 뿐이다. 이 현상은 거의 음모론처럼 보일 정도다.”(존 맥아더, 『슬레이브』, 국제제자훈련원, 22-23쪽) 왜 이런 번역의 문제를 음모론이라고 맥아더 목사는 비평했을까요? 그는 이어지는 章에서 ‘노예’라는 물건에 대해 다섯 가지의 상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노예’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의도적으로 빼버린 이유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① 전적인 소유권: 노예는 주인의 완전한 통제 속에 있는 소유물이다, ② 무조건적인 복종: 노예들은 주인의 말 외에는 그 어떤 법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고, 완전한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노예들에게 허락된 것은 주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이었다. ③ 오직 헌신: 노예들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자기의 능력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주인을 기쁘게 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④ 전적 의존: 노예들은 주인의 가족구성원 일부가 되어 음식과 보금자리를 포함한 삶의 기초적인 수단들을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⑤ 개인적 책무: 1세기 노예들은 소유주 앞에서 자신이 수행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궁극적으로 주인의 평가만이 중요했다. (존 맥아더, 위의 책, 46〜54쪽) 그렇다면 5가지로 열거한 이유를 전제할 때, 왜 대다수의 영어 성경 번역에서 ‘노예’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종’으로 대체했을까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숨통을 트게 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진단입니다. 이렇게 요약하면 어떨까요? 종으로는 살겠지만, 노예는 안 되겠습니다. 이 명제가 오늘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서 여지없이 발견하게 되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행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강해의 첫 번째 레마를 밝히면서 충격 요법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영역에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교우 여러분에게 1월 12일에 선포된 레마에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 아무리 설교라곤 하지만, 시대에 감각을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래도 조금은 여백을 남기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으세요. 그래야 21세기 목회 현장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전할 수는 없습니다. “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정도면 여러분은 21세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으로는 선방하는 것입니다. 타 교회 신자들은 교우님들이 행하는 신앙적 행동에 대해 반도, 아니 반의 반도 따라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정도면 선방의 선방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누가복음 17:7〜10절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렇게 이 구절을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종이 있는데, 그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나서 들어왔다고 해보자. 너희라면 그의 겉옷을 받아 주고 식탁을 차려 주며 그에게 ‘앉아서 먹어라’ 하겠느냐? 오히려 ‘저녁을 준비하여라. 옷을 갈아입고 내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식탁에서 시중들어라. 그런 다음에 부엌에 가서 저녁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특별히 감사를 받더냐? 너희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서 ‘일을 마쳤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했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저는 야고보서 여행을 시작하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종은 종입니다. 노예는 노예입니다. 칭찬을 받는 자리가 노예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니까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을 걷는 것뿐입니다. 상받기 위함도 아니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냥 노예니까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렇게 걷고 나면 그 길을 걸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천로역정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하는 길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나의 철저한 주인이 되어서 내가 가져야 할 권리를 모두 요구하며 사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내가 철저하게 주님의 노예로 살면서 주님이 걷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속인이니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심 대상은 후자입니다. 적어도 괴물이 아닌 이상,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후자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2025년에 사탄은 우리에게 전자가 싫으면 중간이 있으니, 후자를 택하지 말고 그 중간 길을 선택하라고 종용합니다. 압박합니다. 정말로 그런 길이 있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성경을 전제하며 단언컨대, 중간 길은 없음을 천명합니다. 종은 약간의 여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여백이 없습니다. 사탄은 종까지는 허락하겠다고 말하지만, 노예는 곤란하다고 강제합니다. 혹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1절을 원어 성경대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캐나다 뉴라이프 커뮤니티 담임목사인 마크 뷰캐넌이 일찍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급해 주지만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지만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 판단하지 않는 하나님,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귀찮게 다그치지 않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57쪽) 얼마나 그럴듯하며 매력적인 하나님 상입니까? 세상에 한쪽 발을 딛고 있는 신자들에게 사탄은 중간에 거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유혹하지만, 하나님의 자리에 중간은 없습니다. 사탄은 내가 너에게 그런 하나님이 돼주겠다고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에 서 있지 않으십니다. 마크 뷰캐넌이 터뜨린 강력한 다이너마이트를 하나만 더 가슴에 담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계신다.” (열렬함, 81쪽) 세인 공동체가 오늘주터 야고보서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마음으로 다잡이해야 하는 일은 믿음의 중간 지대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야고보서 여행을 마치는 날,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의 신앙의 키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한 뼘 더 자라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여행을 하며 야고보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이 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이 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강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