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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1월 5일 신년감사주일 예배 설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2025-01-04 14:42
작성자 Level 10

202515일 신년감사주일 예배 설교

 

제목: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

본문 시편 46:10

 

서론)

 

2025년 독서량을 채우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지난 주간에 그리스인 조르바로 널리 알려진 그리스 출신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내 영혼의 자서전을 섭렵했습니다.

읽다가 밑줄을 긋게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오늘 신년감사주일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길에 다다랐지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건널 수가 없었다. 나는 멀거니 서서 1년 내내 고생해 거두어 반쯤 말린 포도가 한 아름씩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광경을 보았다. 통곡 소리가 더 커졌다. 몇 명의 여자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로 뛰어 들어가 건포도를 조금이라도 더 건지려고 기를 썼다. 다른 여자들은 두건을 벗어 던지고 길가에 서서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나는 흠뻑 젖었다. 기쁨을 감추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지 보려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흐느껴 울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지를까? 건조장을 지나다 보니 우리 포도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던 아버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그 뒤에 서서 훌쩍훌쩍 울었다. 내가 소리쳤다. ‘아버지,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니코스 가찬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 열린 책들, 2024, 108)

이 엄청난 글을 소개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단락을 이렇게 마무리하며 자서전의 사족을 남깁니다.

나는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아는 사람들은 알다시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무려 9차례나 지명을 받은 소설가입니다.

혹자는 카잔차키스를 그리스의 톨스토이혹은 도스토옙스키로 지칭해 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신앙적, 종교적 도전을 준 문학인입니다.

저 역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작품 중에 잊지 못할 도전과 감동받은 책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라 올해 4분기 독서반 과제로 설정해 교우들과 나눌 예정입니다.

어린 니코스에게 삶의 좌우명이 되도록 만들었던 아버지의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 엄청난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니코스의 자서전적인 메시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내가 무너지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은 너무나 소중한 마음입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살고 있는 이들이 가져야 할, 그리고 빼앗기지 말아야 할 자존감이라고 확신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제게 물밀듯 다가온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와 같은 영적 자존감이 스며 올랐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괜찮아!” 가 인간이 가져야 할 자존감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존감이 인간에게 존재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하는 삶때문입니다.

이 전제에 동의하면서 저는 한발을 더 디뎌보려 합니다.

무엇일까요?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이들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하는 야훼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자존자(自存者)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 자존의 상태가 시시때때로 변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론)


맨 마지막 구약 성경 말라기를 들여다보면 대단히 지난하게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와 논쟁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주전 516년에 건축되어 완공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도 주전 445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내용들을 이루어 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배타적인 승리까지 허락하실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5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대했던 이스라엘만의 완전한 회복, 독립이라는 소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공동체는 영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이 서서히 사라지지 시작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하고 깔보고 능멸하는 불신앙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마음이 안타까웠던 하나님은 안 되겠다 싶어 말라기 예언자를 통해 영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을 다시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그 채근담이 바로 말라기 예언서입니다.

말라기가 예언을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언자에게 대듭니다.

몇 가지만 나누어 보십시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1:2)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2:17)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3:13)

이렇게 대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야훼께서 반박하십니다.

1번 항목에 대해서 형 에서보다 동생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1:2f3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2번 항목에 대해서 1:79절에서 이렇게 반격하셨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더러운 제물을 드리는 질 나쁜 행태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3번 항목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반응을 봅니다.

말라기 2:17절입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이 좋게 보시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공격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냐는 대듦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격하신 4번 항목을 살펴 보십시다.

말라기 3:14-15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결국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변질되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거기에 걸맞게 빈응하는 극심한 불신앙적 행보를 보인 셈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대드는 질문마다 조목조목 반박한 말라기 예언자는 종합적인 속성을 갖고 계신 야훼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이 구절을 메시지에서 번역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그렇다. 언제나 하나님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변하지 않기에, 너 야곱의 자손이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것이다.”

말라기 예언서에 담겨 있는 이 구절이 제게는 너무 큰 힘이 됩니다.

인간은 수도 없이, 끝도 없이 변질되지만,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천명한 예언자의 소리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일성이 앞에서 언급한 니코스 아버지의 소리로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러준 말이 훗날 카잔차키스라는 위대한 소설가를 만드는 초석이 된 것처럼, 저는 목사로 내 전 인생을 바쳐 성직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좌충우돌하고, 이리 쿵, 저리 쿵 했지만,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분연히 달려오게 한 밑힘이 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그렇다. 언제나 하나님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 세인 교회는 2025년 교회 표어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로 설정했습니다.

이 표어는 대한민국의 정치 세력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선동질하는 슬로건이 아닙니다.

이 표어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히 고백해야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수없이 변질되는 존재입니다.

기분이 언짢아도 인정하십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하나님에게 돌멩이를 던지던 말라기 시대뿐만이 아니라, 그 때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잘될 때는 그분을 높이다가도 조금만 자기에게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면 여지없이 하나님을 향해 비난을 주저하지 않는 아주 잘 나쁜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베드로 신드롬입니다.

그런 자가 훨씬 더 위험한 인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이고, 또 그런 나약한 존재로 계속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를 인정하고 더 정직하게 실수를 줄이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2025년이 되기 위해 한 가지를 약속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는 불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시인은 오늘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하며 선포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이 구절에 소개된 뭇 나라와 세계에 대해 주목하십시다.

뭇 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임그 세계로 번역된 -아레츠는 세속적 가치가 점령한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두 지역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은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으로만 악용하는 곳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말라기 시대의 패역한 유대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을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는 아주 질 나쁜 이들이라는 공통점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 주목할 구절이라 비껴가지 않고 인용하겠습니다.

시편 46:13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인의 고백에서 자칫 잘못하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말씀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 노파심이 있어 교우들을 다잡이하기 위해 해석합니다.

이 구절을 자칫 잘못 해석하면 이런 위험성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앙의 길을 걷는 결정적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어처구니없음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피난처만 발견하면 된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환난이 임하면 그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움만 받으면 된다. 나는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비법만 찾으면 된다.”

하지만 명심 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피난처, 큰 도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이라는 서술어들의 주어가 야훼 하나님이심을 말입니다.

차준희 교수가 지적한 시편 46:13절의 해제가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시인은 환난 가운데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도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차준희, 시인의 영성 Ⅰ』, 새물결플러스, 442)

도움이 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도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친구의 적절한 신학적 성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도움만을 추구하는 자는 말씀을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움의 원천임을 믿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말씀이 임해도 그 말씀을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떤 교회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입니까?

말씀을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지 않는 신앙인이며 그렇게 교육하는 교회입니다.

출애굽기 32:16절은 보고합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며 난장판을 벌인 사건에 대한 고발하는 텍스트입니다.

주목할 점은 신을 만들라고 압박한 이스라엘 공동체 지도자들, 그 압박에 굴하여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말한 아론, 그렇게 해서 만든 금 송아지 앞에서 이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어온 신이라고 다시 말한 지도자들, 더불어 다시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그날을 야훼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정한 절기 즉 축제의 날이라고 다시 선언한 아론에게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절기, 하나님의 형상과는 전혀 관계없이 율법의 자의적 해석으로 꿰맞추어 변질시켰다는 공통점입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변질시킨 율법이 어찌 하나님의 율법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패역함을 본 모세는 즉각적으로 분노하여 그들이 자의적으로 만든 금송아지의 흔적을 부숴버리고 맙니다.

이어지는 시내 산 난장의 결과를 이렇게 출애굽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출애굽기 32:1920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지난주 목요일에 실시한 담임목사 셀 텍스트에서 우연히 이 본문과 연관된 아주 의미 있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이재철 목사는 출애굽기 난장에 대해 이렇게 독자들에게 개진했습니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 때 디베랴 호숫가에 주님과 조반을 함께 하던 그 제자들(시내 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우리였음을.” (이재철, 사명자반, 홍성사, 157)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리한 대로 해석하는 한, 언제든 시내 산에 있었고,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 잡고 있는 무신론자를 방불하는 불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결론)

 

저는 이제 신년감사주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 2025년 표어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교회입니다.

말씀에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말씀을 통해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무신론자들이 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셔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시며, 말씀하실 그대와 저의 주군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는 질 나쁜 명목적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되게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오.

그들이 바로 2025,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신년 새해, 첫 주일이 되면 부르는 선한 능력으로를 다 같이 합창하겠습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전의 괴로움 날 에워싸고/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우리 영혼/끝내 승리의 날을 맞으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주님이 마신 고난의 쓴잔을/우리도 감사하며 받으리

주님의 남은 고난 채워가며/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승리의 새날을 맞이하리

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