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송년 주일 설교 제목: 때가 이르면 본문: 갈라디아서 6:7-10 서론)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나는 나의 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滿 二十 四年 一介月을/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던가/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그러면 어느 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윤동주, 『동주와 빈센트』, 저녁달, 218쪽)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시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만났던 것 같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이렇게 엄청난 성찰이 담보된 시를 윤동주 시인이 만 24년 2개월이 되는 해,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약 26세에 작시했다는 점입니다. 26세라는 나이를 뒤돌아보면 저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때였지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철없던 풋내기 시절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던 나이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미성숙했던 ‘나’에 비해서 윤동주 시인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의식을 갖고 살았던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시가 바로 ‘참회록’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조국이 멸망한 탓에 일본에서 독립운동하며 문인의 삶을 살았지만, 나라가 망한 참담한 현실을 보면서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던 무기력한 자신을 채찍질한 시인이 남겨 놓은 이 시는 그의 후대에 많은 지성들을 각성하게 했고, 그가 사망한 이후 불과 6개월 뒤에 조국 광복이라는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맛보게 한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조국 광복 어언 80주년을 맞은 2024년에도 여기저기에 그의 정신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기생충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정신병자 같은 친일파 세력들이 즐비한 세상이지만, 외세와 맞서야 하는 대한민국의 기개와 정신을 이어가도록 잇대주는 위대한 시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결국, 윤동주가 글로 뿌린 씨앗이 오늘 후배들에 의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굴뚝입니다. 시편 기자가 남긴 글이 오늘 특히 저를 영적으로 흥분하게 합니다. 시편 126:5〜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바벨론 포로 시기라는 재앙을 경험했다가 그 시절의 기막혔던 참담함을 되살리며 다시는 그런 비극을 맛보지 말아야 함을 노래한 시편 기자의 이 시는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둘 수 있는 자들의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라는 전제입니다. 이 구절을 주해한 차준희 교수는 대단히 의미 있는 성찰을 이렇게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과거에 해놓으신 일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미래에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그 중간에 서 있다. 기억과 기대 사이에 놓은 협곡은 눈물의 씨앗을 지속적으로 뿌리는 장소다. 눈물의 씨앗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기쁨으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차준희, 『시인의 영성 Ⅲ』, 새물결플러스, 377쪽) 그렇다면 오늘 송년 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적어도 선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려면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하는가? 의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으로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서신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촌철살인을 남깁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대전제를 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간에 그 심은 것을 토대로 그대로 거두게 된다.” 이것처럼 명확한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연의 법칙은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것이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게 하는 것이 법칙입니다. 이것을 자연이 주는 정직한 법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둔다고 표명한 이유는 잘 심으라는 속뜻이 있는 내용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 대목을 이 구절에 같이 담아 놓았습니다. 잘 심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잘못 심는 것이야말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임이기에 결국 자기도 비극적인 결과을 열매로 얻게 될 것임을 경고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잘못 심는 행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접근해야 하겠습니다. 그 답을 본문 8절이 아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일체 일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설하면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행위는 반드시 썩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씨 뿌림을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이렇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얻게 될 복을 바울은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명한 대조를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코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거나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삶을 살 것을 명령하면서 본문 9절에서 이 삶의 행위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지만, 잘 이기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구절에서 ‘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칼론’(καλὸν)의 문자적인 의미는 ‘똑바름’(righteousness)입니다. 말로는 대단한 쉬운 개념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지키기가 어려운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강령이기도 한 것이 바로 ‘똑바름’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9절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성도가 똑바르게 삶을 살아내면 느린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본문의 맥을 짚으면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영적 교훈을 찾아내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똑바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진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으면 현대적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더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힘쓰십시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그 일을 시작하십시오.” 유진 피터슨은 헬라어 ‘칼론’을 ‘유익한 삶’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유익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진 삶의 내용을 기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가정뿐만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도 반드시 유익한 삶을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개역 개정판에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권한 것을 보면, 바울은 단지 믿음의 가정들에게만 착한 일을 행하는 자로 머물지 말고 기타 지역 공동체 혹은 갈라디아지역에 만연했던 우상 공동체와 불신자 공동체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들에게 착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이라고 촉구한 셈입니다. 결국,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접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유익한 삶을 살되 날마다 더 유익한 삶을 살아내는 선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바울이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라는 걸출한 소아시아 지역인 에베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역을 감당하던 바울은 또 다른 지역 전도를 위해 떠나면서 이 아름다운 교회를 신실한 양아들 디모데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추측건대, 20대 약관의 나이였던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면서 적지 않은 염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나이의 목회자 디모데가 에베소라는 교회를 과연 이끌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였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걱정 반, 기대 반을 모아 디모데에게 두 번의 목회 서신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양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들여다보면 구구절절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과 염려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첫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4:12〜15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더 나은 모습을 보이라는 권면입니다. 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이 구절이 꼭 디모데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한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2024년 송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세인 교우에게도 너무 긴요하고 적절한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제보다 오늘, 더 진보하고 성숙하셨습니까? 1년 전 1월보다 12월이 훨씬 신앙적으로 나아졌습니까? 히브리서 10:38〜39절에 아주 의미 있는 교훈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혹시 여러분 중에 뒤로 물러나서 퇴보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는 후퇴를 반복한 자가 있습니까? 말론 모건은 미국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한 의사입니다. 그녀가 쓴 걸작 『무탄트 메시지』를 읽다 보면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무탄트들(우리가 야만인으로 지칭하는 호주 원주민)의 정신이 소개됩니다. 모건이 무탄트 사람들과 호주 대륙을 여행하며 나누었던 감동의 글 중에 제가 밑줄을 그어 놓은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생일 파티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케이크와 축하 노래, 생일 선물 등에 대해 설명하고, 나이를 할 더 먹으면 케이크에 꽂는 양초의 수도 하나 더 늘어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축하하죠? 축하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건데, 나이를 먹는 것이 특별한 일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아무 노력도 들지 않아요. 나이는 그냥 저절로 먹는 겁니다.” 내가 물었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것을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이 압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지요.” 나는 그 말을 깊이 명심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로 모건, 『무탄트 메시지』, 정신세계사, 2010년, 117쪽) 어찌 이 금언과도 같은 촌철살인을 마음에 둔 이가 저자 말로 모건뿐이겠습니까? 저는 무탄트 원주민이 보기 좋게 한 방 문명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날린 이 문장을 심비에 새겨 놓았습니다. “나아지는 것 축하합니다.” 무시무시한 금언입니다.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몰아붙이는 호주 대륙의 에버리진(원주민)인 무탄트들도 이 어마어마한 정신적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데,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지는 삶을 추구하거나 살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2024년 12월 29일 주일에 세인 지체들 모두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수고의 씨앗들을 뿌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청년을 자녀로 두고 있는 지체 한 명이 언젠가 제게 사적으로 이렇게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도 믿음이 참 연약한 존재이지만, 근래 들어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지금 보이고 있는 믿음의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이 제 자식이 보고 있는 미래의 영적 시금석이라는 사실임을 통절하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믿음의 행동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지 소름 끼치게 느꼈습니다. 더 나은 믿음으로 잘 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고백을 듣는데 눈물 나게 감사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무슨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대로 유익한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믿음의 공동체에게, 여러분이 처해 있는 세속의 영역에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믿음의 유익균을 퍼뜨리고 있습니까? 윤동주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가 떠난 지 8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친일로 살지 않습니다.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뿌린 유익한 씨앗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2024년 마지막 주일, 그대는 그대에게 정직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더 나아진 그리스도인으로 2024년을 살았는가?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52번째 주일 설교를 들어준 교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 한 편 선물로 드립니다. 시집 ‘섬진강’을 발표함으로 소위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쓴 『사랑』이라는 장시(長詩)의 후반부를 선물로 드리며 읊어보겠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고맙게 배웠습니다/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당신의 어깨에/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한 봄입니다/행복하시길 빕니다/안녕. (신경림외 72명,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창비, 149쪽) 시인의 시어를 만나면서 이런 깊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일까? 똑바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일까? 더 나아진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과연 누구일까? 내 어깨에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가 머리를 기대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닐까, 욕심 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누군가가 내 어깨에 안심하고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더 나아진 삶을 살아내는 그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광야를 지나며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