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 설교 (대강절 네 번째 주일 설교) 제목: 클라이맥스 본문: 요한복음 3:16〜17 서론) 오늘은 너무 유명한 곡 ‘사랑의 찬가’라는 샹송 하나를 감상하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2024년 프랑스 올림픽 개막식에 셀린 디옹이 부른 ‘사랑의 찬가’ 감상) 이 샹송의 가사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우리 위의 파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땅이 꺼진다 하더라도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나는 상관없어요/세상 어떤 것도 내겐 상관없어요 사랑이 나의 아침들을 가득 채우는 한/내 몸이 당신의 손길로 전율하는 한 어떤 문제들도 내겐 상관이 없어요/왜냐면 내 사랑,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난 세상 끝까지 갈 거예요/머리도 금발로 물들일 거예요/만약 당신이 원한다면요 난 달도 따러 갈 거예요/난 돈도 훔칠 거예요/만약 당신이 원한다면요 조국도 버릴 거예요/친구들도 버릴 거예요/만약 당신이 원한다면요 사람들이 나를 비웃겠죠/난 뭐든 다 할 거예요/만약 당신이 원한다면요 만약 언젠가, 삶이 내게서 당신을 뺏어가더라도/만약 당신이 죽어서, 당신이 내게서 멀리 있더라도/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나는 상관없어요/왜냐면 나 또한 죽을 거니까요 우리에겐 우리만의 영원함이 있을 거예요/저 무한한 푸른 하늘에선 말이죠 하늘에선,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어요/내 사랑, 당신도 우리가 서로 사랑함을 믿고 있죠? 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니까요 어떻습니까? 사랑에 미친 거 아닙니까? 기독교 윤리적 관점으로 볼 때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가사의 내용도 나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대상에게 미친 거가 맞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행위는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본론)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0: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 구절을 접하고 있노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사람 목숨보다 양의 목숨이 더 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는 선한 목자라기보다는 어리석은 목자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물론 예수께서 요한복음 10:11절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의도를 모를 리 없지만, 양 한 마리 때문에 소중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동이 있을 리 만무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0:11절의 진의는 더욱 또렷해집니다. ‘사랑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본문이 요한복음 10:11절임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 실례가 있는가를 살펴볼 때, 그 실례를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는 본문 텍스트가 아마도 오늘 본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율법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이후, 오늘 본문을 연이어 알려주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주저없이 선포하신 주께서 대화 상대였던 니고데모에게 믿음이 있는 자는 거듭난 자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결국 믿음이 거듭난다는 교리의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재 확인하신 주께서 곧이어 우리 기독교 복음의 정수이자, 초석과도 같은 메시지를 니고데모에게 전달합니다. 본문 16절을 나눕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마그나카르타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명제인 요한복음 3:16절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을 이 구절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방법은 “이처럼”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호르 산에 벌인 가나안 거민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 호르산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가나안으로 향해 진군하던 어간, 지름길이 아닌. 우회 도로로 행군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이 힘든 상태였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급적, 힘이 별로 들지 않는 직선 코스로 가기를 원했지만, 무슨 상황인지 우회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길을 가다 보니 피곤했던 이스라엘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놓고 원망한 본문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행위에 대해 심히 노하셔서 불뱀들을 보내 원망하는 자들을 물게 하심으로 적지 않은 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회개하고 모세에게 중재를 부탁했고, 모세는 중보자로 엎드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힙니다. 이런 중재 역할을 감당하는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장대에 구리 뱀을 만들어 쳐다보게 하라는 명령이었고, 이후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보는 자들은 불 뱀에 물렸어도 회복되는 은총을 받게 되어 다시 살게 되었고 민수기 21:8〜9절이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우리는 구약 성경의 이 구절을 인용하신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1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살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놋 뱀의 역할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원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셔야 했던 전제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민수기 시대의 표현으로 말하면 장대에 매달리는 것이었고, 예수님 당시의 표현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지신 사건이 무엇입니까?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셔야 했기에 짊어져야 했던 결과물의 실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든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대속물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것이며, 그를 십자가(장대)에 매달리게 해 죽게 하신 그 사랑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신 내용물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자신이 이 땅에 와야 했던 당위를 설명하신 뒤에 장대에 매달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부활의 의미를 연이어 설명하신 메시지가 17〜1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또 오셔서 하신 사역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무엇일까요? ※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 자체가 사랑의 절정임을 알려줍니다. 설교 서두에 전한 메시지로 적용해 설명한다면 주님은 그대와 나를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로 하신 셈입니다. 말 그대로 그대와 사랑하기로 한 그 사랑에 주님께서 미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주신 미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더없이 알맞은 때에 오셔서 이런 일을 이루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 준비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약하고 반항적이어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그 때에, 그분은 자기 자신을 이 희생적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갈팡질팡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선하고 고귀한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사랑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 기록한 디베랴 호수에서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주님은 세 번에 걸쳐 배신의 주도자였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전반절) 여타 다른 설교에서 전했듯이 주께서 베드로를 사랑했던 사랑의 강도는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씩이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부합하지 못하는 불성실함의 사랑인 ‘필레오’의 사랑을 드리겠다고 고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15절 하반절) 이 정도면 관계를 끊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1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이 목적하셨고 정하신 사랑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베드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쳤고 전했기에 그의 사후 약 60년이 지난, AD 120년경, 베드로를 따르던 제자는 베드로의 정신을 이렇게 남김으로써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간직하며 사역했음을 보고합니다. 베드로후서 3:17〜18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후서 3:17절에 삽입된 ‘사랑하는 자’를 헬라어 원어 성경은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아가페토이’ (ἀγαπητοί) 베드로가 간직했던 사랑의 강도는 ‘필레오’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설교 서두에 감상했던 ‘사랑의 찬가’라는 곡에 관련된 스토리가 있습니다. 원래 이 곡은 프랑스 샹송 국민 가수로 유명한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한 곡입니다. 피아프의 연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며 만든 곡이 바로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입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사랑했던 연인이 죽자, 그를 추념하며 고백한 사랑의 언어가 얼마나 절절한지 우리는 앞에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 곡을 만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 이에게 헌정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이후, 다른 남성들과의 편력을 자랑했고, 끝내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47세의 나이에 간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조국까지 버리겠다고, 도둑질까지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허접한 것인지를 후대의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보여주고 그녀는 떠났습니다. 인간이 하는 사랑이 얼마나 조건적이며, 불완전하며, 성실하지 않은 사랑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좋은 실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허접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6-17)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래전에 고 옥한흠 목사의 설교 원고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88년 겨울에 남쪽 바다에 살던 고래 두 마리가 알래스카로 올라갔습니다. 알래스카에는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만(灣)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래 두 마리가 먹이를 찾으러 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만에서 먹이를 맛있게 먹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해에 알래스카에 겨울이 빨리 찾아왔고 얕은 곳에서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을 해서 고래가 들어왔던 길목이 다 얼게 되었습니다. 고래가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 고래들은 동사를 해서 죽고 말게 되는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에스키모인들이 큰 나무로 얼음을 깨뜨리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TV 기자와 연결이 되어서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되었고 이제는 이 고래 구출 작전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11톤 트랙터가 도착을 해서 얼음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헬리콥터가 5톤짜리 시멘트 덩이를 던져서 얼음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20톤짜리 쇄빙선을 보내어서 얼음을 깨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주 만에 온갖 어려움 끝에 100km나 되는 긴 얼음을 뚫고서야 두 마리 고래를 바다로 내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上』, 두란노, 170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고래 작전을 들으셨는데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고래 두 마리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렇듯 엄청난 장비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 예화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100km나 되는 얼음을 깨뜨려 구출해 준 그 사실에 대하여 고래가 감격하고 바다로 떠났을까요? 고래는 전혀 그런 감격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 네 번째 주일, 요한복음 3:16-17절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 또한 고래와 전혀 다르지 않은 배은망덕한 자가 되고 맙니다. 성탄절을 앞둔 오늘 주일, 나는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에게 요한복음 3:16〜17절을 통해 심장이 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심장으로 이 사랑을 먼저 느끼고 체험한 믿음의 선배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