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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12월 15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네 번째 강해):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2024-12-14 14:44
작성자 Level 10

20241215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네 번째 강해)

 

제목: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본문: 요한삼서 1:13-15

 

서론)

 

제가 다니는 탁구장에 올해 32년의 공무원으로 공복 생활을 하다가 여름에 명예퇴직을 한 회원 한 명이 있습니다.

아주 예의가 있고 겸손한 회원입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통상 공무원이라는 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관료주의 사회를 우리가 경험했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직되고, 남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이 몸에 배어 있는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라는 선입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대단히 예의가 있고, 관료적이지 않고 겸손해서 같이 있으면 기분을 좋게 해주는 회원입니다.

공복으로 있었고 퇴직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와 대화 중에 우리 교회 지체 중에 변태수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일부러 꺼냈습니다.

아마도 서로 알 수 있는 관계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리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친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 저도 그분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변태수 과장님은 정말 너무 좋은 분입니다. 존경받을 만큼 점잖은 분이고, 저도 선배님에 대해서 너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나가시는군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저는 괜히 어깨가 들썩여졌고 곧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태수씨가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 친구가 다시 이렇게 받았습니다.

그 선배님, 정말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이고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날,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 지체가 사회의 틀 안에서 함께했던 이에게 이런 좋은 기억의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웃펐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한 동네에 조폭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잔인한 인간들이었기에,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들만 보면 소름 끼쳐 할 정도로 인간이었기를 포기한 말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보상 심리가 있어서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한 뒤에 동네에 있는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대단히 불편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폭 형제의 동생이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형이 목사를 찾아와서 장례식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장례식 중에 내 동생이 조폭이었다는 말을 하거나, 나쁜 짓을 행한 악인이었다는 말을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말만 하십시오.”

말 그대로 협박한 것입니다.

목사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고사하고 모조리 악한 일만 행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조폭 부하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장례식장에서 식이 진행되고 설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교회 신자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례 예배에 참석했고 목사님의 설교에 주목했습니다.

장례 예배 설교를 위해 입을 뗀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장례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여기 영정 안에 있는 형제는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인의 형과 비교해 볼 때, 고인은 천사였습니다. 형이 결코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성자였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교훈을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이 오롯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교리에 대해 빠삭한 분들이라면 담임목사가 이렇게 전하는 것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단 말인가?

아마, 이런 저항적 심리를 갖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교우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더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그 정도의 영적 식견이나, 신학적 소양이 없기에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교우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은 구원의 조건과 자격으로 교우들에게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두괄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은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결과물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본론)

 

본문 전체 텍스트를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저자는 가이오에게 편지하는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불과 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한삼서에 기록한 내용보다 내가 가이오 형제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 글로 더 쓸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윽고 너무 쓰고 싶은 글 내용을 먹과 붓으로 쓰는 것을 마감하고 다른 행보를 보일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14절입니다.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지만, 약간의 의역이 들어간 번역입니다.

대면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토마 프로스 스토마’ (στόμα πρς στόμα)

직역하면 입과 입을 마주 대고입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자가 장로는 지금까지는 먹과 붓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지만 내가 가이오 형제를 찾아가서 그때는 입과 입을 맞대고 교제하며 진솔한 은혜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전한 것입니다.

서형석 교수는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했는데 참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저자 장로는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라고 말하며 저자 자신이 제시하고 싶은 것은 글이나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며 삶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서형석,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요한 1,2,3, 206)

주석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얼마나 자신이 삶으로 밑줄 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저자 장로의 이 말이 교만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제게 도 은혜였습니다.

요한삼서 저자가 가이오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글을 읽는 눈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과 살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나누고 싶었던 입이었음을 개진한 것입니다.

요한삼서 저자가 가이오 형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장소, 요한 공동체 교회에 방문하고 싶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와 만나서 신앙의 이유와 삶을 나누고 싶어 했던 삶의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15절을 나눕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저자는 가이오에게 평강을 기원합니다.

저자 자신만 평강을 빈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안했던 여러 교우들의 이름으로도 평강을 전하며 가이오에게 문안을 전합니다.

가이오는 교회 공동체를 사랑했고, 교우들은 참 사랑했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자 장로에게서 세 가지의 삶이 엿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평화를 사랑했던 자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랑했던 자입니다.

동역하고 있는 형제를 격려했던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삼서 저자 장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영적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려고 노력한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참 좋은 사람이었던 요한서신 저자를 통해 요한 공동체를 만나면서 임한 감동이 있습니다.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은 물론,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소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영지주의라는 옛 뱀과 큰 용과 같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에 의해 공격을 받았습니다.

요한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독단으로 교회 공동체가 영지주의와 싸워 이기는 것이란 녹록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도리어 이런저런 안팎에서 벌어지고 일어나는 영적인 공격이라는 살얼음판을 딛고 있었던 상황이 주후 1세기 교회였습니다.

이런 아슬아슬했던 교회가 분연히 영지주의와 같은 거대한 이단들을 물리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기저에는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교회 리더들이 서로를 잡아주고, 밀어주고, 견인해 주었던 사랑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시 서 박사의 주석 글을 하나 더 만나겠습니다.

지도자(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평신도 지도자(가이오)를 문안하고, 평신도들(요한 공동체 지체와 순회설교자)은 저자 장로를 문안하며, 가이오는 요한 공동체의 친구들을 하나하나 문안하여 우리의 요한 공동체의 관계 안에 거짓 교사의 가르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위의 책, 207)

결국 요한 공동체를 기점으로 하는 시대적으로 닥친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좋은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만들어집니다.

창세기 39:9-10절을 봅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요셉의 이야기 중에 창세기가 보고하는 귀한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관능적 유혹을 이겼다는 이 담론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膾炙)되는 메시지의 핵심은 코람데오신앙입니다.

개역판 번역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개역판 창세기 39:9)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득죄하겠습니까?

요셉의 신앙고백과 선포는 부인할 수 없는 팩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메시지를 묵상할 때마다 더 강하게 느끼고 체휼하는 부분이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보디발 아내의 요구는 한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연이어 계속되었습니다.

종의 몸이라는 신분인 요셉의 입장은 대단히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있지 아니하려는 몸부림이 요셉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몸부림을 저는 이렇게 재해석하곤 합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이라고 말입니다.

언제나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외롭고 힘이 든 과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세에 묻어가려고 합니다.

골치 아프고 힘든 과정을 왜 굳이 가려고 하는가 자극하며 그 길을 걷지 말 것을 압박하고 유혹하는 시대에 물들어 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신이 된 시대 즉 호모-데우스시대의 명제입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가 가속화되면 인간 스스로가 자멸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적시한 대로 하나님이 없는 시대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마구잡이 랜덤의 시대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비극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은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살며, 누군가를 짓밟고 딛고 일어서려고 하는 재앙의 복판에 있게 됩니다.

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해가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신 사사시대입니다.

하지만 내 맘대로 사는 시대, 내 의견이 좋은 대로 사는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이 땅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회복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저들이 알 리 만무입니다.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이미 이런 시대로 들어선 것 같다는 매우 안타까운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타인의 소리에 귀를 닫고 패거리 문화가 곧 힘이라고 생각하여 밀어붙이는 정치가 정의로 둔갑 된 세상이 오늘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걸으셨던 길과 삶을 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노벨문학상을 받아 대한민국 국격을 높여준 작가 한강의 시집으로 알려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다시 끄집어내어 펼쳤습니다.

그녀가 시집에 남긴 시어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126)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거대한 장례식장과 비견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비유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 한강은 그런 장례식장 같은 암울함으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찰하고 살아가려는 역동입니다.”

이 생각을 중단하지 않는 한, 작가는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읊조리며 강변합니다.

세속에 있는 작가도 이 정도로 치열하게 성찰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오기가 스멀댑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이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자격없이 구원받은 그대와 내가 그분이 걸어가신 길과 삶을 성찰하지 않고 산다면, 그건 정말로 짐승보다 못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살아내셨던 삶을 성찰하면서 그분의 흔적 따라 같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문학자이자 목사로 사역하는 이정일 목사의 글을 읽다가 밑줄 치게 한 챨스 스펄전의 어록을 읽다가 심장이 멎는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적용이 시작되는 곳에서 설교도 시작된다.”(이정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 간, 201)

단 위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정말로 많이 들었던 교우들의 멘트가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은 설교가 들렸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우들에게 저 역시 상투적으로 반응합니다.

은혜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는 교우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설교를 듣고 난 뒤에 고백할 수 있는 멘트가 아니라, 살고 난 뒤에 고백할 수 있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스펄전 목사의 갈파는 정말이지 엄청난 성찰이지 않습니까?

설교를 준비하여 선포한 목사도, 다바르의 말씀을 받은 교우들도 정말로 은혜를 받았다면 그 말씀의 진리대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친 후에 주님께, 지인에게 보고할 수 있는 결과물입니다.

정말로 좋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과 사셨던 삶을 따라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나의 모습과 같네/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무엇으로 다 갚으리요/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내 생명의 근원 되신/나의 삶의 이유 되신/내 모든 것 나의 전부/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어리석고 미련한 나/믿음 없어 실패한 나/그런 나를 안아주시는/아버지 나 사랑합니다/내 생명의 근원 되신/나의 삶의 이유 되신/내 모든 것 나의 전부/아버지 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