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8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세 번째 강해) 제목: 당신은 어떤 ‘결’을 갖고 있습니까? 본문: 요한삼서 1:9-12 서론) 매주 한 번씩 정한 날에 목욕탕엘 갑니다. 제게 목욕탕은 단순히 목욕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며 100〜150페이지 정도 독서를 하고 돌아오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고, 정확한 데이터를 뽑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목욕탕에서 행하는 독서로 저는 1년에 약 30권 정도의 책과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지난주는 소설가 한강의 『여수의 사랑』 독서를 마쳤습니다. 또 다른 지성적 성찰을 경험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날의 에피소드 하나, 전하겠습니다. 탕 안에서 소설을 만나고 있는데,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들과 어언 80대 후반 혹은 90대 초반 연세의 어르신이 같이 탕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로 보이는 어르신은 기력이 많이 약해져 들어오실 때,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서 아주 조심스레 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아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리면 좋겠다 싶었지만, 아들은 그리 다정다감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저는 퇴욕(退浴)을 위해 락커 룸으로 나갔는데, 마침 그 부자도 역시 락커 룸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본 광경은 매우 분노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개인 락커 룸을 열고 어르신이 옷을 주섬주섬 입으셨습니다. 아들은 혼자 빠른 속도로 옷을 입고 난 뒤에 옷을 입고 아버지가 느릿느릿 옷을 입는다고 마치 쥐잡듯이 아버지를 닦달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뒷짐을 진 체로 늙어 보행 보조기를 의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쇠한 아버지를 향해 동작이 느리다고 지청구를 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해서 아들과 한 판 붙을까를 정말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감정을 억제하고 참았습니다. 이유는 이번 주일 충청일보 일면 톱기사로 이런 글이 실릴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제천〇〇교회 목사, 목욕탕에서 행인과 주먹 다툼을 벌이다.” 그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던 인간들이 부지기수다.” “인간으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도 갖추지 못한 짐승 같은 이들이 부지기수다.”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도대체 인간이 아닌 이들이 너무 많아 세상이 아프다는 씁쓸함을 그날 현장에서 느꼈습니다. 본론)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요한삼서 저자 장로는 요한 공동체 지도자였던 가이오가 순회전도자들을 극진히 예우하고 잘 섬겨준 것을 옆에서 목도(目睹)했던 요한 공동체 교우들이 자기에게 찾아와 전언해 준 이유를 들어 가이오를 극찬했음을 살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본서의 저자 장로는 가이오에게 끝까지 순회 선교사(전도자)들을 잘 살핀 후에 그들이 사역지를 향해 떠날 때까지 잘 보살피고 전송해 줄 것까지 요구할 정도로 가이오를 신뢰하고 아꼈음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들과 함께 읽은 본문은 이런 분위기와는 상반된 급반전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9〜10절을 읽어 보십시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무대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 아주 부정적인 인물, 디오드레베를 소개합니다. 디오드레베는 도대체 누구였기에 요한삼서 저자 장로에 의해 대단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았을까요? 먼저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정보로 그 답을 찾아보십시다. ① 디오드레베는 공동체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였다고 고발합니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디오드레베와 가이오는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같이하고 있는 멤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짐작하건대,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는 같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거나, 아니면 근접한 곳에 위치 해 있었을 것이다.”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 1,2,3서』, 한국장로교출판사, 220쪽) 만에 하나, 스미스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면 오늘 본문은 독자들에게 주는 긴장감을 극대화해 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만에 하나, 가이오와 디오드레베가 같은 요한 공동체 안에 있었던 지도자 그룹의 인물들이라면 요한 공동체는 극심한 내홍에 처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이오는 요한 공동체로 귀환한 순회전도자들을 지극히 잘 섬겨준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모범적인 교회 리더였습니다. 반면 디오드레베는 같은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가이오와는 결이 전혀 다르게 교회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던 자입니다. (9절) 이뿐만이 아니라, 디오드레베는 순회전도자 그룹에 있는 형제들을 비방하고 그들을 내쫓기까지 한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10절) 결국, 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는 결이 달라 정 반대편에 서 있었기에 요한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이런 악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디오드레베가 이런 사악한 짓을 불사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레벨이 있었던 가이오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체 일인자의 자리에는 자기만 앉아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던 독불장군식의 암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악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디오드레베를 저자는 아주 선명한 단어로 그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 이 번역을 헬라어 원어에 맞추어 주석하면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으뜸 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필로프로튜온’인데, 이것은 ‘필로스’와 ‘프로토스’가 결합한 형태이다. 풀어 설명하면 ‘일등이 되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서형석,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주석-요한1,2,3서』, 198쪽) 세속은 일등만 기억하는 곳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풍자가 적용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1등이 아니라, 그다음 등수에 더 박수를 쳐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너무 귀한 은혜를 받는 줄거리 때문에 행복합니다. 모세가 왜 모세가 될 수 있었습니까? 모세에게는 아론이 있었고, 훌이 있었으며,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여호수아가 왜 일등처럼 여겨집니까? 2등을 말없이 수용했던 갈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만 빛나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어떻게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까? 나아만의 몸종이었던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칩거하고 있던 다소로 바나바가 가지 않았다면 바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인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2등이 말없이 섬기며, 또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는 대단히 불행한 자이며, 위험천만의 인물입니다. 우리 교회는 디오드레베가 없기를 바랍니다. ② 공동체를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임을 고발합니다. 10절 본문을 접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일인자는 자기 외에 없다고 고집하는 이였기에 가이오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향하여 비방을 일삼았고, 심지어 가이오와 같이 주를 위해 자기의 전 인생을 바쳐 사역한 전도자들을 요한 공동체에서 출교시키는 만행도 자행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를 파괴한 자, 디오드레베를 향하여 본 편지의 저자 장로는 교회의 권위를 갖고 다음과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10절 전반절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요한삼서 저자는 내가 요한 공동체를 방문하게 되면 디오드레베를 반드시 치리하겠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리더십입니다. 이런 각오를 다진 저자 장로는 본문 11〜12절에서 디오드레베와는 전혀 결이 다른 한 명을 의도적으로 무대 위로 올립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본서 저자 장로는 디오드레베의 대항마로 데메드리오를 소개합니다. 저자는 데메드리오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다시 12절에 주목하십시다.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적어도 세 부류에게 인정받은 이가 데메드리오라고 저자는 밝힙니다. ⓐ 뭇사람들에게 ⓑ 진리에게 ⓒ 우리에게 하나씩 접근해 보겠습니다. 뭇사람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요한 공동체와 더불어 그곳을 방문했던 순회 전도자 그룹에 속해 있는 이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대다수의 요한 공동체 형제자매들일 것입니다. 그다음, 진리는 누구일까? C.K. 바레트 교수는 진리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오직 여기서는 ‘진리’ 곧 하나님의 실재 혹은 그의 계시가 인격화되어 있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목회서신』, 154쪽) 쉽게 표현하자면 데메드리오는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도 인정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삼서 저자 장로, 그리고 가이오를 의미하는 대명사입니다. 결국 으뜸 되기를 좋아했고, 공동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자기 혼자만의 위상을 고집하던 디오드레베의 영적 카운터파트이자, 대항마이며, 요한 공동체와 리더들,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데메드리오였음을 저자가 밝힌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데메드리오는 아마도 순회 전도자 그룹에 있었던 신실한 형제이지 않을까 추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가 어느 그룹에 속해 있었던 인물인지를 파헤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가 더 중요한 관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을 비교하며 무대 위로 끌어올린 요한삼서 저자 장로는 교회 리더로써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이 구절이 시사하는 영적 교훈은 그 의미가 상당합니다. 『메시지』 번역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친구여, 악한 것과 짝하지 마십시오.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기초적인 것조차 모르는 자입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신약』, 675쪽) 오늘 설교의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 악함의 결이 아니라, 선함의 결을 갖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서 저자 장로는 요한공동체 지체들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악한 것과는 짝하지 말고, 선한 것과 그 결을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교훈을 접하다 보니 그 유명한 로마서 16:19절이 떠오릅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선한 것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면, 악한 데에는 미련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살피다 보면 오늘 본문의 정황이 너무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 화들짝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어느 교우를 바라보면, 결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의 삶의 행보나, 족적이나, 살아내고 있는 현재의 결과물들이 너무 아름다운 이가 있습니다. 손해 보기를 취미나 사명으로 여기는 이들입니다. 목사인 내가 보기에도 저렇게 살면 이 땅에서 성공하기는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헌신하며 희생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그의 옆에 가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올 때마다 너무 행복한 마음을 갖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대단히 아프고 유감스럽게도 그 반대쪽에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거나,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경우, 그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하게 하는 이들도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만나면 그 주위에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자기의’나 ‘자기애’에 도취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결국, 그런 이들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왜 예수를 믿는 거지? 라고 질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곤 합니다. 그렇구나, 신앙의 질도 결국 그 사람의 결대로 완성된다는 결론 말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글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시스』를 보면 이런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한겨울에 아몬드나무에 꽃이 만발하자 주변의 나무들이 비웃었습니다. “저렇게 교만할 수가! 저 나무는 저렇게 해서 자기가 봄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이것을 알았던 아몬드나무꽃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자매님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 가슴속에서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끝까지 아몬드나무꽃의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에 『생명수』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린 타 교회 교우 한분이 제게 피드백을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 생명수 찬양을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의 장으로 갈아타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노래하는 감동으로 물결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하게 하는 일체의 것과 결별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사는 이들이며 악한 데는 미련하게 살며, 선한 것에는 지혜롭게 사는 이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결’의 소유자입니까? 디오드레베의 결입니까? 아니면 데메드리오의 결입니까? 재론할 여지는 없지만 권합니다. 데메드리오의 결을 유지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또 주와 함께 살리라/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