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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12월 1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두 번째 강해): 그리운 사람2024-11-30 15:49
작성자 Level 10

2024121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두 번째 강해)

 

제목: 그리운 사람

본문: 요한삼서 1:5-8

 

서론)

 

김윤순 권사님

35년 목양 사역 현장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기십년 전에 아들 목사에게서 부고가 톡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머님 김윤순 권사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장지: 부산의료원 *호실, 입관: **, 발인: **

빈소는 당시 거리 사정으로 쉬지 않고 달리면 3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장소였습니다.

오후 늦게 받은 톡이라 부산에 가서 조문하고 제천에 돌아오면 새벽 시간일 텐데, 체력적인 부담감이 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아내와 함께 만사를 제쳐두고 권사님의 빈소에 도착하여 조문하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밀양 대곡교회를 섬겼던 3,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사 초짜로 사역하던 어간, 교회를 목숨처럼 사랑하셨던 권사님, 3년에 한 번 바뀌는 담임목사에게 무슨 정이 있을까 싶었지만, 여전히 자식뻘 되는 담임목사를 위해 분골쇄신하셨던 권사님, 이요한 목사가 아내의 태중에 있을 때, 전치태반 선고를 받아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때, 종과 더불어 아내와 태중에 아기를 위해 눈물로 중보해 주셨던 권사님, 아내가 출산을 위해 교회를 비워야 했던 추운 겨울 3개월 어간,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면 곱보 밥, 따뜻한 국과 정성스럽게 찬반을 담아 잠자고 있는 잠 많은 전도사가 깨지 않도록 사택 툇마루에 조반을 놓고 가신 권사님, 교회가 힘들 때면 언제나 솔선수범하여 교우들을 돌보셨던 권사님의 빈소에 모셔져 있는 영정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나님, 권사님을 너른 두 팔로 안아주셨을 줄 압니다. 하나님, 목회가 끝나는 그날까지 제 현장에서 권사님을 자랑하겠습니다. 권사님을 제게 주셨던 하나님, 김윤순 권사님의 영혼을 가장 아름답게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권사님의 영정 앞에서 권사님께 눈물 흘리며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권사님, 제 목양의 시작에 권사님을 만난 것은 제겐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머님과 같으셨던 권사님, 받은 사랑을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며 보답하겠습니다. 그날 다시 만나면 권사님을 두 팔로 꼭 안아드리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편히 쉬십시오.”

권사님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지금은 사위가 목회하고 있는 대곡교회는 저의 영원한 선교지이고, 아들이 목회하고 있는 세종성결교회도 우리 교회의 선교지이자 제 기도의 영역입니다.

34년 전에 부임했던 밀양 대곡교회, 김윤순 권사님은 34년이 지난 지금도 제게는 너무도 그립고 또 그리운 사람입니다.

척박한 삶의 여정을 우리는 지금도 걷고 있습니다.

걷는 그 길에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가 여러분 옆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꽤 괜찮은 삶을 산 사람입니다.

만에 하나, 내 삶의 동행기 중에 그립고 또 그리워할 만한 이가 없다면 당신은 참 슬픈 삶을 산 사람입니다.

 

본론)

 

본 편지의 저자 장로는 가이오에 대한 극찬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본문 56절 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주석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저자 장로는 수신자 가이오 형제에게 다시 사랑하는 자여’ (Ἀγαπητέ) 라고 호칭합니다.

주지했듯이 요한삼서 저자 장로는 가이오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친밀함을 표현한 저자 장로는 가이오에 대한 또 다른 증언 하나를 인용합니다.

나그네 된 자들이 나에게 왔고 동시에 그들이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간증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가이오 형제가 우리들을 따뜻하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환대였습니다.”

5절에 기록된 나그네 된 자는 누구일까요?

학자들의 개진에 따르면 복음 전도자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선 선교사” (루돌프 불트만, 국제성서주석, 149),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던 사자 즉 선교사”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 1,2,3, 217)일 것이며, “정통 기독교 선교사” (서형석, 요한 1,2,3-연세신학백주년 기념 주석-190)라고 해석합니다.

종합해 보면 요한 공동체를 구심점으로 활동했고, 또 하고 있을 파송 선교사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일정 기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 하다가 파송 주체인 요한 공동체로 귀환했는데 공동체의 평신도 리더였던 가이오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와 대접을 했고, 선교사들은 이런 반응에 대해서 너무 감사해서 요한삼서 저자 장로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놀라운 환대를 간증했고, 저자는 이런 가이오에 대해서 또다시 극찬하고 있는 메시지가 본문 56절입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렇게 극찬을 한 저자 장로는 가이오를 극찬하는 것으로 본문 텍스트를 마감한 것이 아니라, 아주 똑 부러지게 권면까지 했음을 본문 6절 후반절부터 8절이 제시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이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그대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그들을 잘 대접해 보내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전도 여행을 하지만 이방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자 장로는 가이오를 칭찬한 뒤에, 당부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걸었기에 이방인들에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선교사(전도자)들을 위해 환대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나는 그 일을 가이오 형제가 계속 감당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이런 일을 함께하는 그대와 나는 진리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입니다.”

요한삼서 두 번째 본문 텍스트를 읽고 설교 준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요한삼서 저자 장로에게 가이오는 어떤 존재였을까?

도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이 정도의 칭찬과 권면을 동시에 던질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을 하려면 여러 가지 정황을 참고해야 하고, 또 여러 말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황한 설명이 아니라, 오늘 설교에 부합하고 또한 가장 적절하다고 평할 수 있는 단어로 레마를 정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이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삶의 목적을 위해서 계산하지 않고 달려가는 동역자였다.

 

저는 오늘 설교가 주는 레마는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 있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적을 위해 같이 길을 걷는 길벗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가령 이런 성경적 실례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로마서 16장에는 33명의 사람이 거론됩니다.

바울을 도와 동역의 사역을 감당했던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약간의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의견을 모으는 정설은 33명 중의 24명은 로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나머지 9명은 겐그레아를 포함한 그리스 지역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의견입니다.

이 중에서 많은 이들이 읽고 지나가지만 깊이 묵상하지 않는 동역자를 오늘 설교에서 교우들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6:13절을 소개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대단한 친근감이요, 신뢰 관계임을 바울이 선언한 루포와 그의 어머니 이름이 거론됩니다.

당시 글을 써서 문서를 만들 때, 문화적, 사회적 경향은 가부장적이고, 부계 계열 중심이다 보니 여성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상례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서 16:13절에서도 바울이 신뢰했던 형제의 이름 루포가 등장하지만, 그의 어머니 이름은 익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해서 바울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라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포와 그의 어머니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궁금해 집니다.

대단히 애석하게도 루포 어머니의 이름이 적시되고 있지 않아 그녀가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추적할 수 없지만, 성경의 내증을 참고할 수 있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마가복음 15:21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주님의 체력은 바닥이었습니다.

통상 135136kg으로 알려진 십자가의 무게를 채찍에 수없이 맞은 주님이셨기에 더 이상 그 십자가를 지실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던 로마 군사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던 두 사람을 강제로 뽑아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알렉산더였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이 구레네 즉 북아프리카 최고의 도시인 카르타고 출신의 시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아주 친절하게 시몬의 아들 이름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루포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의 정황을 통해 이런 드라마틱한 구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시몬은 재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피하는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이런 재수 없는 발탁으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대신 올라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골고다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지근 거리에서 경험했습니다.

동시에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일어났던 자연적인 기적들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 장소에서, 예수의 죽음을 목도한 시몬은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최고의 영적 드라마를 보게 된 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해서 제2 복음의 증언서에 따르면 그 현장에 있었던 시몬은 자기의 죄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만났고, 이후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복음으로 물들게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보고합니다.

이렇게 예수가 목적이 되어 그의 전 인생을 살았던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믿음의 아름다운 본이 되어 가족을 변화시켰고 그 결과물이 고스란히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에 의해 증언되었다고 학자들은 의견을 개진합니다.

이런 추론을 전제할 때 앞에서 언급한 로마서 16:13절은 감동이자 은혜의 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로마 교회에서 신앙으로 묶어진 공동체 지체 모두를 향하여 북아프리카 출신의 형제 루포에게 문안하고, 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도 되니 그 자매에게도 극진히 문안하라고 권한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바울이 루포와 그의 어머니, 추론하자면 그의 아버지 시몬까지 함께 묶어 로마 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문안하라고 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같은 이들을 향한 신뢰가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목회하는 아주 친한 친구 목사가 저보다 수개월 앞서 동유럽 투어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이번에 종교개혁지 순례지로 다녀왔던 5개국보다 한 나라가 많은 헝가리가 포함된 6개국을 투어하고 왔는데, 제가 후발자로 종교개혁지 순례를 다녀온다고 하니 자신의 경험담을 참고하라고 몇 가지 팁을 알려주었습니다.

친구가 제일 먼저 들려준 말은 식사 때 너무 힘들었다는 충고였습니다.

매 끼마다 맥주를 비롯한 술판이 벌어졌는데 너무 그 분위기가 힘들었다는 후담을 들려주었습니다.

또 하는 동승 한 투어 팀들이 툭툭 던지는 세속적 패설들이 목사인 자기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한 유럽 투어는 순전한 관광 투어였기 때문입니다.

12일 동안 진행된 종교 개혁지 순례에 함께 한 투어팀에는 목사가 7명이었고, 사모가 5명이었습니다.

안수집사, 선교사, 그리고 집사로 이루어진 33명과 인솔자는 장로님이 저희 투어팀이었습니다.

저희 팀은 12동안 투어 버스 안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주일에는 목사들이 순서를 맡아 주일 예배도 드렸습니다.

탐방하고 순례한 곳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신앙의 족적들을 확인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했습니다.

순례가 끝난 지 3주가 되어가는데 단체톡 방에서 이탈하여 나간 지체가 한 명도 없습니다.

지금도 주일에 받은 은혜를 나누고 있고, 저는 순례 여행기를 써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삼아 분명한 천로역정의 행군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은 신앙의 길벗들입니다.

목적이 같다는 것은 동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동역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같은 목적을 향해 걷고 있는 지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동역의 길이 끝까지 아름다우려면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가이오에게 저자 장로가 칭찬 후에 당부하고 권한 것은 전도자들, 순례자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환대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일회적인 환대로 끝나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끝까지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하며 달려가는 동역자로 잘 서서 교회 공동체는 물론, 타자들을 위한 예수의 사랑을 잘 감당하는 선한 일꾼이 되어 줄 것을 당주하며 매듭짓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계산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요한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를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저는 이 당부가 오늘 우리 세인교회에도 절실하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자는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죽여가며 일하는 자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거론한 김윤순 권사님을 추억하고 복기한 이유는 그분은 적어도 전 삶의 영역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닌, 철저하게 교회 중심적이며, 타자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귀한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34년이 지났지만, 그 어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합니다.

나태주 시인이 시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나태주, "꽃을 본듯 너를 본다", 지혜 간, 80쪽) 

여러분에게 이런 신앙의 동지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목적지를 향해 같은 길을 가지만,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며, 타인을 존중하며 계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가 당신이며, 또 그대 곁에 이런 신앙의 동역자가 있습니까?

당신은 2024년의 가이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내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조문객들이 이강덕 목사를 애도할 때 이 한마디를 듣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목사님, 참 그리울 겁니다.”

이 한마디 애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교우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이오가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낮엔 해처럼 밤의 달처럼 (1절만 찬양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 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