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주일 설교 (요한삼서 첫 번째 강해) 제목: 가이오가 누구이기에 본문: 요한삼서 1:1-4 서론)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신도들 몇이 와서, 그대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그대의 진실성을 증언해 주는 것을 듣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표준 새 번역 버전으로 읽은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숙지하다 보면 요한삼서라는 편지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요한삼서의 저자는 요한이서의 저자와 동일한 장로입니다. 하지만 요한이서는 수신자를 요한 공동체 안에 있었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형제, 자매들로 넓힌 반면, 요한삼서는 수신자를 요한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던 평신도 리더인 ‘가이오’ 형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약간의 차이가 보입니다. 본문 요한삼서의 저자 장로가 보인 가이오에 대한 예우는 특별했습니다. ‘가이오’를 호칭하면서 저자 장로는 무려 4번에 걸쳐 그에게 형용사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그 형용사가 바로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사랑하는’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토스’ 즉 ‘아가페’라는 사랑으로 엮어져 있는 아주 관계가 특별한 사이의 사람임을 명징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이미 숙지했듯이 헬라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사랑이라는 단어는 총 4가지 단어가 있는데 ‘필레오’, ‘스톨게’, ‘에로스’라는 단어는 모두 조건적 사랑을 말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반면 유일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인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가이오’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는 말은 그만큼 관계가 특별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도대체 가이오를 왜 이토록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그렇습니다. 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가이오를 특별하게 사랑한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저자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요한 공동체 지체들이 내게로 와서 이렇게 증언했다. 장로님, 우리 공동체의 리더인 가이오 형제는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진리를 순종하며 그 진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그대로 행하며 본이 되는 삶을 사는 형제입니다.” 3절 증언은 오늘 우리 독자들을 울컥하게 만드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왜 울컥합니까? ‘가이오’가 삶과 말이 이원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감사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월요일 새벽에 기도하는 세부 항목 중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세인 공동체 지체들의 삶과 말이 유리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의 본을 보여준 성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가 바로 가이오 형제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삼서 저자 장로는 가이오 형제를 향한 사랑이 특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무려 4번에 걸친 호칭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가이오는 어떻게 이런 진리 안에 거하고 그 진리대로 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주석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가이오를 정의한다면 그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이다. 가이오는 진리와 사랑의 일치 모델로 등장한다. 그는 진리의 측면에서도 옳고, 사랑의 측면에서도 충만한 자다. 요한서신 전체에서 진리로 번역되는 ‘진리’라는 단어는 예수로 언급된다.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이 존재할 정도로 본질적인 실제의 영역 안에 있었던 가이오는 매주 중요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모든 사랑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진리(예수) 안에서 하는 사랑이어야 아름답다.” (서형석, 『요한일서, 이서, 삼서-연세신학백주년 성경주석』, 182-183쪽) 서 박사의 주석이 마음에 와닿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가이오가 왜 진리에 따라 행동하며, 왜 진리 안에 있으려고 노력했는지를 알려주는 명료한 해석이 그의 주석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오는 진리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에 그분이 하셨던 사랑을 닮으려고 했고, 그런 일심이 바로 말과 삶의 유리 되지 않고 하나 되는 동일했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가이오였기에 요한삼서 저자 장로는 그를 사랑하는(아가페토스) 형제 가이오라고 호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가이오 형제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가 요한삼서이지만, 본문 마지막 구절 4절에서 이제는 가이오 한 사람이 아니라, 가이오가 속해 있는 요한 공동체 전체 지체에게 저자가 갖고 있는 진심의 메시지가 4절 본문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진리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요한삼서 1:4) 저자는 가이오 뿐만이 아니라, 주후 1세기 말에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안에서 믿음의 경주를 감당해 줄 것을 당부하며 저자는 본문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형제 가이오에게 저자 장로는 왜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유명한 본문 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마도 이 구절을 모르는 신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자, 특히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세뇌가 되어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뇌될 정도로 빠삭하게 인식된 이유는 소위 말하는 ‘삼박자 축복’이라는 신드롬을 일으킨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듣고 배웠고 세뇌되었습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복을 받고, 육체적으로 강건할 수 있다. 영혼 축복은 물질의 복으로 이어지고, 물질의 복에 이어 육체의 복도 이루어진다는 불변의 신앙 공식으로 구도화된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저는 이것을 믿는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비해 건강하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믿는 목사입니다. 더불어, 말씀의 은혜에 붙들려 똑바른 정신과 삶의 철학을 갖고 사는 이가 물질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믿는 목사입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사는 이가 물질을 흥청망청 쓸 리 없으며, 자신의 육체적 만족과 말초적 쾌락을 위해 물질을 랜덤으로 쓰지 않을 것이기에 범사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한삼서 1:2절을 공식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삼서가 불변의 공식으로 매도되면 요한삼서 1:2절이 주는 구도화시킨 말씀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존재했던 이들 중에 영적으로 완벽한 인생을 살았던 존재는 딱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삶의 완전 무결점을 이루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적인 면에서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범사에 있어서 최고의 물질적인 복을 받아야 마땅하며, 육체적으로도 완벽한 건강함을 이루며 살아야 했음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소위 말하는 삼박자의 복을 받으신 분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마태복음 8:18-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비롯한 갈릴리 지역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보이자, 유대 골수분자 중의 한 명인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자청합니다. 예수께서 어디를 가든지 나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보인 것입니다. 분명히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능력을 따라잡으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고백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서기관 고백의 저의를 아셨던 주님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주님은 세속적인 풍요의 그 어떤 것도 갖지 않으신 분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면 노숙자나 다를 바 없는 가진 것 ‘무소유’라는 지난한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주께서 육체적인 강건함을 견지하면서 사셨던 날이 그 얼마나 됩니까? 요한삼서 1:2절을 공식으로 삼아 적용해 보면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영혼을 엉망으로 살면 임하는 육체의 저주를 받은 인생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 대속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으로 인정하지만, 당시 유대 율법적 관점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하자면 개죽음이나 저주받은 죽음으로 육체를 마감한 분이 예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요한삼서 1:2절을 예수님의 삶을 대입하여 공식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과유불급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멀리 가지 말고 오늘 본문의 수신자인 가이오를 예로 삼아 보십시다. 요한삼서 저자 장로가 1:2절을 글로 쓴 텍스트는 분명한 정보를 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어떤 정보입니까?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이오는 지금 질병을 앓고 있는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증언입니다.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구절에서 언제나 해석의 논쟁거리가 된 단어가 바로 ‘영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슈케’(ψυχή)입니다. 신약학자의 주석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 구절에는 해석상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로 여기에 사용된 ‘프슈케’가 영혼을 가리키는지, 목숨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영혼을 가리키면 영혼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목숨을 가리키면 생명 연장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두 가지의 의미 중에 후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조병수, 『그 말씀-2001년 8월호』, 목회와 신학 편집부, 80쪽) 가이오의 육체에 무슨 질병이 강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의 연장을 위해 저자 장로가 중보 한다는 메시지가 2절이라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저자는 가이오의 질병 상태를 위중하게 보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저자는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형제 가이오’라고 극찬하며 그의 영적 상태가 귀하고 귀한 상태임을 시사했다고 전술한 설교에서 언급했습니다. 만에 하나, 이게 사실이라면 가아오는 중병에 걸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요한삼서의 공식 구도에 합당한 자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혼을 보존하고 그토록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가이오에게도 육체의 질병이 임했습니다. 요한삼서 1:2절의 삼박자 축복이 전혀 적용되지 않은 자가 가이오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이 난감을 풀 수 있습니까? 요한삼서 1:2절을 지금까지 곡해하게 만든 해석에서 벗어나야만 진짜로 요한삼서 1:2절에 관한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 범사가 잘되지 않고, 육체적으로 강건하지 않더라도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3〜4절을 나누겠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이 구절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형제 가이오가 지금 육체적으로 나약하여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성으로 삶과 말이 다르지 않은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요한 공동체 지체들의 보고를 받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가이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내게 알려준 요한 공동체 지체 모두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내기를 기도하며 권면합니다.” 기도처에 있으면서 이재철 목사의 설교 한 편을 경청했습니다. 전립선암 말기 선고를 받고 34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강원도에 있는 한 요양시설에 들어가 머문 경험을 소개한 이 목사께서 그때 경험한 에피소드를 하나 인용했습니다. 암 환자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보니 중간중간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한 번은 명상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그곳에 참석하게 된 경험담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을 포함하여 4명의 수강생들이 그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질문한 내용이 이것이었습니다. “언제 행복을 느끼십니까?” 수강생 청년 한 명이 답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입니다.” 또 다른 젊은 여성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입니다.” 중년 여성에게 강사가 똑같이 질문했습니다. “공기 좋은 숲속으로 트레킹할 때입니다.” 이윽고 이 목사께도 같은 질문이 이어지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내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이 설교를 영상으로 접하다가 아멘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밝히겠습니다. 이 목사께서는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삶을 뒤돌아보면 인생이 잘 풀릴 때가 많습니까? 안 풀릴 때가 많습니까? 말하나 마나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병원 심방을 가보면 돈을 지척에 두고 있지만,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지천에 있지만, 단 한 수저도 들어 입에 넣을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트레킹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주어졌을까요? 중국발 미세 먼지로 인해 서울에 사는 이들은 일주일 창문을 열지 못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하지만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삶의 여정 중에 절대적인 의미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가이오’가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진리, 그 ‘가이오’를 칭찬함은 물론, 그가 떠나지 않고 머무르려고 했던 그 진리를 그대들도 간직하라고 요한 공동체 지체들에게 권하며 저자 장로 자신도 천착했던 그 진리는 저와 여러분의 절대적 가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는 방법, 그분과 교제하는 방법, 그분 안에서 거하려는 몸부림은 사람들의 사상, 이념, 성향, 배경, 지성, 감성,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있고 다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회심 이전, 그가 붙들렸고 했던 것은 유대 종교라는 틀이었습니다. 그 틀이 바울에게는 진리였고, 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그가 붙들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메섹 경험 이후, 이렇게 선포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수년 전에 소아시아 7개 교회를 순례할 때 경유했던 곳이 지금 그리스에 위치해 있는 빌립보였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고 성경에 보고 된 빌립보 감옥으로 여기지는 터도 방문했고, 바울이 만났던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가 함께 수다를 떨던 여인들이 빨래하던 냇가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빌립보 교회로 추정되는 장소였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로 추정되는 곳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에서 성경이 소개하는 순례 장소를 이렇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분노하다가 그 분노가 극에 달한 순간은 빌립보 순례 터의 화장실이었습니다.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버려진 화장실을 보면서 경악했던 기억에 또렷합니다. 방문했던 시기가 그리스의 국가 부도 위기인 모라토리움 위기의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관리에 대해 너무 방치하고 있는 그리스 당국의 소위가 매우 불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로 그때, 그 분노의 끝에 있는 제게 명징하게 들렸던 주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때 제게 조명된 은혜는 이것이었습니다. 신앙을 강제적으로 묵살시키는 오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시대, 이로 인해 급기야 성경의 역사가 일어난 장소조차 무시하는 오늘이지만, 내게 살아 있는 것이 여전히 있다는 감동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절대적 가치로 부여잡고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 바로 나의 주군의 음성은 사라지 않는다는 감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가이오가 붙들었고, 요한삼서 저자가 붙들었던 절대적 가치이자 변하지 않는 진리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분 안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사셨던 삶을 우리도 살아내는 주인공들이 세인 지체들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곧잘 불렀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와 함께라면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참된 부요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유혹하려고 세상 바람 휘몰아쳐 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자비로운 주의 음성을 주와 함께라면 병들어도 좋아 참된 강건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넘어뜨리려 거친 파도 휘몰아 쳐와도 나는 결코 놓을 수 없어 따사로운 주의 손길을 내 맘 아시는 주 항상 함께 계셔 약한 내 영혼에 위로와 능력주시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시련의 밤 어둡고 깊어도 나는 결코 떠날 수 없어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주의 나라를 주의 나라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