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7일 추수감사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35:16-21 제목: 무엇이 감사하는 삶일까? 서론) “그대의 ‘해석’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해석’과 동일하다면, 그대의 삶의 과정과 결과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믿음은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재철, 『사명자반』, 33쪽) 2014년에 읽었던 이 책을 지난주 담임목사 셀 사역의 텍스트였기에 다시 10년 만에 지체들과 나누었습니다. 지체들과 다시 복기하다가 10년 전에 받았던 은혜가 다시 복받쳐 스며 올라왔습니다. “믿음은 해석이다.” 대단히 명료한 성찰이자 통찰입니다. 이 구절에 천착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곧잘 범하는 실수와 착각이 있습니다. 어떤 한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해석의 결과가 모두 다 같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어떤 사건과 사물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나 가능합니다. 하나는 공산주의이고, 또 하나는 그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체주의 체제하에서는 그게 가능합니다. 1,500년대 유럽은 교황 권력이 절대 권력이었습니다. 특히나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의 종교 권력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는 물론,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권력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중세의 법이자, 원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황이 자의적으로 멋대로 해석하여 만들어 낸 면죄부도 가장 강력한 법이었고,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이것은 복종의 가치였지, 대항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면죄부라는 말도 안 되는 만들어 낸 가짜 가치에 저항하며 도전한 것이 바로 루터의 반박문이었습니다. 루터는 왜 당시 최고의 권력이자 절대적 가치였던 교황권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까? 성경을 똑바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해석은 강요되고 세뇌된 획일적인 교리를 바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왜? 루터는 믿음이 해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론) 본문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을 머물다가 드디어 삼촌의 그늘에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삼촌 라반의 여러 위협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산을 넘자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얍복에서 기다리고 있는 에서라는 담이었습니다. 장자의 복을 빼앗긴 에서는 20년간 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 칼을 뽑을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무장해제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얍복강에 잘 훈련된 사설 군사 400명과 함께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는 순간, 죽은 목숨인 것을 알았기에 그 위기는 야곱에게 있어서 최대의 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한 야곱을 방관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형의 마음을 극적으로 돌리도록 역사하심으로써 이 위기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임한 고난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벧엘로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세겜에 정착한 야곱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던 디나가 세겜 지역의 족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당하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이 치욕적인 사건은 단지 디나의 개인적 치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빠들에게 분노를 야기시키는 도화선이 되어 결국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대량 학살의 원조 격인 세겜 부족의 대학살로 이어지는 살해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비극을 맛본 야곱은 왜 자기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앙이 임했는지를 복기하다가 그 옛날 야훼 하나님께 약속했던 벧엘로의 회귀와 그곳에서의 영적 회복을 지키지 않았음이 그 원인을 알고 급기야는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야곱과 그의 식솔들은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하며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에브랏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동선에서 야곱은 가장 힘든 고난을 경험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잃게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에브랏 도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모처에서 임신 중이었던 라헬은 야곱의 막내이자 자신의 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라헬의 죽음은 야곱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슬픔이 어찌 야곱만의 슬픔이었겠습니까? 가장 피해자이자 슬픔의 극점이었던 장본인은 당사자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본문 18절 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창세기 30장을 보면 야곱은 자녀들을 낳았던 밧단아람에서 자식들의 이름 짓기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문명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이 모계적인 사회였기에 자녀들의 이름은 전적으로 어머니들이 지었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계도의 흐름에 따라 라헬도 자기 죽음과 맞교환할 정도로 사랑한 12번째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בֶּן־אֹונִ֑י)라고 작명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을 번역하면 ‘슬픔의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라헬이 자신이 낳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지었는지는 문맥을 참고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로도 번역되지만, 또 다른 뜻으로는 ‘나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뜻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라헬은 그녀의 전 인생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 빌하, 실바에 비해 턱없이 적은 단 한 명의 아들만을 출산한 속앓이를 하며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었기에 언제나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셔서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을 양육할 기회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녀의 애달픔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기에 라헬은 막내아들의 이름을 내가 내 힘으로 낳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낳음과 동시에 이별해야 하는 운명을 감지한 끝에 ‘슬픔의 아들’ 즉 ‘베노니’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공감이 되는 대목입니다. 이제 아내를 잃은 야곱의 반응을 보십시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가 죽어가면서 지은 아들 ‘베노니’의 이름을 야곱이 지켜주는 것은 죽은 아내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반응은 대단히 냉정했습니다. 12번째 아들의 이름을 곧바로 개명합니다. 자식들의 이름 짓기에 관여하지 않았던 야곱이었지만 본문에 등장한 야곱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자기의 뜻을 관철시킵니다. 다시 본문 18절 하반절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בִנְיָמִֽין)을 분석하면 ‘야민’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오른쪽’이라는 뜻이고, ‘베’는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은 ‘오른쪽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지은 ‘슬픔의 아들’을 야곱이 ‘오른쪽의 아들’로 개명했다는 말입니다. 통상 오른쪽이라는 의미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언제나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야곱은 막내아들의 이름을 ‘승리의 아들’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대한 구약 성서학자 중에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게르하르트 폰 라드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고대인들의 신념에 의하면 이름과 그 이름의 담지자 사이에는 신비한 연관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름은 운명을 내포할 수 있었다. 18절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되어 버린 영적 차원에서 전개된 작은 드라마를 암시해 준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둘러 쌓여 있는 라헬은 새로 난 아기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으며, 이 아기를 일생 이런 곤궁의 그늘 밑에 있게 할 이름을 지어 준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시작되는 아기의 삶 위에 운명적으로 드리우게 될 어둠으로부터 아기를 구해낸다. 그는 이 불길한 이름을 야곱은 인정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국제성서주석-창세기』, 382쪽)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꾼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신학적인 교훈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막내아들의 인생이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를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의 미래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들로 긍정화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막내아들의 이름을 바꾼 본문 교훈을 통해 추수감사주일 아침에 놀라운 은혜에 접목해야 합니다. ※ 내가 내 삶의 신앙적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교훈입니다. 마가복음 9장은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 광경을 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반응한 내용을 보고해 주는 귀한 복음서의 자료입니다. 변화산에 오르신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흰 광채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았고, 더불어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선조들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옆에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극적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놀랍고 신비로운 광경을 목도한 베드로가 곧바로 고백합니다. 마가복음 9:5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볼 것은 ‘좋사오니’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단어 ‘칼론’ (καλόν)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름다운’, 혹은 ‘잘생긴’ 등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형용사입니다. 결국 변화산에 오르셔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모습을 보이신 주님의 모습이 최고의 미적 상태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어가 바로 ‘칼론’이라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의 베드와는 달리 거침없는 주님의 일꾼으로 변화됩니다. 이윽고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기 직전이었던 주후 60년대 중반 시기에 베드로가 남겼던 사족을 모아 그를 따르던 베드로의 제자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게 된 베드로전서라는 걸작에서 제자는 베드로가 남겨 놓은 기막힌 교훈을 소개합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소개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순교를 앞두고, 더불어 네로 황제의 심각한 박해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로마 지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해 용기백배할 메시지를 선물로 전하고 있는데 그 메시지가 사뭇 진진하고 웅장합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렇게 전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변화산상에 주님과 함께 올라갔다가 너무 아름다운 주님의 외형적 모습을 보고 주께 이곳에 집을 짓겠다고 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내가 거절당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붙들었던 것이 풀과 같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녕 붙들어야 할 것은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결코 썩지 않으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죽음의 공포가 우리 앞에 있지만 영원히 썩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 위기를 이겨 나가십시다.” 금요일, 친구 목사 아버지의 하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날, 유족들에게 이 구절을 텍스트로 정해 다음과 같이 유족들에게 전했습니다. “여기에 묻히는 여러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살아생전 적지 않은 부를 얻으셨고, 많은 명예도 거머쥐시며 사셨던 이력을 갖고 계신 어른입니다. 6남매를 거두셨고 훌륭하고 교육시키셨고 나름 사회에서 잘 살아내도록 분투하셨던 어른이셨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마지막에 갖고 가시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관 위에 뿌린 꽃가루, 명정포 그리고 어른의 시신을 담은 향나무 관이 전부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것마저도 오늘을 지나면서 서서히 흙과 함께 썩어질 것이 자명하며, 어른의 육신도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이 땅의 육체적인 건더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남 목사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토록 전하려고 노력했던 하나님의 말씀만은 어른의 영혼에 남아 있게 될 것이기에 어른이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썩지 않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명심하십시다.” 변화산에서 육체의 아름다움을 탐했던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불과 30년 만에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그가 가져올 수 있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인격적으로 경험한 베드로는 그때 이후부터 자기의 신앙적 삶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을 갖고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를 변화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베드로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은 삶의 태도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해석한 삶의 내용이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2024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수없이 많은 형태로 내게 다가왔던 지난 2024년의 삶의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올바른 신앙의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까? 만에 하나, 그런 삶의 내용을 살아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삶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내게 일어난 일체 일들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최악의 2024년을 보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지 순례 3일째 되던 10월 30일 그러니까 루터가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건 지 507년이 되는 바로 그 전날, 저도 루터가 그 조항문을 내 걸었던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섰습니다. 미사가 한참인 시간이었기에 그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로 살아생전 다시 또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으로 다가서서 그 문을 붙들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의 본질에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미 임했고,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통해 지금도 일하시는 성령의 현재적인 역사하심과 예수께서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를 선포하는데 목을 걸겠습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주님이 머리되신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507년 전에 루터가 그랬듯이 종도 오늘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체 사탄적 행태와 맞서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옆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2024년 추수감사주일 아침, 저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는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복음에 붙들려 살고 있다는 감사임을. 2024년, 추수감사주일 아침, 여전히 감사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제목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괴물 같은 교회 안팎의 공격이 노도와 같이 내게 다가와도 여전히 말씀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최고의 감사임을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 2024년 최고의 감사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2024년 무엇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 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