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0일 주일 설교 (요한이서 네 번째 강해) 제목: 문안합니다. 본문: 요한이서 1:12-13 서론) 오늘은 시 한 편을 감상하며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 없고 인생이 무엇인가 정말로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 없다 어쩌면 인생은 무정의용어 같은 것 무작정 살아보아야 하는 것 옛날 사람들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오래 그래야 할 것 사람들 인생이 고달프다 지쳤다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가끔은 화가 나서 내다 버리고 싶다고까지 불평을 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비록 그러한 인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조금쯤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인생은 고행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다 우리 여기서 ‘고행’이란 말 ‘여행’이란 말로 한번 바꾸어보자 인생은 여행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너와 함께라면 인생은 얼마나 가슴 벅찬 하루하루일 것이며 아기자기 즐겁고 아름다운 발길일 거냐 너도 부디 나와 함께 힘들고 지치고 고달픈 날들 여행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구나 지구 여행 잘 마치고 지구를 떠나자꾸나. (나태주,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열림원, 15쪽) 어떠셨습니까? 따뜻하셨습니까? 시인의 고백과 노래가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이 시를 감상하다가 느껴진 감동은 시인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느낌을 간직하고 나눌 수 있는 시인이야말로 참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감동이 제게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조금쯤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사랑하는 너와 함께라면 인생은 얼마나 가슴 벅찬 하루하루일 것이며 아기자기 즐겁고 아름다운 발길일 거냐” 희망의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론) 본문 저자인 요한서신 저자는 이 편지를 받는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수신자들을 향하여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넵니다. 본문 13절을 만나보겠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이 구절에 기록된 택하심을 받은 네 자녀들이 누구일까요? 허주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서신의 첫 절에서 사용된 ‘택하심을 받은 부녀(여성 단수형)와 그의 자녀들’이 수신자들의 지역(가정)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여성형 단수인 에클레시아)를 의미한다면, 여기 마지막 절의 ‘택하심을 받은 너(단수형)의 자매(여성 단수형)의 자녀들’ 역시 또 하나의 지역(가정) 신앙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허주, 『그 말씀- 2001년 8월호』, 74쪽) 어렵게 표현한 이 주석을 쉽게 말한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요한서신의 저자 장로가 속해 있는 가정 교회 공동체에 있는 지체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수신자인 요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지체에게 안부한다는 말입니다. 자매는 교회 안에 있는 거룩한 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거짓 교사들이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을 현혹하고 이탈하도록 부축이지만, 요한이서 저자 장로는 교회 안에 있는 지체 간의 영적 소통과 연대를 통해서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본문 저자의 진정성이 12절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서 저자 장로는 수신자 교회 공동체의 자매들 즉 교회에게 이렇게 본인의 간절한 마음을 전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요한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글을 쓰고 있지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너희 공동체를 직접 방문하여 너희와 함께하는 것이며, 내가 가서 너희 공동체 지체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읽다가 울컥하는 구절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중의 한 구절을 교우들께 소개합니다. 로마서 1:13-1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로마서라는 대작을 고린도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대작을 쓴 바울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작 바울은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기에 일면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로마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인데 바울은 그런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이렇게 본인의 진정성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은 그저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정말로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형제와 자매들을 보지 못했지만, 나는 여러분이 보고 싶어 여러 번 로마로 가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지금은 길이 막혀 내 꿈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나는 반드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의 얼굴을 직접 대면해서 내가 진 사랑의 빚을 청산하고 싶습니다. 꼭 가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바울의 이런 간절한 소망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 성 멘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소망은 그가 순교를 위해 방문했던 로마에서 이루어졌기에 말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면에 담겨 있는 은혜가 고스란히 제게 임했습니다. 로마 교회 지체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었구나! 바로 이런 감동이 임했습니다. 사랑해 주는 지체가 있고, 기도해 주는 중보자가 있으며, 아파하고 함께 웃어주는 영적인 이웃이 있는 그 대상자는 정말로 복 있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바울로 인하여 로마 교회 공동체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든든히 서갈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림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보름스에 있는 루터 동상) 10월 29일 순례 둘째 날에 방문한 보름스 성당 지역에 세워진 루터 동상 그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걸었던 95개 조항의 면죄부 부당성을 알리는 포고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루터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소환 명령 장소는 교황의 심복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가 다스리던 보름스에 성당이었습니다. 루터는 이곳에서 칼 5세에 의해 심대한 겁박을 당하게 됩니다. 비텐베르크에 내건 95개 조항을 수정하든지 철회하든지 택하라는 압박이었습니다. 답변을 위해서 하루의 말미를 얻은 루터는 이윽고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가 외쳤던 소리를 담은 동상이 보름스 중심 광장에 세워져 있습니다.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COTT HELFE MIR! AMEN.” 번역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보름스 제국 종교 재판의 피고석에 앉아 있었던 루터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독백이자 기도였습니다.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열린 종교 재판은 자기의 뜻을 철회하지 않는 루터에게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이었습니다. 파문 교서인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I)가 루터에게 전달되자 루터는 이 문서를 찢어 불태움으로써 1521년에 스스로 출교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행동을 보인 루터는 위험스러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기에 추방 명령은 물론이거니와 궁극에는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 기정사실이었고, 루터가 지은 모든 책은 소각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위기에 처한 루터를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루터의 기도와 사역에 힘을 보태시기 위해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작센 지역을 통치하던 선제후 프레드리히 3세였습니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극약 선고를 받고 고향인 아이스레벤으로 돌아가 이제는 심판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았던 선제후 프레드리히 3세는 루터가 선언한 95개 조항에 지지를 표한 동역자였습니다. 루터의 위기를 알았던 프레드리히는 자기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루터를 중간에서 납치해 아이제나흐에 있는 자기 통치 지역인 바르트부르크 城으로 피신시켰고, 그의 신병을 확보한 뒤에 그곳에서 불가타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하게 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성공을 확보하게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루터를 돕게 하셨습니다. 프레드리히 3세는 루터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 한 동역자였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놀랍게 교회사에 나타난 격동했던 루터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오늘 본문에 주어진 은혜를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 일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일하십니까? ※ 그리스도의 피로 묶어진 공동체의 지체들을 서로 문안하게 함으로써 격려하십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읽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의 자매 교회의 회중 모두가 안부를 전합니다.” ‘문안하다, 혹은 안부를 묻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아스파제타이’ (Ἀσπάζεταί)의 문자적인 의미는 ‘환대하다’, 혹은 ‘영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원적으로는 ‘상대방에게 뻗어 내린 팔을 걷는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 팔소매를 걷었지만 싸움이 아닌, 이제는 한 몸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걷었던 팔소매를 내린다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유기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어디 한 곳이 아프면 다 아프다는 의미이겠지요. 이렇게 되려면 한 가지를 전제해야 합니다. 지체들끼리의 문안이 필수적입니다. 지체들끼리의 안부를 묻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앞에서 진술한 대로 바울은 로마 교회 교우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전했던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는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이 뜻을 강력하게 전합니다. 로마서 15:22-2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의 온 맘에는 로마 교회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한시도 그들을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은 바울은 로마서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엔딩합니다. 로마서 16:16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2일간, 교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동 거리도 만만하지 않았고, 방문해야 할 곳도 적지 않았습니다. 비좁은 이코노믹 클래스 비행기 안에서 오고 가며 이틀을 지내야 하는 곤혹도 경험했고, 개혁자들의 숨소리는 아직도 벌떡이고 있는 생동감이 제게는 있었지만 이미 방문한 곳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현장을 보아야 하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루터를 파문한 제국 회의 종교 재판이 열렸던 보름스 성당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507년 전에 이곳에서 외롭게 투쟁했던 믿음의 선배 루터의 숨결이 제게는 여전히 요동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란다고 절절하게 기도한 루터의 기도가 오늘 제 기도입니다. 하나님, 한국교회도 위기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나아가면 바로 여기에 있는 성당처럼 관광객들만이 들락날락하는 처소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시고 한국교회를 도와주십시오. 이곳 성당 게시판에 붙어 있는 주민을 위해 음악회 전시장으로 추락한 교회가 되지 않도록 주님, 이곳의 교회도, 한국의 교회도 다시 세워주십시오. 아멘.” 기도를 마치고 나서 웅장하지만 퇴락하여 볼썽사나운 공연장으로 변한 루터를 파문한 그 성당 안에서 저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어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따라 불렀고, 옆에 있었던 일행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생명을 다 빼앗긴대도/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찬양을 마치자, 저도 아내도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1521년 그러니까 504년 전에 루터가 파문당한 그 장소에서 루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문안했습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문안하는 일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적인 일이며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문안하며 영적으로 교제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일하시며 격려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오늘도 여전히 문안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문안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안에 우리 하나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그분 기뻐하시네 그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