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7일 507주년 종교개혁주일 설교 제목: 거짓말을 믿지 말라 본문: 예레미야 7:1-15 서론) 오늘은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하는 것 외에는 어떤 죄도 면제할 수 없다. 기껏해야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만을 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그러한 그의 사죄 권리가 무시되면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김동오, 『생사를 건 교회 개혁』, 규장, 195〜196쪽에서 발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걸었던 마르틴 루터가 작성한 95개 조항 중에 6번째 항목 내용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 모금을 위해 면죄부를 만들어 당시 불가타 성경(라틴어 성경)만을 읽게 했기에 라틴어에 대해 무지한 백성들을 노려 돈을 갹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젊은 사제였던 루터는 당시 절대권력 그 자체였던 교황과 제도권 가톨릭교회가 계획한 면죄부 판매의 비성경적 오류와 교회 권력에 반기를 들고 면죄부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를 낱낱이 고발했고, 더불어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교황 무오설까지 신학적으로 반박하는 성명서를 내걸면서 목숨을 건 종교개혁의 불씨를 던집니다. 2024년은 그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의 첫걸음을 뗀 지 507년이 되는 해입니다. 2020년에 습격한 코비드 19의 폭풍에 속절없이 교회는 3년간 휘청거렸습니다. 이 폭풍의 후과(後課)는 실로 너무 커서 이론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교회는 그로기 상태에 놓였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전,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약 60,000여 교회로 추산되었는데 펜데믹 3년을 지나면서 약 10,000 교회가 사라졌다는 교회 리서치 기관의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통계적인 분석입니다. 그렇다면 사역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데미지는 이보다 훨씬 다 강력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평가입니다. 우리 교회도 코로나 이전의 통계를 참고할 때, 젊은 계층의 5가정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이는 저를 위로하기 위해 이들은 코로나가 오지 않아도 떨어져 나갈 이들이었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따스한 말로 위로하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한 아픔보다 목사가 느끼는 더 큰 아픔은 저들에게 예수께서 나의 구주라고 수없이 말했던 메시지를 가슴에 담지 않았던 이들의 비극적 말로가 보여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세인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고백입니다. 이제 저들은 어제 새벽에 전한 갈라디아서 메시지에 담긴 그대로 무슨 말을 해도 귀를 닫아 버린 무감각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아프고 또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희망은 없는 것일까? 희망을 노래할 조금의 여백도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오늘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에 다시 한번 복기해 볼 만한 테제입니다. 본론) 저는 오늘 종교개혁주일 설교 본문으로 목사들이 많이 피하는 텍스트를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오전과 오후에 연이어 말씀을 전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오전에는 예레미야 7장으로, 오후에는 예레미야 26장으로 교우들과 만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temple sermon)라고 지칭되는 유명한 텍스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 내증 안에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오늘 본문 7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 있지만 26장에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텍스트입니다. 두 장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렇게 정리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우리가 살피는 7장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성전 설교의 내용을 알려주는 본문이라면, 오수에 볼 26장은 그 설교를 들었던 대상자인 유다 공동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적절합니다. 본문의 시대적 상황을 잠시라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과 병행 장인 예레미야 26:1절을 참고로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7장과 26장의 시대적 정황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가 이 내용뿐입니다. 정보는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하던 때에 예레미야의 설교가 유다 공동체에게 선포되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통상 예레미야 예언자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시기를 학자들은 주전 627〜626년(요시야 13년) 정도로 산출합니다. 우리가 역사서의 보고를 통해 아는 것처럼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과 할아버지 므낫세가 유린하고 망쳐놓은 남 유다를 다시 야훼 하나님의 나라로 거듭나게 했던 남 유다 역사상 몇 안 되는 하나님이 기뻐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요시야가 주전 609년에 애굽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므깃도에서 바로 느고 군대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유다는 수장을 잃고 다시 정치적, 종교적 나락에 빠지게 되며 급격히 멸망의 전조들을 보이며 몰락합니다. 그 복판에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있었습니다. 26장 1절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가 적시되어 있는데 여호야김 즉위 초라고 명시합니다. 여호야김은 609년에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었기에 주전 608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이미 남 유다의 역사를 직시하고 있는 이들은 선 이해로 알고 있듯이 여호야김은 아버지(요시야)의 유업을 이은 왕이 아니라, 할아버지(아몬)와 증조할아버지(므낫세)의 패역함을 따른 하나님 앞에서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무너짐을 알고 있었던 야훼께서 남 유다를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한 예언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전제할 때, 오늘 본문 7장과 오후에 살필 26장에 대한 이해가 수월해 집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에 들어오는 유다 백성들에게 특별히 전하라는 신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야훼께서 하명 한 신탁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적지 않은 고난을 당할 수 있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집 문에 서라고 예레미야에게 명하십니다. 이윽고 메시지 내용도 친절히 알려주셨습니다. 두 가지 메시지였습니다. ① 야훼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살게 될 거다. ②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메시지 자체는 충격이었습니다. 메시지 내용이 왜 충격이었는지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점령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북쪽의 패망은 남 유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남 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그들이 배웠고, 학습되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윗 왕조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왕조 신앙의 승리 확신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또 다른 하나는 시온 신앙의 불패라는 학습된 사상이었습니다. 시온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확신을 말합니다. 이런 종교적 절대 신념을 신앙으로 가졌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반이었던 북쪽이 속절없이 패망한 것을 옆에서 눈으로 보았기에 남 유다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 유다 백성들은 이제 남은 시온 신앙에 더 천착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우상화할 정도로 떠받들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우상적 열광으로 성전을 받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주전 701년의 기적이었습니다. 북쪽을 거머쥔 살만에셀의 앗수르는 산헤립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이제는 남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침공합니다.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약소국가 유다는 속수무책으로 북쪽처럼 나라를 빼앗길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46개 성읍이 점령당하고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읍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산헤립이 항복하는 문서를 히스기야에게 전하자, 히스기야가 그 항복 문서를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가 엎드려 유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성경은 이후 기사를 이렇게 적시합니다. 열왕기하 19:35-37절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구약학자들 사이에 이 구절의 역사성에 대해 설왕설래하지만, 문자적인 이해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 더불어 유다 왕조를 보호하심이라는 맥락에서 조금의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 팩트인 게 사실입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지! 라는 자문에 대답할 수 있는 아주 선명한 답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시온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는 소위 말하는 시온 신앙의 불패 영향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대단히 고무적이고 신앙적이며 이스라엘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신앙으로 무장한 유다 공동체를 향하여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하신 메시지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신봉하며 마치 우상단지처럼 받들어 섬겼던 성전이었기에 성전 만세삼창을 하며 들어가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하신 메시지가 이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야훼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발설할 수 없는 메시지를 예레미야에게 신탁으로 허락하신 야훼의 엄중함을 본문에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신탁의 메시지를 예레미야에게 선포하게 하셨을까요? 여호야김 치세의 영적 상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본문 정황으로만 살펴보십시다. 11〜15절을 이어 보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극악한 짓을 벌였어도 이 장소에만 들어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여기가 그런 범죄자 소굴이더냐? 너희는 나를 예배하는 곳으로 구별된 이 성전을, 그런 곳으로 바꾸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생각을 다시 하여라. 내가 보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똑똑히 보고 있다. 하나님의 포고다! 전에 실로에 있던 그 장소,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만나던 그곳을 찾아가 보아라. 그곳이 지금 어떻게 폐허가 되었는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악한 길로 갈 때에, 내가 그곳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보아라. 내가 거듭거듭 너희를 따로 불러 엄중히 경고했건만, 너희는 듣지 않고 가던 길을 고집했다. 회개를 촉구했건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나를 예배하는 곳으로 구별된 이 성전, 너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 믿고 있는 이곳, 내가 너희 조상과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던 이 장소에, 전에 내가 실로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일을 일으키겠다. 전에 실로 주위에 살던 너희 옛 친척과 지금은 사라진 북방 왕국, 너희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너희도 싹 쓸어버릴 것이다.” 요시야가 사망하자 여호야김은 아버지의 신앙을 종잇장처럼 찢었고,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그는 곧바로 아몬과 므낫세 행했던 탈 야훼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김의 반 야훼적인 행태를 하나만 단적으로 인용한다면 예레미야 36:23〜26절일 것입니다.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롯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엘리야김이 무너뜨린 야훼 신앙에 의해 유다는 하나님을 잊습니다. 말씀을 버렸고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과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처소에서 갖은 악을 행하고 그 악을 물리적으로 탕감받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시온 신앙에 마취되어 야훼 성전으로 몰려들어 성전 만세삼창하며 하나님께 긍휼과 복을 비는 어처구니없는 변질된 종교 집단으로 추락합니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주시며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내용이 앞에서 읽은 4절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더불어 쐐기를 박습니다. 8〜1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심장을 쥐어짜게 하는 구절이 몇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만 소개하라면 저는 주저없이 에스겔 8:6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에스겔 8:6절입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 버전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이느냐? 그들은 여기서 가장 역겨운 일을 하여, 나의 성소에서 나를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더 역겨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속에서 주께서 예언자가 주었던 가슴 아픈 말이 들리십니까? 이 구절에 기록된 이 번역이 가슴을 강타하는 것을 곧잘 경험합니다. “가장 역겨운 일을 하는 너희 때문에 내 집을 나는 떠날 수밖에 없구나!” 오늘은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왠지 모르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신탁하신 이 메시지가 내 교회와 한국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레마로 다가오는 불안감은 무엇일까요? 최승호 시인의 시를 한희철 목사께서 자기의 저서에 인용한 글을 읽다가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끙끙 앓는 하나님/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 떼처럼 불어나며/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123쪽 재인용.) 우리가 하나님을 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프지만 또 곱씹고 곱씹어야 하는 촌철살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시대에 야훼께서 신탁하신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한국교회를 맡고 있는 저와 그 교회를 섬기고 있는 그대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영적 교훈이 무엇일까요? 본문 5〜7절을 그 해답을 제시하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이 구절을 토대로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에 한국교회가 정신 차리고 회복해야 할 원색적 복음을 오늘 설교에서 차준희 교수가 해제한 글로 제시하면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볼까 합니다. “여기서 건물 성전(교회)을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는 조건에 제시된다. 이는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교회에 오기 전의 자신의 일상생활을 바로 밥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 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먼저 일상에서 자신의 길과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 일상에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약자를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일상이 서야 예배가 바로 선다. 공의와 정의가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 사회와 가정에, 그리고 한 개인에게 허울 좋은 종교 행위란 위선이요, 자기 속임수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차준희, 『예레미야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141〜142쪽)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에 세인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레마는 이렇습니다. ※ 밖에서 더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이 삶의 실천만이 다시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요, 내가 사는 길이며, 그대가 사는 길이고, 이 땅 대한민국이 다시 사는 길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십시오. 세상의 터전에서 엉망진창으로 살면서도 교회 안에 들어오면 탕감받게 될 거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용서하고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 유일한 주체는 교회가 주님이심을 한시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들이여! 증거를 보여라. 그 증거는 교회가 아닌, 네 처소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삶을 살아내는 것이니라!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종교개혁지 순례를 떠나면서 짧은 글을 하나 썼습니다. 몇 해 전, 작가 유시민의 『유럽 기행 Ⅰ,Ⅱ』를 섭렵했다. 철저한 무신론자가 본 아테네, 이스탄불, 로마, 파리에 대한 기행문에서 그가 피력한 이탈리아 성 베드로 성당 방문 후기에 이런 글이 있다. “바티칸 정원의 솔방울 조각상 앞은 인기 포토 존이었다. 교황이 여름 궁전 안마당은 대리석 조각과 부조가 가득했고, 여름 궁전과 대성전 사이에 놓인 회랑 벽은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걸어서 3분이면 대성당에 갈 수 있는데 교황이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이 회랑을 만들었다니, 광야와 장터를 걸어서 다녔던 예수님이 알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다.”(유시민, 『유럽 기행 Ⅰ』, 생각의 길, 145쪽) 나는 우리 세인교회와 한국교회가 성 베드로 성당처럼 무너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잠시 교회를 떠나는 외출이지만, 교우들에게 큰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더 행복한 기간이었으면 좋겠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주님 큰 영광받으소서 홀로 찬양받으소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 온 땅과 하늘이 다 찬양해 겸손하게 우리 무릎꿇고 주 이름 앞에 영광 돌리세 모두 절하세 독생자 예수 주님께 찬양드리리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