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주일 설교 (요한이서 세 번째 강해) 제목: 안과 밖 본문: 요한이서 1:7-11 서론) “봉건 시대에는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들은 모두 그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현인들은 말하기를 백성은 바다요 권세는 그 위에 뜬 일엽편주라고 했습니다.” (조정래, 『시선』, 해냄, 225쪽)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어서 그런지 소설가의 위상이 특히나 달리 보이는 한 주간을 보냈는데,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제가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 존경하는 소설가 조정래가 읊었던 통찰이 다시 큰 울림으로 다가와 설교 원고에 담았습니다. 요즘 정치하는 이들에게 추상같이 명하는 조종 같은 소리로 들리는 명언입니다. 조선시대라는 참담한 역사 안에 있었던 현인들이라면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이 무소불위하기에 안락하게 시대에 만족하면 될 터인데, 깨어 있는 지성들은 이렇게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고 살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시대에 깨어 있는 지성들은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 혹은 가치를 놓치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28쪽)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반 나치즘에 대항하며 투쟁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었기에 죽음의 길목에 있었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작가 프리모 레비가 남긴 촌철살인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극도로 조심하며 숨기려 했던 나치 치하의 도저히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될 만행을 고발하면서 전 세계인들을 일깨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지성적인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깨어 있던 한 사람이 고발한 문장 안에 담긴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끄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적 요소는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라는 점을 다시금 각인하게 해준 교훈이었습니다. 이제 시점을 우리에게로 돌려 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2024년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말했듯이, 소설가 조정래가 갈파했듯이, 적어도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사물 그리고 인간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영역의 핵심적인 가치를 깨닫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아름다운 삶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물며 가장 높은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장하게 사수하며 살아야 하는 영적 가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사수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오늘 요한이서 세 번째 본문은 이 점을 저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좋은 본문입니다. 본론) 요한이서는 주후 1세기에서 2세기로 막 넘어가는 시점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개진합니다. 그러니까 주후 100년에서 11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을 쓴 저자는 요한 공동체를 염두하고 썼을 것이 자명합니다. 요한일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사전적인 이해로 교우들에게 요한 공동체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 재론한다면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대교 공동체로부터 배교자로 낙인이 찍혀 그 공동체에서 출교 된 이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된 당시 그 멤버들과 축출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들, 예수가 사랑한 제자, 반-성전 입장의 유대인들, 사마리아 전향자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복음서 해석』, 대한기독교서회, 244쪽) 그러니까 요한 공동체는 주후 1세기의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틀 안에서 조망해 볼 때, 요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주류집단에서는 밀려났기에 소위 소외된 왕따 그룹이었지만, 그런 핍박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밑힘 삼아 신앙의 기개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견고함으로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아름다운 믿음을 기초 삼아 세워진 공동체인 요한 공동체에 세 가지 공격이 첨예했음을 요한이서 내증(內證)이 증언합니다. ① 유대적 율법주의를 끝까지 옹호하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과 침투였습니다. ② 여전히 위협적인 영지주의 사상이었습니다. ③ 로마 황제 숭배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요한 공동체 지체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세속적 이단들이었기에 그 싸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서 저자는 무시하지 못할 이단의 공격에 요한 공동체를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요한이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오늘 본문은 대단히 비장해 보일 정도로 문장들이 엄중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위에서 열거한 이단적인 세력들을 향해 저자는 세 가지로 이들의 정체를 규정합니다. Ⓐ 미혹하는 이들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 Ⓒ 적그리스도 아마도 미혹하는 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할 것이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적그리스도는 로마의 황제를 의미하기에 로마 황제 숭배자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한이서 저자는 이렇게 저들의 정체를 구분한 뒤에 아주 선명한 지침을 내놓습니다. 본문 8〜9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이 구절은 오늘 설교의 교훈으로 나가기 위한 귀한 초석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세 종류의 이단적 사상이 요한 공동체를 흔들려고 공격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에서 흔들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렇게 강권한 요한이서 저자는 또 하나를 강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훈에서 지나쳐 예수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합니다. 요한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훈 하신 그 교훈 안에 거할 것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밖으로 나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할 것을 재론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다바르’ (하나님의 조명된 말씀)라는 교훈 안에 거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씀 밖으로 이탈하면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되며,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게 된다는 분명한 입장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선 긋기를 선언한 본문 저자는 마지막으로 당부 겸 경고를 합니다.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미혹하는 이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 적그리스도들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만에 하나, 이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동하는 자, 역시 이단아들과 동일하게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들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우리 세인 공동체가 함께 말씀에 잇대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이 교훈은 올바른 경주를 하며 천로역정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예외없이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가치이자 신앙의 핵심적 요소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다바르’(דְבַר) 즉 ‘레마’(ῥήμα)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히브리어 ‘다바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가장 적합한 번역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제2 이사야가 전했던 신탁 중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0:7〜8절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가 여기에서 선포한 말씀이 바로 ‘다바르’입니다. 히브리어 ‘다바르’ 를 70인의 역이라는 헬라어 번역 구약 성경에 보면 이 단어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레마’로 번역했습니다. ‘다바르’가 무슨 의미입니까? ‘레마’가 무슨 의미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요 뜻입니다. 나에서 선포되었기에 들리는 말씀, 나에게 조명되었기에 적용되는 말씀이 다바르요 레마입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묵상한 성서 일과는 오바댜 1:17〜18절이었습니다.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수요일에 이 구절을 읽다가 가슴으로 받았습니다. 그날 저는 묵상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역전승이다. 에돔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할 때, 수수방관했다. 도리어 유다의 멸망에 대해 은근히 기뻐했다. 심지어 바벨론의 속국으로 유다가 점령당할 때, 그 틈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영토를 넓혔던 자들이 에돔이다. 하나님은 이를 대단히 역겹게 여겼다. 하나님은 오바댜를 통해 전하셨다. 에돔이 방관한 죄를 묻겠다고. 더불어 오늘 성서 일과는 유다의 회복을 선포한다. 완전한 회복이다. 수수방관한 에돔은 멸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될 것을 시사했다. 소위 말하는 역전승이다. 에서의 족속은 남은 자가 없겠지만, 유다 족속은 불꽃같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다. 그리스도인이란 역전승을 믿는 자들이다. 끝내는 이기게 하시며 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임을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들이다. 계시록은 21:3〜4절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유다는 외롭고 힘들었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역전승을 만들어 주시는 대상이었다. 반면, 에돔의 흔적은 자취가 남지 않을 거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철저한 역전승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10월 16일 묵상집에서) 적어도 지난 수요일 아침 마당에 내게 들려온 오바댜 1:17〜18절은 이강덕 목사에게는 ‘다바르’이자 ‘레마’였습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오늘 주일 예배에 나온 교우들에게 또 하나의 은혜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다바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레마’는 어떤 일이나 상황이 일어나도 변질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앞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역전승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요한복음 1:1〜3절은 증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4절은 연이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보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너무 명징한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서 역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즉 ‘다바르’이자 ‘레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은혜에 도달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누가 영적인 이방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영원하신 말씀 그 자체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의 주군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베드로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사야 40:6〜8절의 말씀을 재인용하면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순교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이렇게 남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음미하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지난 주간에 종교개혁지 순례를 앞두고 있기에 집에 있는 외국환 동전이 얼마나 되나 찾아 살폈습니다. 수년 전, 이요한 목사가 종교개혁지를 다녀왔을 때 집에 뇌 두고 간 유럽 코인들을 정리할 참이었습니다. 정리를 하다가 독일의 마르크 동전, 프랑스의 프랑 동전, 미국 동전 센트 등등 몇 개의 동전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횡재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동전 꾸러미 안에 1982년에 기념으로 사두었던 1988년 서울 올림픽 기념주화 1,000원 동전 하나, 2,000원 동전 하나 등 2개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시세로 개당 5,000원이라고 하니까 저는 20,000원을 확보한 셈입니다. 82년에 만들어진 주화니까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동전을 보니 이제 조각된 글자와 새김들이 희미하게 변색 되고, 흐려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42년이라는 세월에도 사람이 만든 것은 변하고 변색됩니다. 하지만 420년, 4,200년, 아니 앞으로 4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그 말씀 자체인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레마’와 ‘다바르’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좋아했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입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한 친구들과 웃음과 농담을 나누는 하루하루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담담한 일상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입니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제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을 막상 쓰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길을 잃기도 하고, 모퉁이를 돌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들어설 때 스스로 놀라게도 되지만, 먼 길을 우회해 마침내 완성을 위해 나아갈 때의 기쁨은 큽니다.”(10월 17일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전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발표문에서) 한강 작가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마치 살아 있는 ASMR 같은 나지막한 소리를 듣다가 오감이 열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주목하는 최애 작가인 한강의 글을 읽는데도 전율하는 감동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소회가 다시 임했습니다. 어찌 한강의 글과 ‘다바르’를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 요한이서 저자는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독자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바르’와 ‘레마’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주 같은 분은 없네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내 생명 다하도록 주 얼굴 만구하리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