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4) 제목: 절반은 절반일 뿐입니다. 본문: 야고보서 1:5〜8 서론) 연휴 기간, 하늘에서 쓰레기가 폭격했습니다. 한차례 폭격이 끝나면 그다음에 또 폭격하고, 끝나면 또 폭격하는 모양새를 띠며 융단 폭격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올케가 전에 말해주었는데, 도르래(바퀴)가 달린 눈 치우기 기계가 있다고 하는데 구입해야겠어요. 이러다가 우리 몸 절단 나겠어요.” 이야기를 듣고 연휴 기간이지만 혹시 문을 연 곳이 있을까 해서 시장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 너무 가격이 비싸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바퀴가 달린 눈 치우기 기계, 누가 고안해 만들었는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작권 상표 등록을 할 정도로 기발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가리켜 머리 좋은 사람, 아이디어 창출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 등등으로 지칭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지칭하여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라는 단어는 단지 세속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붙여주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해 조금은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5절을 나누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직설했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그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이유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야훼 하나님은 그 지혜를 후히 주시는 분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꾸짖지 않으시는 분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지혜’라는 단어를 구약성경은 ‘호크마’(חָכְמָ֣ה)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신약성경은 ‘소피아’(σοφία)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공통 분모는 영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컨대 이 말씀이 적절합니다. 잠언 1:7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대단히 명징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들이 삶의 내용마다 남기고 있는 흔적 중에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식입니다. 삶의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식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온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을 획득하지 못한 실패한 자에게 임하는 결과가 있음을 잠언 기자는 고발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재앙은 지혜와 지식을 멸시하는 삶이라고 적시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지식의 충만함이지만, 그 반대에 있는 자들에게는 지식은 물론, 지혜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결국 지혜와 지식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선물임을 알게 해줍니다. 사정이 이러니 내게 지식이 없고, 지혜가 없다면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기에는 이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5절을 만나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지혜를 다시 찾는 방법은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지혜를 반드시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지혜가 모두에게 허락된 일이 아님을 저자는 밝힙니다. 대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본문 6절을 주목하십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기도자가 취할 태도는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독자들을 향해 주저함 없이 선포하고 선언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구하십시오. 기도해 놓고 염려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물결과 같습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야고보서 1:6』 이성으로 이 선언에 아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에 이 구절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기도 제목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이후에 흘러가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으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지적한 내 마음에 그대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이 출렁임을 수도 없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 기도하고 있는 나를, 또 기도했던 나를 그렇게 무너지게 하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매우 아프고 쓰립니다. 그렇다면 왜 상황에 무너집니까? 욕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요한복음 15:7절에 기록된 구절을 뼛속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구절은 우리 세인 지체는 물론, 2025년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교훈이자 죽비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고별 설교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이기에 더더욱 깊이 성찰해야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저를 비롯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 15:7절에 아멘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15절 후반절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렇게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성경에 또 있으랴 싶을 정도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축복의 비 같은 구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룰 것이라는 이 구절의 후반절은 이토록 우리를 열광시킵니다. 하지만 정작, 저를 비롯한 현대 크리스천이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는 부분은 15:7절의 앞부분입니다. 아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요한복음 15:7절 후반절은 기도 응답의 조건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해 줄 것이라는 열광하게 만드는 위로 메시지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이 말씀을 대단히 시의적절하게 해석한 신앙의 선배가 있습니다. 사막의 은둔 수도자였던 샤를 드 푸코입니다. 샤를 드 푸코의 말을 한 번 귀담아 보십시다.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나(주님)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주님)를 사랑할수록 더 잘 기도하게 된다. 기도란 나(주님)에게 사랑의 눈길을 고정시킨 마음의 자세다. 그 마음에 사랑이 차 있을수록 기도는 훌륭해진다.” (샤를 드 푸코, 『사하라의 불꽃』, 바오로딸, 216쪽) 그렇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주님의 이 선언을 단세포적인 표현으로 대체한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을 철저하게 사랑하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주님을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무엇이든 응답하실 것입니다. 복불복이 아니라, 반드시 주께서 응답하시는 요소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8절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야고보서 기자는 영혼의 죽비를 가차 없이 내리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윽박지르는 영적 폭력이 됩니다. 혹여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런 기도가 응답되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 즉시로 지옥이 됩니다. 본문 8절에 기록된 한 단어가 음습하게 설교 준비하는 종에게 다가왔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헬라어 원어 성경에 이 단어는 ‘뒵쉬코스’(δίψυχος)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어를 원문의 의미로 풀면 ‘두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나라 말로 대입하고자 할 때 생각나는 적절한 단어가 있습니다.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양다리를 걸쳐서는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 나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러한 행위는 범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두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 마음을 쪼갠 절반의 마음이 두 마음이라고. 절반은 절반이지 하나의 완성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26장은 예레미야 7장과 더불어 독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 말기인 여호야김 치세 시기에 유다의 멸망을 선포한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라 표현한 이유는 그는 야훼께서 말하라고 알려준 메시지가 바로 조국의 멸망이라는 메시지였기에 매국노로 몰려 수없이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며 눈물을 흘린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26장은 예레미야가 당했던 핍박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운 긴장되는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서슬이 시퍼렇게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26:2〜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주 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있는 유다의 멸망과 남 유다인들의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성전을 저주 거리로 만들겠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엄중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성전에서 듣고 있던 자들은 다름 아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고 맹렬히 비판하며 공격합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 26:10〜11절입니다.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예레미야를 살려두어선 안 되는 위험인물로 낙인찍어 그를 살해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남 유다 여호야김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이 밝힌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입지를 예레미야가 흔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은 甲이었고, 예레미야는 전형적인 乙이었습니다. 시작부터 게임이 성립되지 않는 기울어진 구조였고, 상대가 안 되는 라이트급과 헤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사정이 이 정도가 되면 그만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단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6:14〜15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묵상하겠습니다.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두 마음을 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말씀에 한 마음으로 올인한 예레미야를 통해 감동을 받습니다. 이 구절을 해석한 차준희 교수의 해제가 나에게 깊이 다가왔습니다. “보통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시대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인간 예언자는 그 말씀 때문에 분명히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어 받은 말씀을 ‘순화’ 내지는 ‘완화’시키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메시지 번형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거나 자기 편한 대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메신저는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그것이 말씀 봉사자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주어진 말씀의 왜곡되는 순간부터 그의 사역도 왜곡되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정체성을 잃는다.” (차준희, 『예레미야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450쪽) 목회자에게 현타로 오는 아픔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선포하라고 조명하신 ‘다바르’를 가감 없이 전달하면 곧바로 내치는 비극의 시대가 오늘 내가 섬기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자, 민낯이며 자화상이라는 아픔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 현타에 두려움을 느껴 예언자적인 소리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타협한 이들이 잘 차려 놓은 축복의 진수성찬 메시지에 중독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영적 마비에 빠져 매몰되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의 아픔입니다. 절반의 메시지에 열광하는 시대는 희망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절반의 메시지는 온전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반의 메시지는 그냥 절반입니다. 절반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이 마음을 두시지 않습니다. 문서 예언자들이 사역하기 이전, 문서 이전 예언자들이 구전을 통해 발했던 사자후들이 오늘 우리에게 전수되어 왔습니다. 저는 그중에 엘리야가 선포한 메시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메시지’ 번역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소리쳤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팔짱만 끼고 있을 셈입니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 면 그를 따르십시오. 이제 여러분의 마음을 정하십시오!” 백성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절반의 마음만 야훼 하나님께 둔 자들은 팔짱 끼고 하나님이 이기면 그에게 기생하기로 눈치 보는 대단히 사악한 자들입니다. 절반은 절반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내버려 두십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절반의 믿음이 있다면 돌이키십시다. 절반의 믿음이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범죄 행위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지극히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대에게 아름다운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선언합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땅 덮을 때 우린 땅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