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흔들리지 않기(1)2024-07-13 14:08
작성자 Level 10

2024714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두 번째 강해)

 

제목: 흔들리지 않기(1)

본문: 요한일서 3:18-24

 

서론)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86)

10년 전에 읽으며 개인적으로 엄청난 감동을 받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제 2그룹 주인공인 프란츠가 애인인 사비나에게 던진 말입니다.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이끌어 왔던 가장 초기 투쟁인 체코에서 일어났던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무력 개입으로 무산됩니다.

이 시기에 체코의 지식층 인텔리 여성이자 유명한 화가였던 사비나는 자신의 조국에 불어닥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항하고, 자유분방한 삶으로 자신의 억제된 욕구를 발산합니다.

그 욕구 발산의 통로로 스위스 출신의 의사인 프란츠 택해 자유분방한 사랑을 요구하지만, 이성주의자였고 나름 규범적인 인간이었던 프란츠가 그런 사랑을 거부하자 사비나가 못마땅하게 생각해 애인 프란츠에게 신경질적으로 압박하며 자유분방한 사랑을 강요합니다.

이런 순전히 작위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사비나에게 프란츠가 남긴 명언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문장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

목사로 살면서 저는 이 문장에 매료되었습니다.

힘으로 사랑을 강요하거나 압제하는 것이 사랑일까?

폭력을 사용하여 사랑하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아닙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죄에 가깝습니다.

힘을 전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 주는 도전은 참으로 큽니다.

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은 힘이 전제된 사랑입니다.

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을 갖고 하는 사랑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사랑은 작위적으로, 가공적으로 행하셨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사랑은 사랑이 속성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주일을 시작으로 몇 주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를 알아보고 추적해 보겠습니다.

 

본론)

 

요한서신 저자는 수신자들을 향하여 몇 가지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권면을 본문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19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에서 곧잘 체감하고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서 먼저 저자는 밝힙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책망하는 자책의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저는 저자의 말에 십분 동의합니다.

왜 나는 이 정도밖에는 안 되지?

나는 해도 해도 왜 날마다 실패하지?

내 신앙의 수준이 바닥이네! 등등의 자괴감에 심하게 나를 자책하는 경우를 빈번하게 경험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갈등이 내게 내재적으로 엄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내재적 갈등에서 허덕일까요?

그건 아마도 죗성으로 인해 주어지는 죄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저자는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 마음을 다시금 다잡이하는 방법이 있다고 진술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2022절을 봅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 구절에서 알게 되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첫 번째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

그렇습니다.

이 믿음의 부재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나를 책망하고, 나를 영적 우울감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을 견지하는 자는 어느 상황이 되더라도 즉 앞에 있는 여러 불안에 접한다고 하더라도 요동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주군께서 그 불안함까지고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내 삶의 전반을 잘 인도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렇게 읊조린 것은 정답입니다.

시편 139:15절을 노래해 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코로나 19시기에 우리 교회는 수요 저녁 예배 시간을 이용해 욥기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고 학습된 지식 안에 있는 욥에 대한 인상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 모든 시험을 이긴 끝에 고난으로 잃었던 재산과 가족 모두에 해당하는 복을 배나 더 받은 인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 팩트를 전부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욥기에 안에 들어 있는 욥의 변증 장면을 만나면 어떤 경우에는 욥이 정말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취하는 자가 하나님이심에 대해서도 당연한 일이라고 감사하며 동의한 자가 맞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면이 너무 많습니다.

그 대표적 실례인 욥기 30:1623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욥은 작금 본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의 제일 원인자가 하나님이라고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욥은 밤마다 자기의 뼈가 쑤시고 아프며 이로 인해 내 생명이 녹아내리는 고통이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 고통을 나에게 준 장본인은 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며 그는 나를 진흙 가운데로 던져버렸고, 나를 재같이 만들었다고 고발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그분은 내가 나의 고통을 호소했는데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나를 돌보지 않고 잔혹하게 했다고 고발합니다.

결국 그분은 나의 대적이고, 나를 던져 버려 나를 죽게 한 제일 원인이라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적어도 욥에게 모든 고통을 안겨 준 배후 조종자라고 성토한 것입니다.

담임목사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아십니까?

욥은 불만이 없이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이고 이긴 자라는 말이 어불성설임을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지녔던 욥에게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드디어 38장에 욥을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하나님께 힐문하고 불평을 쏟아넣고 있는 욥에게 38:1-11절에서 이렇게 재차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느냐? 정신 차려라, ! 일어서거라! 똑바로 서라! 몇 가지 물어볼 테니 제대로 대답하여라. 내가 이 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아는 것이 그렇게 많다니, 어디 말해 보아라! 누가 땅의 크기를 정하였느냐? 네가 모를 리가 없겠지! 누가 그것을 설계하고 치수를 정했느냐? 새벽 별들이 일제히 노래하고 모든 천사들이 소리 높여 찬양할 때, 땅의 기초는 어떻게 놓였으며 그 주춧돌은 누가 놓았느냐? 아기가 태를 열고 나오듯 바닷물이 터져 나올 때, 누가 그것을 감독하였느냐? 바로 나다! 내가 그것을 부드러운 구름으로 싸고 밤에는 어둠의 이불로 안전하게 덮어 주었다. 그 다음에 바다의 활동 구역을 정해 줄 울타리, 빠져나가지 못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고 바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머물러라. 여기가 네가 있을 곳이다. 너는 이 안에서만 사납게 날뛸 수 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욥기, 38:1-11)

욥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부었지만, 욥을 만드셨고, 욥을 위해 여타 다른 것까지 만들어 놓은 주님은 욥의 상황을 몰라라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위를 갖고 그를 안전하게 덮고 계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욥을 이렇게 안위하셨을까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욥보다 욥을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욥에게 오셔서 그의 무지함을 깨닫게 해 주시자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던 욥이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욥기 42:16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구절을 여러 번 접하지만, 접할 때마다 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 자신보다 욥을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감동입니다.

이게 어찌 욥에게만 국한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은혜이며 감동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의 여행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들이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반드시 지녀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무장한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민중 시인 신경림이 쓴 시 한 편입니다.

갈대-신경림 (윤동주 외 59, 매일, 시 한잔-두 번째, 북로그컴퍼니, 158)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아주 가끔, 목사인 저는 교우들의 현장을 마음으로 방문합니다.

그리고 방문하며 눈을 감습니다.

아무개 장로님의 현장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로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상황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나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연상하고 지켜 달라고 화살기도 합니다.

이윽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그리고 교우들의 현장을 차례로 방문하며 갈대처럼 수없이 흔들리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체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며 중보하곤 합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상처 당하지 않도록,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응원합니다.

왜 이렇게 긴장하며 삽니까?

신경림 시인이 말했던 시어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알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의 중보가 교우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교우들에게 오늘 주일에 담임목사의 중보는 비교조차가 안 되는 또 다른 은혜를 전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로마서 8: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주께서 가나안 땅에 입성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격려하셨습니다.

신명기 1:30-31절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2 이사야를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유수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노래하며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43:4-7절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은퇴 기념 출간 도서에서 아직은 은퇴를 하지 않고 현직에 있는 내게 주는 귀한 성찰을 받아 밑줄 그어놓았던 글이 있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면 채권 의식은 줄어들고 채무 의식이 커집니다. 갚아야 할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고백의 언어들, 복 있는 사람, 202)

저와 여러분은 나보나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받게 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한 가지는 잊지 말고 우리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 세인 지체들이 겸비해야 할 첫 번째 은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이 땅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