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홈커밍데이 주일 설교) 제목: 너무 좋은 교회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1-10 서론) 새결 교회 이상선 목사에게 며칠 전에 소식이 왔습니다. “고대 병원 진료를 다녀오는 일정이 있었네. 잘 지내셨는가? 수술이 필요한 상태지만 그렇다고 아주 심각하게 급한 것은 아니니 좀 더 두고 보자고 하네. 올 연말이나 내년 봄쯤 재검사를 한 후 그때 다시 의논하기로 했네. 고마우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지난번 심각한 상태에서 친구가 고비를 넘긴 것 같아 안도했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적지 않게 염려하며 중보해 주시고 있음에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신학교 선배가 은퇴를 하신 뒤에 『목회자 서로돕기운동연합 더조이유니언』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상황이 있는 선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올 초에 선배가 사역하는 연합회에서 이상선 목사의 아픈 소식을 듣고 이상선 목사를 방문해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경제적인 지원도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달 말에 페이스북을 통해 선배께서 이상선 목사를 심방하고 난 후의 후기를 올린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중에 이 글이 너무 따뜻하게 남았습니다. “이상선 목사는 일어설 힘이 없는 자신의 병약한 처지를 힘겨워했다. 당연하다.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의 벗으로 일생을 그것도 독신으로 살았다. 구원의 표준과 근거인 작은 자의 신음에 감응하는 삶을 그는 훌륭하게 살아냈다. 그 선천적 고질병에 운명 같은 일생을 시달리면서도 이름도, 빛도 없이 꿋꿋이 주께서 주신 먹보와 술꾼들의 벗 된 사명을 몸바쳐 감당해 왔다. (중략) 이 시대의 사역자 중에 이상선 목사만큼 몸 바쳐 사명에 충성한 사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땅에는 입만 바친 유명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미지만 바친 빛 좋은 개살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몸까지 내어준 이상선 목사. 그렇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전생과 온몸을 바친 작은 예수다.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나사렛 예수도 십자가에서 능욕당한 실패한, 망한 죄수였다. 예수 때문에, 예수 같이 망한 이상선 목사는 이 땅에서 자기상을 받아버린 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명자다.” (김성찬 목사의 페이스북 6.25자 글에서) 선배의 글을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아직도 숨을 쉴만하게 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너무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이렇게 좋은데 하물며 좋은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서 맥추감사주일 아침에 좋은 교회에 대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바울 사도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아주 중요했던 도시인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아주 의미 있는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에게 전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이 알려줍니다. 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케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이 구절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메시지는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는 구절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 메시지가 무슨 내용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출처가 되는 사도행전 17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참 매력적인 본문입니다. 목사의 직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한번 목회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참 감동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2차 전도 여행을 통해 아름다운 사역을 3주 동안 잘 감당했습니다. 세 사람이 전한 메시지를 사도행전 17:3절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무엇을 생각나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핵심인 캐리그마입니다. 이들이 전한 것은 쓸데없는 신변잡화와 같은 비본질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전한 메시지는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7: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자 그 안에 있었던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까지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일이 발생했음을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보고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의 복음을 3주간 전하며 가르쳤던 장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었습니다. 17:4절의 보고는 이 회당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다는 자료 보고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헬라인들 중에 상당수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셈입니다. 유대교 공동체 안에 있었던 데살로니가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으로 진입하자,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었던 골수 유대인들이 이 일을 그대로 좌시할 리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 살고 있었던 골수 유대인들과 그들이 고용한 불량배들이 집단적으로 야손의 집으로 몰려가 그곳에 은신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끌어내어 데살로니가 지역의 시 치안관에게로 강제로 끌고 가서 그들을 고소합니다. 고소한 고소장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7:6〜7절을 소개합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주목할 고소 내용입니다. ⓵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이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잠입했다. ⓶ 야손이 그들을 환영하여 영접했다. ⓷ 이들이 영접한 이유는 유일한 임금인 가이사가 아닌 다른 임금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치안감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정치적인 잣대로 고소했지만,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라고 치부하여 보석금을 받는 실리를 챙긴 뒤에 이들을 석방했다고 사도행전 저자가 보고하는 것으로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일어난 바울의 사역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사역하며 데살로니가 지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소위 말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들입니다. 바울의 전도팀은 이렇게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다시 복음으로 무장시킬 요량으로 고린도에 도착하여 이윽고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의 전도팀은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세 가지의 이유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글을 보냅니다. 칭찬의 세 가지 이유를 데살로니가전서 1:2〜5절이 보고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미 설교의 서두에서 살펴본 그대로 데살로니가 사역의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고 뜨거웠는지 보았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서 신앙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의 전도팀이 격려하는 메시지는 100%가 아니라 1,000%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바울 팀은 전언을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보여준 소망의 인내를 떠올리며 밤낮으로 기도합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몹시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안수하셔서 특별한 일을 맡기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메시지는 그저 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안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확신을 강철 같게 해주셨습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데살로니가전서 1:2〜5』 얼마나 뜨겁고 감격스러운 격려입니까? 이렇게 격려한 바울의 전도 팀은 조금 더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을 거론하며 칭찬합니다. 6〜8절을 읽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지체들이 보여주었던 결정적 칭찬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였습니다. 이 세 가지의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로 인해 부수적으로 야기된 결과물이 있음을 바울 팀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가 보여주고 있는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보고는 단지 데살로니가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남쪽에 있는 아가야를 비롯해서 서쪽에 있는 마케도냐까지 선한 영향을 미쳐 아름다운 소문이 전염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동시에 이 광활한 두 지역 말고도 인근 각처에 골고루 퍼졌음을 밝히며 그 자랑스러움을 바울 전도 팀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오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강력하게 시사하며 끝을 맺습니다. 9-10절은 『메시지』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야기해 주더군요. 여러분이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 준 것과, 여러분이 지난날 섬기던 죽은 우상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받아들여 섬기게 된 이야기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장차 닥쳐올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놀라워했습니다.”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가 인근 각 처에서 귀한 교회로, 좋은 교회로 소문나서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 좋은 교회는 예수께서 믿음의 역동을 이루고 있는 주체인 교회입니다. 언젠가 모 장로님과 충주를 다녀왔습니다. 장소를 이동하는 데 거리에 있는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회 이름이 선명했습니다. “참 좋은 교회” 교회 이름을 보던 그분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네 교회가 참 좋은 교회면 다른 교회는 참 나쁜 교회냐?” 웃자고 한 소리이겠지만 생각에 따라 그런 오해를 할 수 있겠다 싶어 속으로 웃었습니다. 교회 이름이 좋은 교회면 좋은 교회가 됩니까? 물론 그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그 교회의 이름이니까 좋은 교회를 만들고 되기 위해서 힘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는 이름을 좋은 교회라고 지었다고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교회의 분명한 정의는 예수께서 그 교회를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교회인 이유는 예수께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난날 섬기던 죽은 우상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역동하신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 예수께서 장차 닥쳐올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주임을 믿도록 주체적으로 역동하시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바로 그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랬기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갖고 종말론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주 예수께서 교회 전체에서 역동하는 교회, 그래서 그 예수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잡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고 그 교회는 너무 좋은 참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엇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 고향을 찾아온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공교회의 롤-모델로 자리매김하는 세인 교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지난 주간에 CBS PD로 일하고 있는 정혜윤 작가의 글을 여행했습니다. 그는 정말 지독한 독서광인 그녀는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합니까? 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내놓았습니다. “책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애를 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책, 오래 기억에 남는 책도 존재합니다. ‘삶이 사건’이 된 책입니다. 제게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같은 경우입니다.” (정혜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민음사, 2024, 171-172)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다가 나에게 감정이입이 된 책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영화를 보다가 나에게 적용된 영화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말한 말에 감동을 받아 그 말이 내 인생에 사건이 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즉 삶이 사건이 된 그 사건 말입니다. 신앙의 여정 중에, 천로역정의 여행 중에 내 삶에 사건이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천하를 어지럽힐 정도로 나와 내 삶의 여정 안에서 경험했던 랜덤의 삶을 전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나를 주체적으로 역동하여 변화시켜 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나를 전인적으로 이끄시는 압도하시는 은혜를 시분초마다 경험하게 하는 은혜가 아닙니까?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이런 역동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전히 움직이는 참 좋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오늘 고향을 찾아오신 교우들이 섬기는 교회는 물론, 여러분의 고향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참 좋은 교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결론) 시 구절 하나 읽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신경림 외 72명,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창비시선 500특별 시선집』, 창비, 2024, 149쪽) 김용택 시인의 『사랑』이라는 시에 담긴 소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아름답고 귀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이야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울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세인 교회가 참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들이 좋은 성도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발아래 무릎 꿇고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