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한 번째 강해) 제목: 마땅하니라 본문: 요한일서 3:13-17 서론) 지난 화요일, DPA 6기 목회자들을 위한 강의 案에 담아 놓은 시 하나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통곡의 벽 안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에서』, 문학과 지성사, 60쪽) 이 시를 쓴 시인 황지우는 1952년생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땅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들을 직접 관통하며 체감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민낯으로 경험했던 그였기에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할 때마다 이렇게 시대의 아픔을 시로 녹여냈을 것이며, 그 하나가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있었던 역사적 전쟁은 1952년생인 황지우 작가가 본 가장 슬펐던 이야기로 보입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싸워야 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력이나 물리력에 있어서 한없이 작았던 팔레스타인은 비극의 비극을 당했습니다. 그 중의 가장 참담한 비극은 애꿎은 자식들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아픔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자식이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죽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참극 앞에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어머니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체감했을 것입니다. 황지우 시인은 이런 어머니들의 한을 시어로 통곡해 주었습니다. 그가 전한 시어는 참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통곡의 벽 안쪽이 어디입니까? 지금,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고대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던 헤롯 성전의 서쪽 문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은 이스라엘이 실질적 지배권을 갖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한 그 벽 밖은 어디이겠습니까? 이슬람교도들이 성지로 여기고 있는 황금 돔 쪽의 벽일 것입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팔레스타인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는 영역의 벽입니다.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인들의 통곡은 합법화하고 합리화하면서도 그 반대에 있는 팔레스타인들의 아픔은 외면하는가에 대한 비판일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2024년에도 이런 말이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황지우 시인의 시어들은 혹 예지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왜 황지우 시인의 시 한 소절을 소개했을까요? 세속의 논리는 이렇게 갈라치기를 하는 논리임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런 갈라치기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 세속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논리와 하나님의 식은 그 반대라는 점에서 감동과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감동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본론) 본문 13절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한일서 저자는 일갈합니다. 저자는 요한일서의 수신자인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세상이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한복음 저자가 그의 서신서에서 예수님의 답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정말로 선명한 해답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너희 자체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속해 있는 나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직설하셨습니다. 더불어 예수께서 세상이 있는 너희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C.S. 루이스가 기록한 글에서 오롯이 체감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순간 놈(예수)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봐라. 오랜 상처에서 딱지가 떨어져 나간 듯, 조개껍데기처럼 흉측한 허물을 벗은 듯, 젖은 채 몸에 착 달라붙어 있던 더러운 옷을 영원히 벗어 던진 듯 시원했을 게다. 제기랄!”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82쪽) 사탄이 세상에서 한 명의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께서 돌아가 구원받았을 때의 상황을 객설한 탄식을 기가 막힌 문학적 어법으로 루이스가 소개한 글을 읽다가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했다’는 요한복음 저자의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요한일서 저자의 말도 강력한 교훈으로 버젓이 다가온 게 사실입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3절) 저자는 이렇게 일갈한 뒤에 연이어 중요한 신앙적 팩트를 던집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세상의 식은 이렇습니다. 세상의 형편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다고 전합니다. 도리어 형제를 미워함으로 계속해서 형제를 살인하는 형국이라고 직설합니다. 결국,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영생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며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음으로써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과는 그 반대의 길에 서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요한일서 저자는 천명합니다. 그 방법을 본문 16〜17절이 답해 줍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이 구절은 『메시지』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것을 보고, 우리는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곤경에 처한 형제나 자매를 보고서, 도울 방법이 있는 여러분이 그들을 냉대하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 되겠습니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답이 명징하게 보입니다. 세상의 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본문에서 요한일서 저자가 수신자인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선언한 내용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실천하고 고스란히 적용해야 하는 사명이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인이 사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참극을 ‘하나님의 사랑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라고 적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사랑해야 합니까? 이 땅에서 사랑이 식어 지게 하고, 심지어 사라지게 하는 사탄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4:12절은 마지막 때의 암울함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이런 불법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켜가야 하는 하나님의 식을 본문은 선포합니다. 다시 본문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사랑함은 갈라치기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제한적 사랑함이 아닙니다. 이 사랑함은 내 운동장으로 기울어진 자만을 사랑하는 이데올로기 식 사랑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분명하게 명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랑하여 목숨을 버린 이유의 대상자들이 ‘우리’라는 복수였다는 것을. 오늘 목양터 마당에 쓴 글을 설교에서 복기해 보십시다. “‘너’는 ‘나’와 마주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111.) 그렇다면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랑함은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쓴 그대로입니다. “목회란 ‘너’라는 또 다른 ‘나’와 마주 서서 관망하지 말고 ‘너’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함이란 ‘나’라는 존재가 ‘너’라는 낯선 이의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지난(持難)한 일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의 이기성은 이 지난함을 더하게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너’라는 존재가 더 두터운 갑각으로 무장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녹록하지 않을뿐더러 두렵기까지 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특명하신 사랑하기는 그런 시대니까 ‘너’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하시는 하명(下命)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세속적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사랑함은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울음까지도 보듬는 사랑입니다. 통곡의 벽 이쪽의 울음도 보듬고, 통곡의 벽 저쪽도 보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제가 설교할 때 빈번하게 인용하는 텍스트입니다. 디베랴 호수로 낙향하여 고기 잡는 어부의 직으로 돌아간 자들은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익명의 또 다른 제자 둘까지 합쳐서 총 7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들이 예수님께 자행한 범죄 이력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체포당하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한 죄였습니다. 그중 베드로는 가중 범죄자였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자이니 그렇습니다. 그런 자들과 주님이 재회한다는 것은 그들도, 주님도 상쾌하거나 흔쾌하게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과 7 제자들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재회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나’가 제자들이라는 ‘너’에게 걸어 들어가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디베랴 호수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순종하여 153마리의 고기를 잡은 뒤에 그렇게 명하신 분이 자기들이 부인한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요한복음 21:12절은 충분히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그리고 지금 그분이 자기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현존하심은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 하시고 그것으로 요리를 한 뒤에 제자들에게 떡과 함께 주시면서 다시 성찬식을 집례하셨습니다. 성찬식과 조반을 마친 주님은 이윽고 그 유명한 두 번째의 미션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두 번째 소명을 주시면서 하셨던 세 가지의 질문은 문구의 차이가 약간 있기는 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이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서 주님이 질문하신 사랑하느냐? 의 단어 변천은 이렇습니다. 아가페→아가페→필레오였습니다. 저는 주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실 때 던지신 단어의 변천을 만날 때마다 가슴 뭉클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베드로의 눈높이까지 내려가서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셨다는 감동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2024년 표어 그대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라는 표어처럼 바로 그런 주님의 의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세인 지체들도 너무나 당연히 접목해야 하는 영적 교훈을 6월 마지막 주일에 받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나’라는 존재가 ‘우리’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는 교훈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택일의 내용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며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유하 시인의 『슬픔이여, 좋은 아침』이라는 시를 낭독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에게 휴식이란 없다/그는 늘 고통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외출을 한다/벌새의 분주한 날개를 타고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은/언제나 몸 밖을 떠돈다/상처보다 깊은 어둠의 노래와 함께/하여, 어느 날, 그대를 찾아온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일도/그대 영혼을 만날 수는 없었으리”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열림원, 42쪽) 시를 읽다가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렇다는 소회 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에게 휴식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인의 말 그대로 사랑함으로 인하여 느끼는 고통에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그 민감한 삶의 흔적 속에 있는 자가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날이 도래할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보다 깊은 어둠과 함께 노래해야 하는 예민함이 있기에 쉴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말한 도발을 읊조리다가 반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