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1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세 번째 강해) 제목: 흔들리지 않기(2) 본문: 요한일서 3:18-24 서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워 주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열매들이 살찌도록 부추겨 주소서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주시고, 크나큰 완성을 이루도록 해 주시며,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줄곧 홀로 있을 것이며, 잠 못 들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요, 낙엽이 바람에 불려 갈 때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정현종,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 문학판, 44쪽) 제 기억으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그 유명한 『가을날』이라는 제목의 시를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시 전문입니다. 기억이 맞다면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순수 서정시인으로 구분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가 순수함과 결별했기에 오는 반사적 성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을 음미할 때마다 저는 목사라는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그런지, 릴케의 언어가 너무 아름다운 기도로 들립니다. 말 그대로 때 묻지 않은 새벽이슬 같은 청명함을 시어에서 느낍니다. “열매들이 살찌도록 부추겨 주소서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주시고, 크나큰 완성을 이루도록 해 주시며,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해 주소서.” 압권입니다. 릴케의 시를 만날 때마다 다가오는 대리적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 기도다. 기도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어야 합니다. 욕심이 내재 되어 있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무당들이 행하는 푸닥거리에 불과합니다. 김기석 목사가 말한 기도의 정의를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준 삼아 조율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한계상황을 만날 때만 엎드리지 않는다. 그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는다.” (김기석, 『내 작는 영혼의 흔들림』, 신앙과 지성사, 14쪽)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신앙의 여정에서 흔들리지 않는 두 번째 방법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신앙의 여정 중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나누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나눈 은혜는 하나님이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음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은혜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21〜22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2절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다는 이 구절에 대단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21절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현대인의 성경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친구 여러분, 그렇게 마음을 살핀 뒤에 더 이상 우리가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으면” 저는 이 구절이 바로 기도자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기도자의 모습은 양심이 증거할 수 있는 올곧음입니다. 이 올곧음은 곧바로 김기석 목사가 성찰한 그 모습이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나는 내 기도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기도가 혹시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수단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나는 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있는지 민감해야 합니다. 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준 삼아 조율하고 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적어도 나는 내가 급할 때만 하나님께 SOS 요청을 하는 극히 1차원적인 기도자인지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나는 내 삶이 기도인지를 내 영혼의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런 올바른 기도의 태도와 올곧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 백성이라면 한 가지를 확신해도 됩니다. 다시 본문 22절 전반절을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 구절이 나에게 접목되는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들에게 설교 제목이 임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은혜입니다. 흔들리지 않기에 22절 후반절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일, 내 기도가 응답받음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내야 할 대 전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살아내야 합니다. 로마서 12:2절을 나눕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의 역설은 대단히 공격적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삶, 변화되는 삶, 하나님의 속성인 선함과 기뻐하심과 온전하심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합니다. 수동적 태도를 취하지 말고, 이런 일에 소극적이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치열할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로마서는 불신자에게 전한 편지가 아닙니다. 당대 최고의 도시라고 하는 로마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캐리그마를 믿고 그를 구주로 고백한 로마 교회 성도 공동체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이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일입니다. 왜 그런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안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서 1:24〜2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도시 안에 창궐했던 동성애가 로마 교회 안에도 들어와 버젓이 날개를 치고 활보하는 상황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도시의 문화는 철저히 남성중심적이었던 사회 구조였습니다. 정식으로 결혼한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에게 식상하면 얼마든지 외도할 수 있는 시대의 풍조가 주후 1세기 로마였습니다. 그런 일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불륜이 상식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버려지고 성적인 사랑도 받지 못한 아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다른 여성을 성적 만족의 도구로 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대도시에는 여기저기에 레즈비언들이 넘쳐났습니다. 진보적 성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의 비판적 성찰은 동성애를 지로 지적하기 전에, 당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소외받는 여성들의 인권과 삶의 자유를 먼저 살피는 것이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일이지, 동성애를 한다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자들의 태도가 아니라고 맹공합니다. 이런 진보적으로 성찰하는 이들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입니다. 더불어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는 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해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삶의 정황을 이해하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방법을 제시하고 인도하며 올바른 삶의 길로 견인해야 하는 일을 교회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을 저 또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의 동의는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것을 멈추라는 공격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 교회를 향하여 동성애를 용인하는 일부의 위험스러운 태도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저는 바울의 비판적 성찰 중에 가장 두렵고 공격적인 지적이 바로 ‘내버려둠’이라는 하나님의 ‘유기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버릴 정도로 싫어하는 카드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범죄였습니다. 다시 오늘 설교의 강조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서 안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들었지만, 우리 성도들이 주목하고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그리고 기뻐하는 삶이며, 그 삶을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원하는 삶, 기뻐하시는 삶에 대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면 그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거론하지만, 성도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담대하게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은 당연히 흔들리는 신앙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오롯이 든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화려한 언어 수사가 아니라 삶이라는 조명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사해 부근에서』 표현했던 그대로 갈릴리 사람들과 아픔을 같이 하면서 수없이 많은 핍박과 린치를 당했지만, 끝까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갈릴리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A,J, 크로닌이 『천국의 열쇠』에서 선포하고 싶었던 그대로 타락한 종교 정치에 기생하여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갔던 안셀름 밀리 신부의 삶이 아니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많은 죄로 점철된 인간의 군상들 안에서 같이 거하면서 끝까지 현장 사역자로 좁은 길을 걸었던 프랜시스 치셤 신부의 길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응답받는 삶의 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주간 출간되는 담임목사의 다섯 번째 졸저인 『신-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추천의 글을 써준 사사기 전문가인 전성민 박사의 글 맥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이 책 『신-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2』를 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모든 이들이 영적 분별력을 잃지 말고 살자는 의도"라고 말합니다. 제목이 웅변하는 대로 사사 시대는 지나간 시대가 결코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에 저자가 의도한 대로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들이 영적 분별력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분별력을 함양케 되기를 바랍니다. 당혹감으로 시작했지만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이어진 저의 경험을 다른 독자분들도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단순한 성경 해석서나 신앙 서적을 넘어, 우리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키는 고민스럽지만 특별한 여정으로 초청합니다. 저자의 40년간의 목회 경험과 인문학적 통찰이 어우러진 이 책은 우리가 “신-사사 시대”의 황폐함 속에서도 하나님 손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분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알아보는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그 안내를 잘 따라갈 때 “내 소견”이 아닌 한 분 “주군의 뜻”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힘들지만 묵직하고, 어렵지만 도전이 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박사의 추천 글에 감사한 이유는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를 너무 정확하게 파악하고 글을 써 주었다는 감사였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출간되는 다섯 번째 저서를 집필하면서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모든 이들이 영적 분별력을 잃지 말고 살자는 의도”입니다. 나는 이 삶이 바로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삶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결론) 책에서 읽은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한 남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는 평생을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당신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그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서부터 하와이까지 다리 하나를 놔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든지 제가 원할 때 신나는 휴가를 다녀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뭐,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 달라고?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때 당장 얼마나 심각한 환경 파괴가 일어날지 생각해 봤느냐? 그러지 말고 다른 소원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남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기도 제목을 바꾸었다. “주님, 그렇다면 제게 여자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무엇이 여자를 화나게 하는지, 왜 여자들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어떻게 여자들의 기분이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이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주겠다.” (한홍, 『기도, 하늘의 능력을 다운로드 하라』, (생명의 말씀사, 98쪽) 한홍 목사가 자기 저서에 이 풍자적인 글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심리나 내면의 뜻을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에두름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오늘 본문은 너무나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들이 응답받았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냄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세인 교회 지체들이 흔들리지 않는 영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도를 드리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를 향하여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쓰러져 가는 자에게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가득 채워 주시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