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19:11-20 제목: 말씀이 힘입니다. 서론) 2024년 4/4분기 독서반에서 함께 나눌 텍스트인 C.S. 루이스의 걸작 중의 걸작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 대단히 적나라하게 파헤친 수작입니다.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지시하고 교육하는 형식으로 31개의 조항을 만들어 기술하고 있는데 31개의 내용들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을 파멸시키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면교사를 삼고 경종할 아주 유익한 요소들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우들에게 21번째 내용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바람은 이왕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와 무엇무엇’이라는 심리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슨 소린지 알겠지? 기독교와 위기, 기독교와 신심리학, 기독교와 신유의 역사, 기독교와 심령 연구, 기독교와 채식주의자, 기독교와 맞춤법 개혁 같은 걸 찾게 하라구. 어차피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적어도 무언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야지. 신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 다른 색채를 띤 유행들을 들어 앉히거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감정을 파고 들라 이 말이야. 알겠니?” (C.S. 루이스,『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144쪽) 곱씹으면 소름 돋게 만드는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루이스가 왜 이렇게 진단했을까요? 여러 가지 함의를 담고 있는 진단이겠지만, 큰 그림으로는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계략”입니다. 성도들이 빗뚫어지고, 빗나가는 원인은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말씀 외의 것들로 대체하고 싶어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겨우 붙잡아 목숨을 간신히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 신자가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는 그는 소리를 쳤습니다. “누구없으세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누구없어요?” 그러자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 여기에 있다.” “누구세요?”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 “살려주세요.” “그래, 염려말고 손을 놓아라. 내가 구원해 주마. 손을 놓아라” 그러자 그는 조금 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 다른 분 없어요.” 어떤 이가 교훈적으로 만들어낸 예화일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지만 참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교훈적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신앙공동체에 대단히 강도가 높게 다가온 타격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무기력한 그 어떤 존재로 폄훼하게 한 일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 무기력한 하나님이라고 매도하는 공격이 교회를 휘감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100년 전, 하나님이 쓰셨던 하나님의 사람, C.S, 루이스의 예고대로 하나님 말고, 그 어떤 다른 것을 요구하기 십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 어떤 보이는 초자연적인 그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었고, 말씀보다도 심리적으로 만족을 주는 그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는 기독교 플러스 알파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영적 기상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심령에 새겨야 할 영적 촌철살인을 곱씹는 은혜를 가져보려 합니다. 본론)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어떻게 주의 사역을 감당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정보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어가 사역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제자들을 만났다고 서술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을 원문에 ‘마쎄테스’로 기록한 것을 보면 ‘마쎄테스’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자들에게 쓰는 단어인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은 분명 에베소 안에 존재하던 그리스도인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세례에 대하여 묻습니다. “너희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제자들이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자, 바울은 그들에게 받은 세례가 어떤 세례였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그러자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의 세례를 위해 바울은 그들에게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19:5-6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에베소에서 살고 있던 공동체의 형제들이 드디어 성령세례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체험을 한 이들이 12명 쯤이라고 보고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감동의 사건 이후를 증언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 3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자 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바울에게 공권적인 힘을 가하며 핍박합니다. 예수의 도를 전하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이런 핍박을 당한 바울은 핍박하는 자들을 떠나 회당에서 두란노서원으로 사역지를 옮깁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나 강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9절은 보고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주제절이라고 할 수 있는 10절을 살펴야 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 구절은 대단히 놀라운 신앙적인 혜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에베소 회당에서 바울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핍박을 피해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말씀을 2년 증언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역을 감당한 2년 여 동안 일어난 일들이 누가는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 헬라인 상관없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는 일이었다고 보고합니다. 단순히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 몰려들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뛰어넘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가 헬라인으로 통칭되는 전형적인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역설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란노서원에서 증언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능력이 확산되자 그 다음에 일어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본문 11-12절이 가감없이 보고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 구절에 대하여 대단히 엄격하고도 세밀한 성서적, 신학적 해석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병든 자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악귀들도 축사하며 영적인 능력을 행했다고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물론 역사를 일으킨 도구는 바울입니다. 하지만 본문 11-12절의 주어는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일으키신 주체는 사람 바울이 아니라 주군이신 하나님이심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 자신에 세운 교회에서 여러 명의 여신도들을 성추행한 일이 인정되어 형을 살고 있던 자가 수감 생활 중에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 질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가진 자가 자기라는 점을 부각하면 엄청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언젠가 한 번, 그가 동남 아시아에 행했던 집회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했는데 우연히 그 영상을 보다가 오늘 본문의 상황을 연상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퍼포먼스 전에 그가 전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행했던 신유 집회를 통해 병에서 고침받은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 외에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옷에서 꺼낸 손수건을 만지는 자는 심각한 질병에서 치유 받는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설하자 상당히 많은 이들이 그 손수건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며 달려드는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영상을 통해 흘려나왔습니다. 그날, 그 장소에서 그 집회를 인도한 자는 하나님의 권세라는 이름을 도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광신의 길로 인도하는 살아 있는 거짓 된 신이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사도행전 19:11-12절에서 보고하고 있는 신유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 자가 인도하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일하시는 에베소 지역의 현장은 놀라운 감동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영적 은혜를 앞에서 언급한 누구처럼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13절에서 보고하고 있는 마술하는 유대인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말하는 자도 생겼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마술하는’이라고 번역한 ‘엑소로키스테스’의 원 의미는 ‘무당 짓거리’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무당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 흉내내는 샤먼적인 말 그대로 무당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 그들이 흉내내는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짓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일례를 본문이 소개합니다. 유대인 제사장으로 알려진 스게와의 7명의 아들들도 무당처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샤먼적인 퍼포먼스를 자행합니다. 그러자 누가는 이번에는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소상히 소개합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임한 강력한 재앙은 에베소의 영적 환경을 뒤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산재한 도시 중에 가장 강력했던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지역이었기에 이방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던 에베소에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물결이 넘실거리게 됩니다. 에베소에서 거주하던 이방 신상을 숭배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적 회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로만의 회심이 아니라, 행동하는 회심이 이루어졌음을 누가는 본문 19절에서 보고합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갖고 있었던 부적 같은 책자들을 아고라에 가지고 나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에 태웁니다. 누가는 불에 태운 책들의 가치를 은화 오만 드라크마라고 정의합니다. 화폐가치로 은 1드라크마는 성인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이런 가치로 정산한다면 은 오만 드라크마는 성인 한 명이 173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어마무시한 가치에 해당합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가치에 해당하는 마술 및 이방신을 섬기는데 소요되었던 책자들을 불에 태운 것입니다. 말 그대로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변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누가는 오늘 본문 마지막 20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리하여 주의 말씀은 줄기차게 퍼져 나가고 점점 더 세력을 떨쳤다.” KJV 흠정역 번역본은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자라고 세력을 얻으니라.” 마지막으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를 보십시다. “이제 에베소에서 주님의 말씀이 최고이자 대세인 것이 분명해졌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대단히 역동적인 은혜를 맛보곤 합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신 바울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누가에 의해 적절하게 먼저 언급된 기사가 두란노 사원에서 2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강론했다고 적시한 점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10절을 다시 봅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그렇습니다. 두란노 서원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술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던 저들의 현장에서 바울은 수많은 이적을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뤘습니다. 결국 에베소 전 지역은 공동체의 회심이 일어났고, 그 결과 주의 말씀이 최고의 대세가 되었음을 누가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현장 안에 있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삽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며 사는데도 수없이 회의하고, 갈등하고 넘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등돌리며 살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왜 이런 일이 다반사로 내 삶에서 일어납니까? 말씀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믿은 경력은 있어서 흉내내는 신앙은 갖고 살지만, 속 마음에는 말씀보다 더 현실적으로 나에게 복이 되는 말씀 플러스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말씀 플러스가 나를 만족시킬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넘어지면서 신앙 하나 가지고는 안 된다고 설레발을 떱니다. 적나라한 현대 크리스천들의 민낯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 하나로 충분한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교묘한 공격에 쉴 새 없이 넘어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아이든 토저가 이미 이렇게 일갈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큰 걱정 중에 하나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그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러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재미 삼아 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면 우선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든 토저, 『말씀이 힘이다.』, 규장, 93쪽) 지난 주간에 작가 공지영씨가 쓴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여행했습니다. 작가는 지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섬진강 지류인 하동으로 귀촌해서 살고 있습니다. 책 앞 부분에 하동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경험한 에피소드 하나를 전해 줍니다. 동네에서 어느 개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개가 관광객들이 오면 태워주는 당나귀 등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서 개 주인에게 왜 개를 당나귀 등에 올려놓는지를 물었더니 거기에 올려놓지 않으면 울어서 올려준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매일 그 개를 보면 하루 종일 뙤약볕이 쬐는 한 낮에도 당나귀 등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옴짝 달싹하지 못하며 쇠약해지는 것을 본 뒤에 의아하게 여겨 다시 집요하게 물었더니 주인이 그 개를 당나귀 등에 올려 놓는 이유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돈벌이의 수단임을 알게 됩니다. 작가는 분노했고, 개 학대를 멈추라고 항의하자 결국 개 주인은 심한 욕설로 작가를 공격했고, 작가는 그를 폭행혐의와 개학대 혐의로 고발해 결국 법적 다툼이 일어났는데 결국 합의하여 그 개를 작가가 키우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작가는 이제 견주가 되어 개를 기르다보니 개가 그 동안 방치되어 개의 암이라고 하는 심장사상충 4기에 걸려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돌보고 간호한 덕분에 지금은 건강하게 생존하게 되어 작가의 말벗 역할을 톡톡이 하고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원 주인의 방치와 무관심으로 개 한 마리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주인의 개를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 개는 다시 생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글을 읽다가 목사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방치하여 무관심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집요한 집중력과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말씀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좌우의 날선 검보다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우리들의 영, 혼,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은 말씀에 관심을 갖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와 혜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힘인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 플러스입니까? 아니면 말씀입니까? 새벽에 일일마다 기도하는 제목을 텔레비전 화면에 세팅해 놓고 교우들과 기도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는 우리 세인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머리를 숙입니다. 그 중에 마지막 10번째 기도 제목이 오늘 본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세인교회는 말씀이 흥왕하여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 표어가 우리 교회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인 교우들이 말씀이 힘인 것임을 믿을 때 가능해 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시인은 일찍이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시편 119:105-107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금요일에 아제르바이젠에 거하는 집사께서 잠시 고국에 들어왔다가 모친을 모시고 제천을 방문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중보해 주는 동역자인데, 어제 제천에 방문하여 오랜만에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제 끝에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얼마 전에 강해를 마치신 느헤미야 설교를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듣다가 화들짝했습니다. 느혜미야 안에 담겨 있는 영적인 목소리를 목사님이 치열하게 준비한 설교를 통해 듣다가 정말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안에 잠기는 복이 제게 있었습니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도전주시는 목사님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은? 여러분은 말씀이 힘입니까? 여러분에게 말씀은 능력입니까? 혹여나 여기에 있는 분 중에서 그래도 내겐 말씀 플러스가 필요해! 라고 독백하는 자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에베소를 진동시켰던 말씀이 선포되는 진원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은 오만 드라크마를 불태우는 집단적, 공동체적인 회심이 일어나는 보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말씀 플러스에 목매어 매일 덕지덕지한 영적인 그로기를 경험한 자들은 이제 그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며 내 삶을 마감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훼 하나님이여, 나를 말씀으로 녹여주셔서 말씀으로 내 삶을 변혁하게 하옵소서! 라고 외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세인교회에서 배츨되기를 권면합니다. 말씀은 유일한 힘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라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 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