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내 식(式) 내려놓기 본문: 누가복음 9:51-56 서론) 지난 주일 설교에서 잠시 업급했던 C.S, 루이스의 갈파를 오늘 설교와 연관이 있기에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개중 간단한 방법은 원수(하나님)를 바라보고 있는 환자(그리스도인)의 시선을 그 자신에게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환자(그리스도인)가 제 마음속만 줄창 들여다보며 자신의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게 만들어라. (중략) 너는 환자가 바로 그것-자신이 만들어 낸 그것-에 대고 기도하도록 붙들어야 한다. 만에 하나 환자가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을 향해 의식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시에는 우리(스크루테이프와 웜우드)는 즉시 궁지에 빠지게 된다.”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33,35 쪽) 20세기에 이 정도로 영적 전쟁을 적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C.S. 루이스는 천재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근 35년을 부대끼다 보니, 너무 선명하게 다가온 깨달음이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영적 전쟁의 형태가 분명하다는 깨우침입니다. ‘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내려 놓게 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의 영적 전투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후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게 참 유감입니다. 나는 결코 전자의 사람이 아니라, 후자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전자에 목을 맨 갑각류 크리스천의 자리에서 결코 내려오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아픔이자, 병입니다. 오늘 우리 세인 공동체에 속한 우리 모두는 본문을 통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전자인지 혹은 후자인지 정직하게 밝히는 은혜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론) 예수님은 당신 사역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지향하셨던 사역의 중심이 주류 즉 기득권자들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비주류에 속한 자 즉 나약한 자들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유추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사역의 동선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시기로 결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계획하셨던 구속사 성취라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을 인지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결심하셨음을 마가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고도가 800미터입니다. 반면 갈릴리는 해발고도가 –200미터나 되는 곳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마가복음 기자가 51절 본문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라고 표현한 ‘올라가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약 180KM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있어서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숙제였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영국 에버딘 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하워드 마샬은 이렇게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지역적 상관관계를 설명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레자들은 으레히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갔다. 도보로 사흘 걸리는 여행길이었다.” (하워드 마샬, 『국제성서주석-누가복음 Ⅱ』,한국신학연구소, 28쪽) 문제는 이렇게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경원시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4:9절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서로 경원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종하지 않는 대단히 관계가 좋지 않은 상태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바로 이 때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여정은 마샬의 말 대로 사흘 길이었기에 반드시 숙박을 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불편한 것을 감안하여 52절에 기록된 일을 명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사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앙겔로스’ 즉 상당히 많은 경우 ‘천사’로 번역되는 ‘전령’인데 이 단어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심부름꾼’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도착하기에 앞서 불편하고 거북했던 일들을 극소화하기 위해 파송되었던 자들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간의 불편한 관계를 절충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겨 예수를 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을 알게 된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즉 ‘불의 아들들’이라는 별칭 답게 예수께 과격한 제안을 합니다. 본문 54절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대단히 완곡한 어법으로 개역개정판 성경은 번역하였지만 원문에 가장 근접하게 번역한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선조인 엘리야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하시야의 사이에서 행했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아합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십니다. 다락 난간에 올라갔다가 낙상하여 중상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을 진 아하시야는 정신을 못 차리고 블레셋의 한 지역이었던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파리)을 섬기는 자들에게 자기 부하들을 보내 내 병이 낫을 수 있는 병인지를 알아보게 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의 일을 심히 악하게 보시고 엘리야에게 하명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의 명대로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주군인 아하시야의 생사를 묻고 돌아오는 사자들에게 아하시야를 하나님께 치셔서 죽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자, 아하시야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을 엘리야에게 보내 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권능을 보이시기 위해 살해를 위해 파견된 아하시야의 군사 오십명을 두 번에 걸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즉결처분합니다. 이 스토리를 확연하게 알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자고 주께 청한 것입니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누가복음 9:54절에 이런 부록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한 것 같이 우리가)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야보고와 요한은 혈기충만한 태도를 갖고 자기들이 모시고 있는 예수께서는 충분히 그런 권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주께 요청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심지어 이성적인 함수관계로 접근하자면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로 거부하신 점은 그 의미가 심대해 보입니다. 본문 55-56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두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돌아보시고’ 와 ‘꾸짖으시고’입니다. ‘돌아보시고’로 번역한 헬라어 ‘스트레포’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구절은 누가복음 22:61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가야바의 뜰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이 구절에서 베드로의 마지막 부인이 끝났을 때 에수께서 보이신 반응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스트레포’입니다. 결국 ‘스트레포’는 참담한 절망을 느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에 주님은 아마도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한 때였기에 적어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 함께 3년이라는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주님께 양육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을 내려 사미리아를 초토화시키자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시고 주님은 참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제자들이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두 제자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청을 받은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었다고 마가 기자는 기술합니다. ‘꾸짖다’라는 헬라어 단어 ‘에피티마오’는 문자적으로 ‘멱살을 잡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주께서 얼마나 분노하셨으면 제자들의 멱살을 잡고 야단을 쳤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단호하게 경책한 뒤에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였음을 마지막 56절이 보고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교우들에게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본문 이해를 진행하면서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주님이 하시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조명받을 수 있었습니다. ※ 신앙이란 내 식을 파쇄하는 것이다. 더 과격한 언어로 표현한다면 내 생각이라는 내 식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몽골 선교사인 이용규 선교사의 어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내 식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나눈 텍스트는 마가복음 9:38-39절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면서 병자들로 치료하시고 제자들을 삼으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인기가 극에 달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승승장구하셨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방문하신 곳에 가보니 어떤 일련의 무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들을 내쫒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합니다. 가만히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독단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갖고 귀신을 제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답게 주님께 자신이 행한 일을 자신감 넘치게 보고합니다. 귀신을 내쫒는 일을 금지시켰습니다. 주께서 칭찬을 기대하는 요한에게 주님은 전혀 다른 책망섞인 말을 던지셨습니다. 금지하지 말라. 마가복음 9:39-40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요한에게 내린 주님의 결정타였고 쐐기박기였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은 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금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내 식을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금하지 말라는 주님의 식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난 주, 사업체 심방 중에 지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신앙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주님이 가시도록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신앙의 패러다임을 2024년에는 이렇게 바꾸며 기도하며 달려가겠습니다. 제가 하나님 손을 붙들고 제 쪽으로 오시도록 강제했던 일을 하나님이 제 손을 붙들고 이끌어가시는 쪽으로 제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지체의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 지체에게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집사님, 이제 집사님이 조금씩 성장하고 자라고 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신앙의 길을 잘 걷도록 제가 중보하겠습니다.” 지난 주간, 교제했던 한 지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피택 권사로 선정해 주셨을 때, 다가온 부담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사역자로 서기 위해 더 철저히 결심한 것은 새벽예배의 영성을 추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제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말씀 쪽으로 가려고 몸부림 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 새벽에 주시는 말씀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받고 있습니다.” 감동의 감동이었습니다. 지체들에게서 공통분모를 발견합니다. 교묘하게 포장하여 내 식이 마냥 내 신앙의 보루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던 자아들을 복음과 말씀의 능력으로 파쇄하고 있다는 있다는 공통분모입니다. 내 식을 내려놓고 있다는 공통분모였습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 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를 주님이 ‘스트레포’ 즉 돌아보시며 절망한다는 것을. 그리고 ‘에피티마오’ 즉 멱살을 잡으시고 꾸짖으시며 그 포장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것을 강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미국 서밋 교회의 담임목사인 J.D. 그리어 목사에 관한 특집으로 CGN 방송에서 방영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가장 큰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남침례 교단에 속한 목회자입니다. 미국교회가 펜데믹 기간 동안 약 4000개 정도 문을 닫는 재앙을 경험했는데, 서밋 교회는 그리어 목사의 탁월한 목회자 리더십에 따라 게속 성장하고 있기에 약 1000개 정도의 강한 소형 교회를 개척했다는 보도를 보고했습니다. 그가 현재 밀물처럼 다가오는 교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을 방송에서 언급했습니다. 복음의 식을 사수하라고 전하면서 이렇게 사자후를 던졌습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것과 복음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꿀이 달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달콤함이 살아 터져나오는 것은 다르다.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복음의 진리가 당신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복음이 무엇인지 안다고 폼잡은 겉 멋든 신자에서 벗어나십시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아 아는 자는 내 식을 과감하게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식으로 갈아탑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식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 식을 파쇄하고 내려놓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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