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당신은 어떤 예배자입니까? 본문: 누가복음 17:11-19 서론) 오늘부터 몇 주 동안 강해 설교를 중단하고 제목 설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강해 설교의 집요함에 비해 제목 설교는 그 치열함이 조금은 떨어질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하겠습니다. 교우들은 기대함과 사모함을 갖고 설교를 듣기를 바라며, 또 그 가운데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노량’을 관람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느끼는 감동은 어떤 면에서 100편의 설교보다 그 감동이 크다고 말한 영화평론가 하정완 목사의 지론대로 그 날 영화를 통해 받은 교훈은 제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영화는 각색된 것을 연출해서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량 역시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이다보니 그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옥죄며 다가왔습니다. 명나라 원군의 수장이었던 진린과 일본의 수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서로 밀착해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바로 그 긴장의 순간, 이순신 장군이 했던 대사를 영화는 고스란히 큰 울림이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일본까지 쫓아가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 어떤 이는 이런 이순신 장군을 지칭해 전쟁광으로 호도하고 있지만, 저는 1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왜 피를 흘리면서까지 일본과 끝장 승부를 내려 했는지는 2024년의 오늘의 역사가 그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이어질 일본이라는 나라의 동물적이며 야만적인 국가적 근성을 뿌리채 뽑아야 한다는 장군의 일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사임을 알기에 나는 영화를 관람하면서 장군의 호기스러운 일침에 많은 박수를 보내며 영화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영화 중에 제게는 잊지 못하는 영적 감동을 준 영화 하나를 추천하라면 주저없이 쇼생크 탈출을 거론할 것입니다. 팀 로빈슨이 분(扮)한 앤디 듀프레인은 바람 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채 종신형을 언도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반드시 보상 받기 위해 자신의 방에서 수십년 동안 벽을 뚫고 파낸 탈출구로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뒤에 교도소에 만난 동료인 모건 프리먼이 扮한 레드가 가석방으로 출옥하자 그에게 이전에 써놓았던 메모지를 알려준 장소에 묻어 놓았는데, 그 메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Remember, Red.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 (명심해요, 레드. 희망은 좋은 겁니다.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죠.) 저는 젊은 시절, 목회 현장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대사를 곱씹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서곤 했습니다. 두 편의 영화를 소개했지만 제 인생의 동반자로 나를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준 영화, 책, 사람, 사건들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다시 세워주고 일으켜준 것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동이라는 분모입니다. 본론) 저는 앞서 저를 감동시켜준 것들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감동은 결정적으로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군이신 하나님 앞에서 단독으로 서서 예배할 때 주시는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감동입니다. 며칠 전에 지체에게서 긴박한 중보 요청을 받았습니다. 듣고 보니, 마음 고생이 심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부탁을 받자마자 서재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중보했습니다. 긴박한 기도제목이고, 경우에 따라 중보 대상자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기도 요청을 한 지체에게 대단히 큰 실망감과 자괴감이 들 것이라는 시급함이 느껴져 긴급하게 지체를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성서일과를 묵상했는데 그날 제게 주신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8:1-3절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목사만이 느끼는 확신과 감동은 주님이 이것 저것으로 역사하시는 일하심을 느낄 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에 지체가 간절히 소망했던 기도 제목이 응답받았음을 전언해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감동은 이루말 할 수 없는 감동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전하고 싶은 레마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이 공급받을 수 있는 감동의 최대치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임을 잊지 마십시다. 이 일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공급받는 감동은 엎드릴 때 일어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에서 사역하실 때 일어난 일을 누가는 소개합니다.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레위기(레 13:45-46)에서 제정한 그대로 건강한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고, 동시에 그들만의 집단적인 공동체를 이룬 곳에서 거주해야했던 제약 때문에 그들이 주님께 찾아올 때도 대단히 위험한 상황과 마주칠 수 있는 위기감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소망, 한센병에서의 치유라는 그 목적을 위해 주께서 나아옵니다. 그들은 주님은 물론 그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했기에 누가는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하지만 멀리 서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목표가 흔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께 자신들의 질병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하심으로 치유를 전제한 하나님의 권위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내려갔다고 의사 출신인 누가는 보고합니다. ‘가다가’라고 번역한 헬라어 ‘휘파게인’은 시제가 미완료 동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동사적 상태가 이루어지기 이전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적용한다면 한센병 환자들이 제사장에게 내려가는 어간은 질병이 치유되기 이전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려가던 어느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의 질병이 고쳐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누가는 알려줍니다. 이제는 우리는 오늘 설교의 주제절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 17:15-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0명 사마리아 출신의 한센병 환자 1명이 길 가던 중에 이미 자기의 질병이 나은 것을 보고 제사장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즉시 예수께서 돌아왔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그가 와서 행한 일은 몇 가지였습니다. ⓵ 예수께로 돌아왔다. ⓶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 ⓷ 감사했다. (개역판 버전: 사례했다.) 저는 누가복음 17:15-16절 말씀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입니다. 이미 아는 것처럼 10명의 한센병 환자는 정말 운이 좋게 예수님을 찾아온 바람에 천형이었고,저주받는 질병으로 알고 있는 한센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후속 기사를 보면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알게 되는데 돌아와 주님 발아래에 엎드린(예배한) 사마리아 출신의 한센병 환자에게 주께서 궁극적으로 행하신 강복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유독히 그에게만 주님이 구원을 선포하셨다는 점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께서 사마리아 출신의 환자의 무엇을 보고 구원을 선포하셨을까요? 답을 제시하기 위해 마크 뷰캐넌의 통찰을 한 번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서 돌아오는 것을 예배라고 평했다. 나는 좀 더 나아가 그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395쪽) 이렇게 예배라는 단어를 도입한 뷰캐넌 목사는 오늘 2024년 1월 14일 주일에 이강덕 목사가 하고 싶은 말을 책에서 대신 전해주는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도 가슴에 멍이 들도록 새겨야 하는 금언입니다. “경계지역에는 전에 문둥병 환자였다가 깨끗해 진 자들, 그러나 예수께서 명하신 길로 결코 걸어가지 않는 자들, 그래서 마치 늙은 퇴역 군인들이 전투 경험담을 나누듯, 예수님을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을 받았던 날의 향수에 젖어 사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그들은 예수님과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 받았던 날, 그들을 온통 휘저어놓고 확신을 주던 믿음, 그들의 입으로 내뱉었던 믿음을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지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 다시 돌아오는, 경이로움에 붙잡히는, 찬양하고 감사하는, 새로 얻은 힘을 온전히 이용하여 그들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습관을 배양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대제사장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 (위의 책, 395-396쪽) 2024년 두 번째 주일부터 몇 주 진행하는 제목 설교의 설교 제목을 “당신은 어떤 예배자입니까?”로 정했습니다. 왜 이렇게 정했을까요? 아모스 5:21-24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미가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와 맞물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때 북왕국은 하나님 신앙에서 이탈하여 극도로 타락하고 방종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생활 형편이 좋아지고 먹고 사는 것이 편해진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엔조이의 시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하나님 신앙을 문화로 전락시킨 북쪽은 급속도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흉내내기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흉내는 제사드리기였습니다. 북쪽 백성들이 그 동안 학습되어 왔고, 세뇌될 정도로 듣고 행해져 왔던 하나님께 절기를 맞이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성회를 열었습니다. 제사와 성회를 열어 번제를 드리고 소제를 드렸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화목제를 드리기도 합니다. 성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바파와 수금도 탑니다. 말 그대로 대단히 웅장한 제사 드리기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음을 미가는 예언자적인 심정을 갖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예언자 미가는 북왕국의 종교 지도자들이 절기 때마다 행한 일련의 종교적 쇼비즈니스를 강타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미가는 세 개의 강력한 동사를 인용합니다. 받지 않을 것이다.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듣지도 않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절연하겠다는 선언을 하신 것을 대언합니다. 주목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를 외면하시고 돌아보지 않으시고 받지 않으시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왜 이리 하셨습니까? 예배다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가증한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모습과는 벽을 쌓고 그 벽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자들이 만들어진 제단에 와서는 자기들이 헌신한다고 외치며 번제를 드리고, 소제를 드리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화목제를 드린다고 선언합니다. 허면 제사장들은 그들이 드리는 일체의 제사 행위와 제물들로 인해 기뻐하며 그들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눈감아 주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려주는 것만 해도 백골난망이라고 여기며 그들을 추앙하는 게 아모스 시대의 참담한 영적 자화상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아이든 토저의 걸작에서 이런 글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 설교 노트에 메모해 두었습니다. “깊이 없는 신앙,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 같은 친교 활동,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이런 것들이 바로 오늘의 심각한 영혼 병적 증상들이다.” (아이든 토저, "예배인가, 쇼인가?",131쪽) 그는 또 선포합니다. “예배가 밀려난 자리에는 ‘프로그램’이라는 이상하고 낯선 것들이 들어와 있다. (중략) 현재 기독교는 이 땅에서 아주 재미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위의 책, 164쪽) 하나만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적 곤고함과 바참함을 애통해 하여 하나님 앞에 주저 앉아 우는 것이 예배다. 종교적 오락을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 (위의 책, 195쪽)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영적 시금석이자 잠언인 아이든 토저의 사자후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준비하면서 묻고 또 묻고 묻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종이 인도하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까? 하나님, 종이 인도하는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종이 인도하는 예배에 통곡함과 애통함이 있으며 죄에 대한 돌이킴이 있습니까? 하나님, 종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사람을 위로하는 연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을 대신 전하는 영적 사자후입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참 잘 만든 오페라 하나 관람하고 나간다는 느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 대단한 탁월한 문학강좌 하나 수강하고 간다는 느낌을 갖고 나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금요일에 성서일과를 묵상하는데 주께서 강력하게 나를 타격하시면서 전하라고 조명해 주신 말씀을 어제 새벽에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마가복음 5:40절입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신 주께서 주변 상황을 보니 이미 야이로의 딸이 죽은지라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통곡하고 떠들며 왁자지껄이는 것을 보신 주님이 그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말하신 뒤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언하시자 떠들던 자들이 주님을 비웃었다고 기술한 장면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비웃다’라는 단어를 ‘코웃음을 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배하지 않는 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예배하는 현장에 있는 자들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코웃음치는 자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의 예배 현장입니다. 내게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도 성경에 대해 알만큼 압니다. 그러니 촌스럽게 성경 운운하면서 나에게 교훈하거나 감동시키려고 하지 말고, 나를 기쁘게 해주고 위로해 주는 퍼포먼스나 해 주십시오. 그게 받은 헌금에 합당한 행위입니다. 그러면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은 코웃음치는 자들을 역사하시는 현장에서 내쫒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부모만을 현장에 들어오게 하여 달리다쿰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현장에만 달리다쿰의 은혜와 역사가 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 예배자만이 이 은혜의 현장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결론) 저는 오늘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미국의 프리랜서 크리스천 작가인 토미 테니가 그의 책에서 토해냈던 한 문장을 소개하고 설교를 끝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이자 약속은 하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 가운데 그분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이 예배로 그분을 세우면 그분이 오실 것이다.”(토미 테니, 『다윗의 장막』, 토기장이, 106쪽)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께서 내게 오시도록 예배로 그분을 세워드리십시다. 폼잡는 종교적 쇼에 참여한 관객 말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우리도 돌아가는 예배자가 되십시다. 거기에 주님이 마지막으로 한센병자에 외치셨던 복음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늘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9절)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찬양이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