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5번째 강해) 제목: 남아 있는 그 한 사람이면 됩니다. 본문: 느헤미야 8:17-18 서론)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신탁 하나를 소개하며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5:1절을 소개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야훼 하나님이 예언자와 대화하시는 대화체로 구성된 예레미야 5장의 첫 구절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이렇게 하문하십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서 한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명령 안에 야훼 하나님께서 찾으라고 한 그 한 사람의 정체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입니다.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정의’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미슈파트’이고, ‘진리’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에무나’입니다. 이 두 단어의 공통분모는 하나님께서 갖고 있는 속성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마음이자, 당신의 백성들에게 공급하시는 내용물들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5:1절에서 예언자에게 하명하신 찾아야 할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였습니다. 문제는 그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읍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그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읍 안에 없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예레미야 5:7-9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 예루살렘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용서해 주겠느냐? 너의 자식들은 나를 저버리고, 신 아닌 것을 걸어 맹세하였다. 배불리 먹여놓았더니, 간음이나 하고, 창녀 집에나 몰려다니는구나. 먹음새 좋은 말이 성욕이 동하듯 남의 아내를 후리려고 힝힝거리는구나. 그러는데 내가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이런 족속에게 분풀이를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 학자들은 예레미야 5장의 메시지 저술 연대를 요시야 시대 혹은 여호야김 즉위 직후라고 설명합니다. 요시야 시대라고 한다면 주전 640-60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이며, 여호야김의 치세라면 주전 608-597년이 배경이 될 것입니다. 통상 역사는 남 유다의 멸망 과정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공격에 의해 유다의 수많은 사람들이 1차 포로로 끌려갔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주후 597년에 다시 느브갓네살에 의해 2차 공격을 받고 두 번째 포로로 예루살렘 백성들이 끌려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이제는 포로로 끌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공히 국가 유다는 사라지게 되는 비운을 맛보게 됩니다. 특히 예레미야 5장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제 1,2차 포로로 끌려가던 시기에 야훼께서 예언자가 나눈 메시지라는 배경임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완전한 주권 상실과 멸망이라는 비극을 불과 11년 쯤 앞에 두고 있는 절박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미슈파트와 에무나를 실천하고 있는 백성이 유다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유다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남 유다가 왜 멸망을 당했을까요? 이렇게 즉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며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본론)
예수아, 스룹바벨, 세스바살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과 제 1차 포로귀환 백성 42,360명은 주전 538년에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조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이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으로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주전 515년에 완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어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약 5,000여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이때가 주전 458년입니다.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본문 느헤미야 8장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기는 어림잡아 유다가 완전히 멸망을 하고 대다수 인텔리 계층의 화이트컬러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치욕적인 삶을 산지 어언 1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대의 배경임을 알게 됩니다. 혹여나 본문이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이후 봉헌식을 앞둔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느헤미야가 조국으로 귀국한 해가 주전 444년이기에 본문의 시기를 아무리 늘려도 그 마지노선을 140년 이상으로 늘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가장 맥시멈으로 잡고 유다 멸망 이후 약 140년이 흘렀다고 전제하며 본문 설교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나라를 잃은 한 세기 반 만에 성전 혹은 성벽 봉헌을 앞두고 포로 귀환자들은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엄청난 은혜가 쏟아진 부흥회를 마치고 잃어버렸던 나팔절, 초막절을 지키는 감동의 후속 은혜도 경험했습니다. 이제 은혜를 경험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은 초막절 절기 지키기를 실천하는 7일의 축제 사역에 들어갑니다. 17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7절에 기록한 구절은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막절이 여호수아시대부터 지켜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부흥회가 끝난 뒤의 임한 감동의 크기를 높이기 위한 느헤미야 저자의 과유불급에서 비롯된 과장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와 그 이후시대에도 초막 절기는 여러 차례 지켜졌음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8:13, 스 3:4) 역대하 8:13절입니다. “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 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이 정도의 해석으로 17절을 마감하고 정녕 중요한 오늘 설교의 테마 절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입니다.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티스리월 15일부터 일주일은 초막절기 기간입니다, 본문에 의지한다면 초막절 7일 동안 에스라는 날마다 율법 책을 낭독했다고 했습니다. 그 낭독하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한 대상은 ‘무리’였습니다. 앞에서 나누었던 이전 설교 강해를 전제할 때, 여기에 해당되는 무리는 통역해 주던 지도자, 레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부족의 머리들 즉 부족장과 일체의 예루살렘 거민이었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이해입니다. 동시에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들었던 자들은 초막 절기 7일이 지나고 난 뒤에 그 다음 날이었던 제 8일에 성회를 열었다고 본문 마지막 절이 보고합니다. 여기까지 해석의 진도를 나가보니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오늘 한국교회에 적용이 가능할 것일까? 7일 동안 초막이라는 불편한 공간에 거하며 사서 고생한 것도 모자라 그 다음 익 일인 8일째 되는 날에 아예 집회를 다시 한 번 열어달라고 요청했다니 이게 오늘 2023년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현실감이 있게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아예 해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당혹스러운 본문입니다. 이 정도로 해석하기 곤란한 본문이라면 지난 주일 설교를 끝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것이 현실감각이 있는 지혜로운 목사일 텐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을 자초하는가를 저도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를 교우들에게 전하고자 결심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여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어떤 여백일까요? 본문에서 백성들이 사모했던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의 여백입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이 바보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업을 포기하고 7일도 모자라 8일째 되는 날 다시 한 번 성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여러모로 집중해 보았습니다. 이때는 신정정치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종교성이 아니고서는 다른 종류의 사상이나, 철학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물질적인 부요를 갖다가 주는 과학적인 매커니즘이 창궐하기 이전 시대였기 때문이다. 등등 너무 많은 대안적 답변을 추론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적확한 이유라고 볼 수 없었기에 포기했습니다. 도리어 원색적이며, 원초적인 대답 말고는 딱히 답변할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초막절을 마치고 또 다음 8일이 되는 날에 성회를 다시 열어줄 것을 요청한 이유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야훼의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대한 절절한 사모함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살피겠지만 이렇게 실시된 8일째 되는 날의 성회가 가져온 은혜의 후폭풍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로 결론을 맺습니다. 주전 444년 혹은 515년 이후 예루살렘의 거민들의 영적 상태는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은혜의 도가니였습니다. 그 후 약 2,500년이 지난 오늘, 이 땅의 영적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포로 이후 시대에 불어 닥친 영적 갱신의 바람이 오늘도 불고 있습니까? 언감생심임을 저도 압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 여백에 엄청난 폭풍 바람을 몰고 오는 구름 떼는 고사하고 나비효과가 가져오는 나비바람의 자그마한 일렁임도 없음을 너무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를 용기를 갖고 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그 바람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남은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야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나를 위해 전하셨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는 단 한 사람의 남은 자가 있기를 바라는 여백 때문에 오늘 메시지를 준비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실시한 ‘구약성경 톺아보기’ 사역에 강사로 초청한 차준희 교수가 주일 오전 설교에 전한 본문은 미가 6:6-8절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친구는 우리 교회 예배에서 이 구절을 본문으로 삼아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의 핵심적인 레마는 야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역설함과 동시에 이렇게 권했습니다. 세인공동체에 있는 교우들이 이런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친구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권하고 간지 4년이 흘렀습니다. 교우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찾는 바로 그 사람이 되었습니까? 친구가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말씀으로 불 질러 놓고 간 지 1년 뒤에 본인이 가르치고 있는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정기 채플에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해서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그때 대학원 채플에서 신대원 학생들에게 전했던 본문은 동일하게 미가 6:6-8절이었습니다. 그날 제가 전했던 제목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맞장구치며 전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모두가 교회에서 전도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대접받는 신학대학원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날 설교 말씀을 전하면서 신대원 학생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는 차 교수가 제천세인교회에 와서 불을 질러 놓고 갔습니다. 미가가 말한 하나님이 찾는 자들인 미슈파트(정의), 헤세드(인자), 겸손(짜나)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교회 교우들에게 불을 질렀습니다. 불을 질러 놓고 간 장본인이 있는 학교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목회자 후보생들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러분이야말로 제천세인교회의 평신도보다 앞서서 하나님이 찾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함은 당위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날 설교의 말미에 우리 교우들에게도 여러 차례 전한 엘리 위젤이 쓴 『팔티엘의 비망록』에 기록한 프롤로그의 서문을 읽어주고 말씀을 끝냈습니다. “자스트맨(의인)들 중 하나가 소돔에 왔다. 소돔 사람들을 죄와 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욕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설교하였다. 소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빈정거리며 웃었다. 얼마 안 가서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조차도 없어졌다. 그는 이미 소돔 사람들에게 흥미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다. 살인자는 계속 살인했고 현명한 사람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자스트맨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불행한 선생을 동정하고 있던 한 아이가 선생에게 다가와서 ‘불쌍한 이방인이여, 암만 소리를 지르고 외쳐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고 물었다.’ ‘알고 있단다.’ 자스트맨이 대답했다. ‘그런데 왜 계속하십니까?’ ‘왜냐고? 곧 처음에는 내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란다.”(엘리 위젤, “팔티엘의 비망록”, 주우, 9쪽) 설교를 마치고 돌아온 그 다음 날, 어제 채플에서 설교를 들었던 신대원생 한 명이 제게 문자 하나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어제 얼굴을 들고 도저히 설교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소돔사람, 그리고, 어린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나는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아프지만 이제부터 나를 영적 괴물로 변화시키려는 일체의 것들과 싸워보겠습니다. 제가 자스트맨이 되어 보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모든 교우들이 소돔 성문 앞으로 가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쟈스트맨이 될 것을 믿고 목회하지 않습니다. 기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더불어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기대감으로 목회합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세상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싸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은 만들기는 해보자. 저는 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남은 사역을 감당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남은 그 한 사람이면 저는 충분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나 홀로 서있는 죽은 내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세워 내 영 살게 하소서/주님 내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안에 주님 내안에 나를 세워 주소서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내 사모하는 주님/영광의 왕이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