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그 안에서 거하니2024-03-07 17:14
작성자 Level 10

2023년 8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4번째 강해)

 

제목그 안에서 거하니

본문느헤미야 8:13-18

 

서론)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팀 켈러 목사의 설교 중에 이런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네 조국과 친족과 친구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을 때아브라함이 도대체 어디로 떠나라는 것이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답답한 나머지 질문한 아브라함에게 속 시원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나 지도를 주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에두릅니다.

차차 일러주겠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 성경의 내레이션에 대해 무려 2,100년 후에 탄생한 믿음의 후손인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각본으로 다시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11: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팀 켈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이어 마리아의 이야기도 꺼냅니다.

하나님이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 일방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처녀의 신분이었던 마리아는 너무 충격적인 하명을 받고 발끈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입니다.”

전적인 거부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사가 고지한 그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순간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너를 덮으셨기에 이 일이 가능하다고 고지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후 마리아의 고백을 복음서 안에 이렇게 담아 놓았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8)

팀 켈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두 가지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헬스클럽 등록하는 것도 아니고당신의 성공과 잠재력 실현을 돕는 웰빙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기독교는 영적 서비스를 공급하는 또 하나의 자판기가 아니며당신이 무난한 비용을 지불함으로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며 당신의 필요로 채워주는 그 어떤 것은 더 더욱 아니다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흥정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순복함으로 되는 것이다즉 당신 자신의 삶에서 손을 떼야 하는 것이다.”(팀 켈러예수예수두란노, 148)

소름끼치게 하는 팀 켈러의 갈파입니다.

다시 복기하십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흥정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순복함으로 되는 것이다즉 당신 자신의 삶에서 손을 떼야 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갈파를 마음에 새기면서 또 한 번 각인하게 되는 본회퍼 목사의 촌철살인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멘 합니다.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체 말씀을 통해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선사하시고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순종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 (본회퍼나를 따르라대한기독교서회, 88)

나는 우리 교우들이 아마도 수백 번 이상본회퍼의 이 촌철살인을 선포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순종하는 것이며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자이다.”

오늘도 이렇게 설교를 선포하는 데 세 종류의 부류들이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 존재함을 저는 압니다.

⓵ 이 권면에 대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한국인이 있습니다.

⓶ 순종하라는 화두를 목회자들은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고 믿고 비뚤어지게 보는 더 서글픈 자들도 있습니다.

⓷ 그러나 너무 힘든 화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해가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유익이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겠노라 들을 때마다 다시 한 번 다잡이 하는 그래도 신 사사시대를 방불 하는 21세기의 랜덤의 시기에 존재하는 남은 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느헤미야 24번째 강해를 선포하면서 우리 세인공동체의 회중 중에도 여전히 굳세어라 금순아의 믿음을 갖고 ⓵⓶번을 사수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그럼에도 하나님이 오늘 메시지를 통해 또 예비하신 번 교우들이 존재함을 믿으며 본문 해석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본론)

 

수문 앞 광장 부흥회에서 강력한 은혜가 봇물처럼 솟아 나와 감동적으로 끝났습니다.

에스라가 율법 책을 읽고 해석하였고지도자들은 아람어로 통역해 주며 그 해석의 메시지를 광장에 나온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전해주자 과거 열조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들로 다시는 그 죄의 사슬에 묶이지 않겠다는 각오로 돌이키며 수문 앞 광장은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에스라와 영적 지도자들이 그만 울고 집으로 돌아가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하신 절기를 지키라고 권하자 백성들은 순종하며 돌아가 티스리월(7유대력으로는 1) 1일의 절기 즉 나팔절을 지키며 이웃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기쁜 절기를 보냈음을 지난 설교를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팔절 다음 날그러니까 티스리월 2일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본문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수문 앞 광장 부흥회를 은혜롭게 마친 이스라엘의 뭇 백성들의 족장들과 제사장들이 에스라를 찾아갑니다.

이 구절에서 족장이라고 번역된 로쉬는 영어단어로 표현한다면 머리’(head)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족장은 예루살렘 거민 공동체의 머리 격에 해당하는 책임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오늘의 언어로 대체하여 설명한다면 평신도 그룹의 지도자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주석이 왜 중요할까요?

포로 이전 시기에 율법 교육과 해석은 철저하게 레위 지파만이 감당하던 고유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로 귀환 이후부터는 율법 해석의 장이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졌다는 대단히 혁명적인 일대 변혁이 일어났음을 알려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마치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만인 제사장설에 아주 가까운 일대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공동체의 머리들씨족 공동체의 머리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그리고 성직의 계열에 있었던 제사장들이 에스라를 찾아간 것입니다.

왜 찾아갔습니까?

영적 부흥이라는 그 감동의 여운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방문 목적을 밝힙니다.

율법을 밝히 알고자 하여

거룩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부흥을 경험한 공동체는 이런 감동이 연이어 이어집니다.

에스라를 찾아간 공동체 지도자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또 다른 하나님의 명령을 전수받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무슨 말입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포로로 끌려가 있던 시절이스라엘 공동체는 율법을 연구하거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율법에서 제정한 절기가 무엇인지또 그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에스라가 이렇게 잊혀져 있었던 절기를 알려줍니다.

소위 말하는 초막절과 그 절기 지키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선조로부터 대단히 중요하게 지키던 율례입니다.

특히 티스리월 그러니까 새해가 시작되는 7월에는 중요한 절기가 모여 있는 월력이기도 합니다.

1일에 지켜야 하는 나팔절, 10일에 지켜야 하는 속죄일더불어 15일부터 일주일간 지켜야 하는 초막절 등이 티스리월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 7월 2일이 배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초막절까지는 13일이라는 여유가 있는 2일에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에스라에 찾아가 율법을 더 알기 원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에스라는 포로 기간 동안 지키지 못했던 초막절의 규례를 알려주며 지킬 것을 종용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일러준 율법은 신명기 16:13-15절이었을 것입니다.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왜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을까요?

레위기 23:43절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월 15일부터 일주일은 초막을 만들어 그곳에 들어가 모든 가족들이 거주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한 해의 추수를 다 마치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풍요에 감사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물론더 중요한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저들에게 오셔서 출애굽 시키시고 구원해주셨고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은혜를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특히 초막에 거하라고 한 이유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을 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지체들이 광야라는 척박한 땅에 장막을 치고 살았던 그 고달팠던 시절을 결코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라는 은혜를 되새기라는 다짐의 절기가 초막절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수문 앞 광장에서 부흥회를 은혜 중에 마치고 다시 복기하는 율법 공부를 통해 초막절을 지키라는 명령은 바벨론 포로 70년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 공동체 지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감격의 절기가 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초막절을 알려주고 지키라는 에스라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회중들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제일 먼저 초막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혹은 뜰 안에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혹은 수문 광장에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주거 형태는 지붕이 납작한 형태의 가옥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한다면 지붕이 슬라브 구조라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기에 납작한 지붕 위에 산에서 가지고 온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로 초막을 지었습니다.

일사분란 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한 예루살렘 거민들은 순종의 절정을 감당했다고 본문 17절이 증언합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저는 17절을 묵상하다가 울컥했습니다.

포로귀환 공동체 일원 중에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

돌아온 회중 전부가 에스라가 명한 율법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메시지의 절정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초막안에서 거하니

무슨 말입니까?

자기들이 거주하는 안락한 집에서 나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붕 위에 만들어 놓은 초막으로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그곳에서 7일을 머물며 귀환 공동체의 예루살렘 거민들은 옛 일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430년이나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절망의 옛 선조들을 찾아가셔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워 그들을 출애굽 시키시고가나안 40년 동안 옷이 헤지지 않게 하셨고신발이 닳지 않게 하시며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심으로 굶지 않게 하셨고장막을 만들어주심으로 광야의 추위와 더위그리고 맹수와 전갈과 독사들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셨으며밤에는 불기둥과 낮에는 구름기둥을 보내주셔서 당신의 선조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던 야훼 하나님의 그 사랑에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작금, 70년간의 치욕스러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꿈에 그리던 고국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와 비록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다시 잃어버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고이제는 까마득하게 잃어버린 율법의 내용도 알게 하셔서 그동안 잊혀졌던 초막절을 다시 지키게 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며 예루살렘 거민들이 초막에서의 불편했던 7일간의 삶을 도리어 기쁨과 감사로 보냈을 것을 본문이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이런 은혜를 전제하였기에 오늘 설교 제목은 제게 감동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문구였습니다.

그 안에서 거하니

저는 감사로 어울러져서 순종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의 신앙의 절정을 이 문구에서 찾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하여 드디어 승리한 쾌거가 있습니다.

이렇게 속삭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게 아니야순종해야지그런데 무조건적인 순종은 맹종이야그러니까 네가 선택할 순종은 결과론적인 순종이야!”

대단히 매력적이며 열광하게 만드는 21세기 형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결과론적인 순종이 어떤 순종입니까?

이해가 될 때유익이 될 때 전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메시지가 매력적입니까?

유감스러운 것은 주님의 메시지 중에 이해가 될 때유익이 될 때 순종하라는 메시지는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해가 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과학적 동의이지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익이 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은 투자이지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어제 새벽에 참 감동적인 메시지를 근거로 새벽 큐티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1-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이사랴에 일행과 함께 도착합니다.

마침 가이사랴에는 사도행전 8장의 역사를 기록한 전도자 빌립이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예루살렘 행을 도모합니다.

마침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 그 때에 예루살렘의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예언자 가이오가 방문합니다.

가이오는 바울을 본 뒤에 느닷없이 바울의 혁대를 풀더니 자기의 수족을 묶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사도행전 21:11절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가이오의 예언은 정확한 예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성령이 말씀하시는 예언이라는 사족까지 붙였겠습니까?

가이오의 종교적인 퍼포먼스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21:1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이 구절에 주어는 1인칭 복수 대명사인 우리입니다.

누구를 지칭합니까?

1-3차 전도여행을 통해 바울의 사역에 동의하여 함께 전도 사역자로 동참한 이들 전부를 지칭하다고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애석하지만 우리’ 안에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주치의 누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참담합니다.

우리라는 이 무리들은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결심을 따라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 여행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주어 우리는 두로에 도착했을 때바울을 아끼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간청까지 들었지만 주군이었던 바울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온 동역자들입니다.

나름 굳센 믿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부류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막상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 있던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나니 그들의 불안한 마음은 더 더욱 커졌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영적인 행위를 통한 퍼포먼스까지 행하며 예루살렘 행을 막는 가이오의 일련의 일을 경험하자 드디어 그들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결과론적인 순종으로 기울어집니다.

바울에게 12절에서 최후통첩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망가짐을 경험합니다.

다시 사도행전 21:12절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결과를 생각하는 순종을 하자는 쪽으로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쪽저쪽에서 압박을 당하는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도행전 21:1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에 대한 순종 그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내용에 대한 계산하지 않는 순명이었습니다.

초막은 대단히 불편한 장소입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기후의 대낮은 도저히 텐트에서 거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태양이 비치는 장소이기에 거하기에 부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율법이 정한 대로 일주일을 초막에서 머물며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주시는 설교의 레마를 이렇게 받겠습니다.

 

※ 순종은 이해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행할 수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랜 전에 튤리안 차비진 목사가 쓴 책에서 이 글을 발견해서 담아 두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튤리안 차비진JESUS ALL두란노, 197)

머리로 아는 것을 이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아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면 순종하겠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이 있습니까?

교만함과 건방짐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해가 되게 하시고유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진 것에 순종하면 비로소 하나님께 그런 믿음의 자녀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음의 공식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작년에 제자 한 명이 독립교회 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제게 그 제자가 안수를 받기 전에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교수님왜 하나님이 제게 이 길을 꼭 가라고 하셔야만 했는지 묻고 있습니다왜 내가 이 길을 가야만 하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나는 갈 힘이 없는데나는 자격도 없는데.”

제자에게 이렇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 아닙니다도리어 가슴을 칠 일이지더군다나 지금은 더 더욱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사 안수를 받는 전도사님에게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습니다가슴 치는 일을 중단하지 마세요영혼을 위해 가슴을 치고랜덤시대의 막장을 아파하며 가슴을 치고나 같은 것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하나님에게 그 은혜에 부합하지 못할 때 가슴을 치세요동시에 초기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목사의 이력이 쌓아져가면서 교묘하게 순종을 불순종으로 바꾸며 변질시키는 괴물 되어져 가는 내가 보이면 가슴을 치세요그러면 주군께서는 전도사님을 목사로 세우신 뜻을 이루어나가게 될 것입니다축하는 아니지만 이 시대로 부름받기 위해 결단한 전도사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순종하기 전에 믿음이 있다고 발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게 정직한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발견할 때비로소 이렇게 고백하며 감사하십시오.

하나님나 같은 자에게 겨자씨만한 믿음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그 안에 거하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아래 한글 30포인트 글자처럼 크게 보였습니다.

이 구절에 가슴을 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 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 만 따라 가렵니다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 만 찬양하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

영원토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