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3번째 강해) 제목: 해석함과 해석되어짐 본문: 느헤미야 8:7-9(1f) 서론) 아주 가끔 아내가 제게 이런 핀잔을 주곤 합니다. “목회가 설교만 있는 게 아닌데, 당신은 꼭 설교만을 위해 태어난 목사 같아요.” 그럴 때마다 묵묵부답합니다. 한 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맞는 말 같기도 해서 딱히 대항할 만한 계제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내게 있어서 목회 영역 중에 설교 사역에 거는 비중이 다른 목회 영역보다 더 큰 것이 사실이기에 아내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일주일 사역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느냐를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게 솔직한 답일 것 같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시작되면 수요일과 주일 설교 준비를 위해 온 생각을 집중하고 수요일 아침과 토요일 오전 중에 그 생각의 결과물을 원고에 담아 타이핑함으로 일주일을 보냅니다.” 몇 주 전에 읽고 서평을 쓴 책에 담긴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알려진 쳇-지피티(Chat-GPT)가 앞으로는 설교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할지 모른다. 설교자에게는 위기다. 설교자가 쳇-지피티보다 훨씬 수준 떨어지는 설교에 만족하는 바보가 되든지, 쳇-지피티가 제공하는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가 되든지, 아니면 완전히 창조적인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다.” (김기석, “『말씀 등불 밝히며』, 201쪽, 정용섭의 북 리뷰 중에서) 정용섭 박사의 대단히 날카로운 지적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강대상에 내려가 은퇴하는 날까지 세 번째의 목회자가 되기로 말입니다. 일본의 지성이자 불모지 일본 기독교계의 양심이라고까지 극찬 받은 우찌무라 간조(내촌감삼)가 일찍이 했던 촌철살인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접하면서 몹시 흥분하며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교회의 수준은 강단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설교 준비는 제 인생의 거의 전부였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오늘 주일은 설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텍스트입니다. 의도적인 계획이 아니라, 느헤미야 강해에 따른 오늘 본문 적용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떠나는 본문 여행에 우리의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신선한 은혜와 결코 상투적일 수 없는 감동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시는 은총의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2주 전부터 느헤미야 8장을 나누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총 13장 중에서 어찌 보면 가장 감동적이자 중요한 본문이라고 여기는 것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는 본문에 담겨 있는 8장입니다. 성전 재건 혹은 성벽 재건이라는 중차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완수한 예루살렘 귀환 공동체의 지도부와 거민들은 이제 봉헌식을 앞두고 영적인 재무장을 위한 부흥회를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큰 공터인 수문 앞에서 진행했음을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강사는 에스라, 동시 통역사는 13명의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흥회의 순서는 요약하면 이러했습니다. ⓵ 예루살렘 거민들이 부흥회를 요청했습니다. ⓶ 그러자 율법학자이자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강사로 서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됩니다. ⓷ 나무 강단에 서서 에스라는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모세의 율법 책을 읽었습니다. ⓸ 에스라가 율법 책을 읽으면 13명의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 율법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⓹ 에스라가 두루마리 율법 책을 들고 야훼 하나님을 무릎을 꿇고 찬양하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며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⓺ 에스라는 읽었던 율법의 내용을 해석하였습니다. ⓻ 다시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에스라가 해석한 율법의 그 뜻을 통역해 주며 백성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⓼ 부흥회의 참석한 예루살렘 거민들은 해석해 주는 율법의 뜻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⓽ 울고 있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진정시킨 지도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나팔절이라는 유대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⓾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가 나팔절을 이웃들과 함께 즐기며 성회를 마감합니다. 더 자세히 열거할 수 있지만 수문 앞 광장에서 열린 부흥회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히 그 현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은혜로웠을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문 앞 광장에서 열린 부흥회가 승리하는 사역으로 마감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본문 텍스트에 도착했으니 한 번 쯤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8-9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에스라는 모세의 두루마리 율법 책을 나무 강단 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그 책을 펴고 회중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율법 책을 읽자 백성들은 아멘하고 화답하며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율법 책을 읽던 에스라는 이제 읽었던 텍스트를 직접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통해 갈음했듯이 해석된 율법을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혹 페르시아어나 아람어로 통역해서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더 이상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억제할 수 없어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은혜의 현장이 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의 절정은 거민들이 흘리기 시작한 눈물의 회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는 저는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조금은 더 세밀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도대체 예루살렘 거민들로 하여금 회심과 회개라는 능동적 현장으로 이끌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해야 합니다. 주저 없이, 지체 없이 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해석한 해석함 때문이었습니다. 더 냉정히 접근해 보겠습니다. 율법을 에스라가 읽을 때, 백성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아멘하며 영적으로 반응했다고 했습니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일찍이 그의 걸작인 『성과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이다.(Homo Religiosus) 종교지향성은 인간의 근본적 성향이다.” 엘리아데의 말을 긍정한다면 예루살렘 거민들이 아멘을 외치며 반응했던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천주교인인 지인 블로거가 관리하는 블로그에 방문해서 이 글을 보았습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음” 블로거는 이 글을 이렇게 적용했습니다. “종교적이지만 특정 종교에는 얽매이지 않음” 왜 지인 블로거의 글을 인용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사람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내가 마음먹기(해석하기)에 따라 기독교인으로 변장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더군다나 엘리아데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근본적인 본능 안에 절대적 존재와 주체를 의지하려는 속성에서 예외자가 없기에 그 본능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예배라는 행위를 통해 신앙적 자기만족이라는 희열을 만끽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이것들을 충족시켜주고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본문에 있는 구절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했던 거민들 모두는 에스라의 거룩한 종교적 퍼포먼스에 종교적으로 반응하며 아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펜데믹 이전에는 수면 밑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펜데믹 이후부터는 수면 밑이 아닌 수면 위로 아주 대담하게 떠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와 성향만으로도 이제는 너무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천에 생겼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공통분모가 이제는 두렵도록 선명하게 보입니다. 무엇일까요? 율법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가졌다는 점입니다. 앞에 언급한 블로거와 같은 경우입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막을 수 없는 대세입니다. 현대인들은 지성적 능력이 있어 이제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합니다. 기존의 과거처럼 설교자, 담임목사, 신학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해석하는 능력까지 겸비한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작금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이 일취월장하며 진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도 부정적이거나 불건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대해 응원하고 지지하는 목사입니다. 일반 신자들, 머리만 크게 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친구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건 그 친구들의 목회 철학이니까 가타부타하지 않지만, 저는 도리어 모든 교우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자의적인 능력이 날마다 발전되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목사입니다. 여기까지, 설교를 듣고 계신 교우 여러분! 듣기에 불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듣기에 불편한 필드로 들어서겠습니다. 본문 9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라는 우리나라 번역 성경을 원문에 있는 구절을 의미로 다시 번역했다면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해석한 율법의 말씀을 다 듣고 우는지라” 명징한 차이가 보입니다. 누가 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말씀을 해석만 한 자는 결코 울지 않습니다. 말씀을 지적 이해의 수준으로 가늠하고 머무는 자가 어떻게 울 수 있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누가 울 수 있는 자입니까? 오늘 설교의 레마로 답하겠습니다.
※ 말씀에게 해석당한 자가 울 수 있습니다. 이 레마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에게 해석당한 자만이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으며, 본회퍼 목사의 지론대로 그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해석당한 수문 앞 광장 앞 예루살렘 거민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선민 조국이 멸망을 당하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바사에서 굴곡지고 비참한 식민지 백성으로 70년 이상을 살다가 부분의 인원들이 완전한 독립이 아닌 채로 조국으로 돌아와 보잘 것이 없었던 스룹바벨 제 2성전을 재건하고 나라 잃은 채의 그 슬픔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음을 보고하는 책이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포로귀환 공동체가 느끼고 있는 아픔의 원인이 바로 율법을 무시하고 살았던 죄였음을 드디어 에스라가 제공한 율법 해석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포로귀환 공동체의 거민들을 죄악에 대한 회심, 아쉬움, 다시는 이런 패역함의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 등등이 늦었지만 어우러져서 그 자리는 통곡의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곡하고 있는 그들에게 에스라 및 지도자들이 명한 대로 그만 울고 집으로 돌아가 절기를 지키며 없는 자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라는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말씀에 해석당한 자의 삶으로 회귀했음을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023년 8월 첫 주에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종교적인 멘트로, 더불어 종교적인 쇼맨십 정도의 반응으로 아멘 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신앙적 삶은 말씀을 해석하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해석당하는 삶을 살아냄으로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며 그 결과물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종이 출간한 네 번째 졸저인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첫 번째 책에서 사사기 12:8-15절을 중심으로 한 글을 소개하면서 붙였던 제목이 “하나님께 해석되고 있습니까?”였습니다. 먼저 사사기 12:8-15절을 조금 길지만 복기해 보겠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 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저는 글에서 끔찍한 사사 중에 한 명인 입다 치세가 끝나고 나서 그 뒤를 이어 사사의 직을 이어 받은 세 명의 소 사사에 대해 밝혔습니다. 세 명의 소 사사 이름은 입산, 엘론, 압돈이라는 사사입니다. 이들 사사에 대해 해석한 저는 그들을 소개하고 있는 12:8-15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입산은 입다가 죽은 후, 혼란스러웠던 이스라엘을 위해 아들딸을 정략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시켜 정국 안정을 도모했다.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엘론이 사사의 직을 이어받았는데 1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압돈이 직을 이었는데 그는 아들, 손자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다가 역시 죽었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1』, 동연 간, 351쪽) 여기까지는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입다의 뒤를 이어 사사 직을 감당한 소 사사 세 명의 성경적인 해석을 듣고 어떤 감흥을 느끼셨습니까? 제 성경적 설명과 해석은 크게 엇나가지 않는 해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제가 했지만 여기까지 은혜 전무했습니다. 감동, 제로입니다. 그냥 성경 텍스트 사사기 12:8-15절 말씀을 주석에 근거해서 해석하고 설명했기에 틀리지 않는 접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사사기 12:8-15절 말씀이 설교자인 나를 해석하게 했습니다. 그 해석의 내용도 제 책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역시 소개해 보겠습니다. “필자의 이 소회를 듣고 난 뒤에 독자들의 감흥이 어떤지 궁금해진다. 혹시 감동이 있었는지, 아니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못내 궁금하다. 적어도 정상적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길벗들이라면 마땅히 후자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입다의 뒤를 이어 사사의 직을 감당한 세 명의 보고를 접한 뒤에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왜 이렇게 질문해야 할까? ‘이브짠’이라는 이름의 뜻은 ‘날렵한 자’라는 뜻이다. 적어도 입산은 이름대로 정치적인 날렵함을 발휘해 정략적인 정치를 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엘론’은 ‘참나무, 상수리나무’라는 뜻이다. 그의 치세에 전쟁이 없었으니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을 단단한 참나무 같은 치세로 만들었다고 자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아브돈’은 ‘섬김’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기의 자녀, 손들을 섬기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다시 말해 아주 가정적인 아버지, 할아버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왜 지면을 통해서 이렇게 세 명 사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행위를 이렇게 소개하고 질문을 던졌을까 답하고자 한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이것 말고는 세 명에 대하여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름의 입장에서는 나름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한 설명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없다.” (위의 책, 351-352) 말씀에 해석 당하였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가 성경 백독을 하였든지 이백 독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일은 성경을 이해하였다는 소득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나를 해석했다면 나만을 생각했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부여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말씀에 밑줄을 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나를 해석하는 자들은 내 삶에 밑줄을 긋는 자들입니다. 20세기 중국이 낳은 걸출한 법리학자이면서 신실한 가톨릭 학자인 우징숑 박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찾은 이후부터 성경이 자신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본인의 삶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기막힌 통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와 숨바꼭질을 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찾지 못하신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잘못 때문이었다.”(우징숑, 『동서의 피안』, 가톨릭출판사, 21쪽) 성경에 해석당하는 자는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지난 목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아들 내외를 만났습니다. 아들이 맡고 있는 고등부 수련회가 끝났고, 영적인 혼신의 힘을 다 쏟은 뒤라 체력적으로도 많이 고갈되었을 것 같아 아들과 며느리를 중간 지역에서 만나 격려했습니다. 카페에서 담소하는 중에 아들이 수련회를 마치고 난 뒤의 여러 가지 일들을 간증했습니다. 아들이 나름 영적으로 흥분하여 간증한 내용을 요약해 문장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아버지, 이번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정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의 중보, 학생들과의 일대일 만남을 통한 독려, 교사들의 기도 지원 독려 등등 제가 수련회를 인도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지하게 역대 급으로 힘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준비했는데 하나님도 그 마음을 아시고 역대 급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간증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역사는 예배 살려내기였습니다. 부임해 보니 펜데믹 이후 고등학생들의 영적 상태는 거의 바닥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파트 사역자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었습니다. 그 관계 설정을 위하여 많은 프로그램과 사역의 내용들을 준비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싸늘하게 죽어 있는 예배 살려내기였습니다. 해서 목숨 건 설교 준비를 했고, 찬양 지원팀, 중보기도 팀의 일사분란 한 사역이 진행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습니다. 울며 말씀을 전했고, 70명의 고등부 학생들을 일대일로 만나는 것처럼 복음을 증거 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첫째 날 집회 중에 예배 시간을 1시간 반에서 두 시간으로 설정했는데 3시간을 넘겼습니다. 교사들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아이들이 지쳐할 수 있으니까 계획대로 하자고,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둘째 날, 집회 시간에 은혜를 공유하고 기도회로 마치려고 하는데 집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집회 시작 시간 4시간을 넘어섰습니다. 수련회 인솔 교역자로 더 이상 연장할 수 없어서 집회 종료를 알렸는데 기도하는 아이들에게서 거센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왜 은혜 시간을 중단하려하느냐는 볼 맨 소리였습니다. 그날 집회는 전적인 성령님이 이끄시는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예전 같으면 동일하게 일어났던 수련회의 현상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토로하는 말 속에는 펜데믹 이후 그것도 고등부에서 일어난 사도행전적인 역사에 대한 예배 살리기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형성이라는 물꼬를 튼 시작이었다는 깊은 감동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윽고 아들이 이렇게 제게 전언했습니다. “아버지, 이번 수련회를 마치고 학생들 중에 세 명이 서울신학대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하네요. 지금 시대에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네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영적으로 내심 흥분하고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전도사, 수고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뿌린 씨앗이 3년 동안 지속된다면 그 사역이 승리한 것으로 인정하겠다. 앞으로 더 더욱 은혜의 길로 초입한 아이들을 성경이 해석하도록 만들어라.” 어제부터 황진경 자매가 올케 조민지 자매를 위해 16주 스케줄을 통해 일대일 제자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는 가운데 자꾸만 하민엄마가 떠올랐어요. 동시에 제가 계획했던 일이 6개월 정도 딜레이 되도록 성령께서 강권하셨어요. 주님의 뜻으로 알고 올케지만 사랑하는 여동생이라는 마음으로 갖고 16주 동안 양육해 보려고 해요. 주님이 허락하신 기회라고 확신하거든요.” 제가 사역 장소 허락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진경 자매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성경에서 해석당하는 자는 철저하게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영혼을 생각하는 삶으로 변역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묻겠습니다. 그대는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있습니까? 만에 하나 해석되고 있다면 그 증거를 나타내십시오. 다시 강조합니다. 성경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삶으로 번역된 증거들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내 삶이 아닌, 하나님과 관계된 삶으로. 그대는 이런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나도 따라 가오/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아버지 나를 보내주오/나는 달려가겠소/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아버지 나를 보내주오/나는 달려가겠소/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나는 사랑하겠소/세상을 구원할 십자가/나도 따라 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나를 사랑한 주님/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