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2번째 강해) 제목: 그리스도인은 이렇습니다. 본문: 느헤미야 8:6-12 서론) 더운 여름은 이제부터 시작된 듯합니다. 장마는 끝이 나고 북태평양 고기압이 그 어느 해보다도 강력하게 발달하여 우리나라 전역을 뒤덮고 있기에 곳곳에서 열섬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에 앞으로 2-3주는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질 것 같다고 하니 교우들은 특히 개인 건강에 유의하기를 바랍니다. 한 동안 개 짖는 소리로 인해 심각한 소음 공해를 당했습니다. 웬일인지 7월 말 이후부터 개 짖는 소리가 뜸해져서 조금은 살만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새벽부터 울어대는 매미 소리로 인해 또 다른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고역입니다. 매미는 왜 우는 것일까? 학자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듭니다. ⓵ 울어야 일정 체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⓶ 암컷 매미를 소리로 유인하여 짝짓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소리가 클수록 암컷들을 유혹하기 쉽다고 하니 서부동 1003번지는 한 동안 계속 매미 소음에 시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 되면 땅속에 애벌레로 있었던 매미들이 부화하여 땅 위로 올라와 수컷이 울음소리로 암컷을 유혹하고 서로 짝이 지어지면 사랑을 나누고 약 한 달 뒤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매미의 일생입니다. 결국 매미의 울음은 죽음의 서곡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런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이유 없는 눈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장(斷腸)이라는 한자 단어가 있습니다. 斷腸이라는 단어의 뜻을 일러주는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단장의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나라와 촉나라의 전쟁 중에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배에 싣자, 그 어미 원숭이가 배를 쫓아 백 여리를 따라 오며 슬피 울었다.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르자 그 어미 원숭이가 몸을 날려 뛰어 올라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어미 원숭이의 창자를 갈기갈기 끊어놓았던 것이다.” (고도원,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 해냄, 161쪽) 한자 단어 ‘단장’이 끊어질 斷과 창자 腸이 합쳐진 유래입니다. 어떤 의미로 접근해 보면 운다는 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전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흔히 말하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집트 나일 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보면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전형적인 위선적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눈물의 참 뜻을 왜곡하는 이런 눈물은 정말로 사악하고 질 나쁜 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극단의 예를 제외하고는 눈물이라는 단어의 거의 대부분의 해석은 고귀하고 위대한 액체라고 평가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접근한다면 오늘 본문 이해도 한층 은혜가 됩니다. 본론) 본문 9절을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여기에 번역된 ‘우는지라’의 히브리어 ‘바카’를 저는 지난 수요일 창세기 110번째 강해를 통해 소개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20년 만에 얍복 강 나루터에서 만났을 때 에서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바로 그 단어가 ‘바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운 것이라 했습니까? 대성통곡했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혹은 성벽을 재건하고 난 뒤의 예루살렘 거민들은 왜 통곡하며 울었을까요? 이제 그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복기합니다. 느헤미야 8장은 성전 혹은 성벽 재건이 끝난 뒤의 정황이라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 성전 재건을 염두 해 둔 부흥회라면 본문 에스라 8장과 9장 사이에 들어가야 하는 본문이고, 성벽 재건 이후에 일어난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라면 느헤미야 8장은 역사서 저자의 의도적인 편집이라고도 했습니다. 여하튼 전자든 후자든 상관없이 분명한 공통점은 부흥회 강사가 에스라였고, 회중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공통점입니다. 동시에 이 집회의 독특성은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부흥회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집회라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에스라가 나무 강단위에 섰습니다. 이윽고 그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 책을 들고 그 책을 폈습니다. 그러자 회중석에 앉아 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에스라의 강단 쪽에 서 있었던 지도자 그룹 13명과 레위 지파 그룹도 일어섰습니다. 모두가 기립한 상태입니다. 에스라는 손에 펴고 있었던 모세의 율법을 읽기 전에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 구절에서 ‘송축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라크’는 어원적인 의미가 ‘무릎을 꿇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정황을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장면일 것입니다. 나무 강단 위에 올라선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 책을 편 뒤에 갑자기 그 나무 강단에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온 회중들이 일어서 있었기에 에스라의 영적 퍼포먼스를 직접 보고 있었는데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야훼 하나님을 이름을 높이며 찬양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며 서 있었던 회중들은 에스라에게 질세라 모두가 몸을 굽혀 땅에 대고 아멘 아멘을 외치며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 부흥회의 프로그램은 압권입니다. 본문 7-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이 구절을 주해하겠습니다. 에스라가 야훼 하나님을 찬양한 후에 이윽고 율법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라가 읽은 모세의 율법은 전부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반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있는 거민들은 귀환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사에서 살다가 돌아온 자들이었기에 페르시아어에 익숙했거나 혹은 예루살렘에서 사용되던 아람어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기에 히브리어를 모르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7절에서 언급한 대로 13명의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히브리어 율법을 에스라가 낭독하면 그 글의 의미를 통역해 주던 통역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통역자들은 통역해주는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동시에 에스라는 그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interpreting)까지 해 주었는데 그 해석의 의미도 통역해 주는 수고를 지도자들이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알아들을 수 없었던 언어인 히브리어 율법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낭독하고 해석까지 해주자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인해 회중들은 율법의 뜻을 깨닫게(understanding) 되었다고 본문 8절은 적시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수문 앞 광장 부흥회의 백미를 맛볼 시간입니다. 다시 본문 9절로 갑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순서를 기억하십시다. 에스라가 말씀을 폈습니다. 그 율법 책을 펴고 땅에 엎드려 야훼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시 일어선 에스라는 이제 율법 두루마리를 낭독하고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에스라는 낭독 하던 율법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지성적인 동역자들이 그 율법의 내용과 의미를 회중 공동체의 백성들에게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부흥회에 모인 사람들은 율법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listening) 이렇게 진행된 부흥회의 백미는 회중들이 ‘바카’ 즉 다 울었다(weeping)고 보고한 대목입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며 잠시 언급했듯이 회중들이 흘린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 부흥회를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회중들이 흘린 눈물은 통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수문 앞에 모여 있는 백성들은 졸지에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피식민지 백성으로 살면서 치욕을 당했던 포로 1세대들 몇 그룹과 거의 대부분 2세대 후손들이었습니다. 이들 무리들은 다윗의 선민 공동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었는지 상심하고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억울함이 극대화되어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본문이 제 2성전 재건 직후에 봉헌을 앞두고 가진 부흥회라면 이들 중 2세대는 몇 안 되는 부모 세대로부터 솔로몬 성전이라는 어마어마했던 영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성전은 솔로몬 성전이 아니라 보기에 초라하고 볼품없기가 그지없었던 제 2 성전 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눈에 보이는 장소에서 부흥회를 열었기에 본인들의 초라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직시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가 도대체 왜? 우리가 왜라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율법 책을 에스라가 낭독하여 해석하기에 앞서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자괴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에스라가 율법 책을 낭독한 이후에 이스라엘 회중들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지금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는 하나님에게 등 돌렸던 죄악,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에 대한 파기 등등이 원인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자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회한과 회개로 인해 통곡하며 운 것입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후회, 회한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회중들은 ‘바카’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대대적인 회개와 깨달음이라는 결과물을 준 수문 앞 부흥회의 결과물을 추적해야 하는 오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본문 9절 하반절-12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개진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 적시된 수문 앞 광장 부흥회는 티스리월 1일에 실시되었던 부흥회였습니다. 결국 새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에 실시되었던 부흥회였다는 말입니다. 이날은 새해 첫날이기에 동시에 나팔절이기도 합니다. 나팔절은 유대인들의 축제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축제를 포로시기에 제대로 바사에서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환 후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성전 혹은 성벽을 재건한 이후에 절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변화였고 긍정적인 신호였습니다. 나팔절은 새해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므로 슬퍼할 날이 아니었습니다. 울고 있는 이스라엘 회중들을 향하여 에스라(성전 재건 시기로 해석하면)와 혹은 느헤미야(성벽 재건 시기로 해석하면)와 그리고 통역의 동역을 감당했던 레위 사람들이 이제 울음을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짐승을 잡고 음식을 만들어서 가난한 이웃과 나눌 것을 종용합니다. 동시에 지도자들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회중공동체에 전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러자 울고 있었던 회중들이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준비하여 먹고 마시며 이웃과 함께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게 다시 허락하신 절기의 기쁨을 나누며 축제를 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스토리를 마감한 느헤미야 저자는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영적 메시지를 이렇게 남깁니다.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12절 2f) 무슨 말입니까? 부흥회를 통하여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시 언급했듯이 제게 있어서 느헤미야 8장은 로마서 8장과 더불어 제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인생구절입니다. 더불어 지난 30년 이상을 목회하도록 저를 붙들어준 장이고, 어떤 외부적인 공격과 비토가 있더라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도록 저를 견인해 준 일등공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나면 그리스도인입니까? 부모가 교회 임직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학습 교인이 되고, 또 시간이 되어 세례를 받으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세례교인이 되면 으레 교회에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기 되고, 장로가 되고, 어느 경우에는 어떤 사람은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 물론 교회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 날에 독서 여행을 통해 나누게 될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에서 나우웬이 계속해 반복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집나갔다가 돌아온 둘째보다 더 위험하고 해로운 자가 집을 떠난 적이 없었던 큰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읽고 렘브란트의 그림을 연구하면서 내 안에 뉘우쳐야 할 작은 아들과 돌이켜야 할 큰 아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258쪽) 우리가 정말로 큰 착각을 하는 증후군이 있습니다. 그냥 큰아들의 자리에 있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착각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내증의 여타 자료들과 증언들은 오늘 설교에서 배제하고 본문에 있는 내증적인 보고들만 참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충분한 교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속적인 접속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연속적인 접목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적인 오늘 본문 이해에 한정합니다. 말씀을 듣겠다고 소망하는 자원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 말씀 앞에 서면 일어서겠다는 의지적이고 행동하는 실천적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어 말씀이 읽혀지면 그 말씀을 이해하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 말씀을 해석하는 일체의 노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어 말씀이 해석되면 그 말씀에 대한 철저한 적용이 내게 접목되어야 합니다. 이어 동시에 말씀을 내 것으로 적용하면 반드시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을 듣고 진정성이 있는 회개를 드렸다면 반드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들은 한 번, 두 번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이 이 땅에서 지속이 끝나고, 내 호흡이 이 땅에서 멈춰질 때까지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중에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누락시키거나 중단시키거나 취사선택의 항목으로 축소시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단점이 정말로 많았던 자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나약하고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인 자를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제 해석으로는 이렇게 갈무리하곤 합니다. 헛점투성이었던 베드로였지만 베드로에게는 한 가지 진정성이 있었고 그 진정성을 주님이 인정하셨다는 점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인기가 급상승한 예수에게 수많은 군중들이 기적을 요구하며 압박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의 기적 말고는 없다고 대체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도 모르던 군중들은 약발이 떨어졌다고 판단하고 예수를 떠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나자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도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6: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베드로에게 말씀을 붙드는 영적 장점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일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작가 이기주의 산문 글에서 이 문장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찬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문장을 다듬다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각자의 신념을 닮은 나무가 한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기주, 『한 때 소중했던 것들』, 도서출판 달, 86쪽) 정말로 적확한 갈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내면에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나무가 자라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혀 예수와 관계없는 내 자아의 나무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라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든지, 아니면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1도 없든지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것은 쉽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말씀과 동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호모데우스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순교적 영성을 전제합니다. 여타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서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속적인 접속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완벽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가득한 죄악 용서하소서 모든 우상들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지친 모든 영혼 주 예수 사랑 알게 하소서 저들의 아픔과 눈물 씻는 주님의 보혈 이 땅 치유하소서 성령의 새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