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1번째 강해) 제목: 그립고 그리운 본문: 느헤미야 8:1-5 서론) 지난 주간에 김기석 목사의 신간인 ‘말씀 등불 밝히며’의 2/3 분량 독서를 마쳤습니다. 총 페이지수가 847페이지인데 625페이지 분량의 독서를 마쳤습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 독서를 마치면 미친 페이지수를 자랑하는 책 한 권 독서를 끝내게 됩니다. 두 번에 걸친 독서를 마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몇 몇 교우들에게 북 리뷰 자료를 보내드렸습니다. 제 리뷰를 받은 지체 한 명이 제게 이렇게 답 글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안 나네요. 더운 날에 독서 삼매경이신 목사님 존경합니다.” 이 말을 풀어 보겠습니다. “목사님, 좋은 말로 할 때, 잘 쓰셔서 마지막까지 보내세요.”입니다. 지금 소개한 김기석 목사의 책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총 66권의 성경을 본문으로 청파교회 교우들에게 설교한 원고들 중에 한 편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입니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꽃자리라는 출판사인데 대표로 있는 한종호 목사는 저의 페이스북 친구이자, 서울신학대학교 동문이기에 서로 교제하는 사이입니다. 첫 번째 서평에 기록했지만 글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출판사에서 미친 짓을 했다. 근래는 200페이지만 넘어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미친 짓을 한 책을 읽고 있으니 이 목사도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왜 이런 미친 짓에 동참했는지를 밝히겠습니다. 들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전율시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울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석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류호준 박사가 현직에서 은퇴를 하며 쓴 책에 후배 목사들에게 쓴 소리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본연의 임무에서 일탈한 목회자들, 종로 5가를 배회하며 뷔페 식사에 영혼을 판 정치꾼 목사들, 삼삼오오 모여 먹을거리와 볼거리에 탁월한 지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 진지하게 설교 준비를 하는 대신 인터넷 서핑의 신공력을 가지고 표절에 능란함을 보여주는 목사, 성서 문자주의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독선적 설교를 자행하는 설교자들, 교세와 교단을 발판 삼아 개인의 명예와 영리영달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도성을 알려진 예루살렘과 우리 교회와 교단 안에 널려 있습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 pp,117-118) 사정이 이런데 김기석 목사의 글과 설교를 읽고 듣다보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울리는 경종이 담겨 있기에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 그의 글에 천착하게 됩니다.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본론) 총 13장으로 구성된 느헤미야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보고를 하고 있는 텍스트가 8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섬겼던 교회에서 교회마다 극적인 영적 승리의 전환점을 이루어 주었던 텍스트가 오늘 우리가 나누는 본문입니다. 오늘 주일을 시작으로 앞으로 2주간 본문 8장을 나누게 될 터인데 우리 세인 교회도 펜데믹으로 인해 무너진 영성을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며 본문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래로 52일 만에 성벽이 재건되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살폈듯이 성벽 재건의 기적은 그냥 일어난 우연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하신 인도함,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예루살렘 귀환공동체의 적극적인 순종이라는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이루어낸 쾌거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분위기 앞에 대적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140년 동안 아무도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성벽 재건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극적으로 이루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12장 강해를 통해 이렇게 이루어낸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감동의 시나리오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 8장입니다. 특히 8장에 기록된 구절 중에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하는 난제가 있습니다. 접근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정 중앙에 수문(watergate)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수문 앞에서 엄청난 사역이 진행됩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예루살렘으로 유다 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수문 앞에 모였습니다. 일곱째 달에 모였습니다, 본문에서 7째 달이라고 표현된 달은 성경의 월력으로 티쉬리월 즉 7월을 가르칩니다. 티쉬리월은 오늘 유대인의 월력으로 계산하면 새해를 시작하는 1월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해인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이 어느 해 1월에 수문 앞에 모인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에스라가 제 2차 포로귀환의 때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해가 주전 458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8장에 소개된 티쉬리월은 그 해 이후 어느 해 1월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학자들은 제일 가까운 시기로 잡습니다. 즉 주전 457년 1월로 봅니다.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학사 에스라가 귀환한지 약 2개월이 되는 시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에스라에 대한 소문은 약 2개월 동안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삽시간에 퍼졌고,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 영적인 공허함이 몰려와 허덕이고 있었던 백성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에스라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1월 신년 벽두에 에스라가 읽어주는 율법 그리고 해석하는 메시지를 듣고 1-10일까지의 속죄기간과 1월 15-21까지 실시되는 초막절 절기 지키기를 은혜로 감당했다고 보는 것이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후속 기사에 합한 해석입니다. 문제는 느헤미야 8장이라는 본문에 갑자기 에스라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난제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폈던 것처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해가 주전 445년이었는데 수문 앞 광장에서 시행된 부흥회가 열린 시기를 주전 457년으로 볼 때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적인 갭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 수문 앞 부흥회 기사가 실렸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착시현상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인데 갑자기 성벽 재건 완성 이후에 에스라가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제 문제가 독자들이 헷갈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오늘까지 느헤미야 1-7장까지 살폈지만 그 과정 중에 에스라는 단 한번 등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본문 8장에 뜬금없이 느헤미야서에 등장한 에스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빙빙 둘러대지 않고 직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느헤미야 8장의 수문 앞 광장 부흥회 기사는 느헤미야 역사서 저자의 의도적인 후대 삽입이든지 아니면 성전 완공 뒤에도 전혀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었던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영적 갱신이 이루어진 에스라 9장 바로 앞에 기록되었어야 할 메시지를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착각으로 느헤미야 8장에 담았다는 해석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가 한 책이었기에 이렇게 실수를 할 수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본문이 에스라 시대에 있었던 정황이든, 아니면 느헤미야 시대에 있었던 정황이든 상관이 없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영적 도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시 1절을 복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흥회 요청의 주체입니다. 누구입니까? ‘백성’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백성’이라고 번역된 ‘얌’이라는 단어가 1-12절까지 무려 13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부흥회를 요청한 주체가 느헤미야도 아니고, 에스라도 아니며, 백성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에스라서가 본문의 배경이라면 성전을 재건한 이후일 것이며, 느헤미야가 배경이라면 성벽을 재건한 이후일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게 집중해야하는 것은 백성들이 부흥회를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담임목사가 1년 목회 계획을 설정하면서 부흥회를 프로그램 중에 하나로 커리큘럼에 넣었다가 이번 부흥회 강사로 누구를 초청하겠다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부흥회가 열리는 통상적인 실례를 벗어나 교우들이 영적 곤비함을 느껴 담임목사에게 부흥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강사까지 정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 행위는 영적인 사모함과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21세기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는 너무나도 부럽고 그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절의 대부분이 감동인데 후반절은 더 큰 감동을 자아냅니다. 백성들이 학사 예스라는 부흥회 강사로 초청하면서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1절 하반절이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율법 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세페르 토라트 모세’ 즉 ‘모세의 율법 책’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 책은 모세 오경을 의미합니다.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도 이미 모세 오경은 존재했다는 의미를 전제합니다. 이제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든 백성들이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던 시간은 무려 6시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벽을 오전 6시부터 시작이라고 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시간 동안 읽고 들었다면 5권의 책 전체였음은 당연합니다. 다섯 권의 책을 낭독하는 동안의 정황을 본문 4-5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13명의 사람들이 강단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13명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세의 율법 책을 들고 나무 강단에 서 있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들이 서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에스라가 두루마리 율법 책을 들고 폈을 때, 앉아 있었던 모든 백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보고입니다. 율법 책 낭독의 시간이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본문 해석의 압권이 마지막 남은 또 한 부분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레마를 함축해 보겠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여’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와예아스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모인다.’라는 단어 ‘아삽’의 재귀형 동사입니다. 즉 쉬운 말로 설명 드린다면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모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은 강요나 물리적인 힘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모인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인천에 박근혜 새마을 운동 본부 총재가 방문했습니다. 일주일동안 태극기 흔드는 방법에 대해 교육 받고 행사가 열리는 인천대학교 강당으로 동원되었습니다. 박근혜 총재가 등장할 때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총재 만세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때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몹시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것은 그렇게 동원되어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모인 것을 자발적인 사모함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모함이었을까요? 본문 3절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율법 책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구절을 접하면서 왜 느헤미야 8장의 시대가 그립고 또 그리운 것일까요? 저는 오늘 설교의 레마를 이렇게 정하려고 합니다. ※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가 그립고 또 그립기 때문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인 백성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인 시간을 본문이 적시합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입니다. 6시간 정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율법 책이 읽혀진 시간, 그리고 듣고 있는 시간이 무려 6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상상하십시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이 율법 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6시간 동안 그들은 일어서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직전 교회에서 몇 몇 안수집사들과 당회원들이 서재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게 요구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제천에서 시무하는 다른 교회 목사님들에 비해 최고의 설교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더 훌륭한 설교자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설교 시간을 25분 정도로 줄여주십시오.” 정말로 머리가 좋은 자들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목사가 설교 시간이 긴 것을 교우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저 역시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살아남기 위해 당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하나의 지역교회를 시무하는 담임목사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이 아닌 이상,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다 포기하고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양보하라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는 시작하는 시간은 있어도 끝나는 시간은 없다는 게 신학적입니다. 신앙의 여정에 있는 백성들의 참극은 다른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말씀 듣기를 불편해하면서 참극은 시작됩니다. 반대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감당하면서 은혜를 목도하기 시작하는 시발점은 말씀듣기를 사모함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9-10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루스드라 전도 사역을 할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울에게로 나왔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그가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선포했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그러자 그가 걷게 되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주목할 구절이 보이십니까? 바울이 그가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도대체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하는 것을 듣거늘’ ‘듣거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쿠오’는 어원적인 뜻이 ‘listen to carefully’입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듣는다는 뜻입니다. 말씀듣기에 목을 거는 자들이 바로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예루살렘 백성들이었습니다. 참 아프지만, 오늘 세인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이들이 참 그립고 그립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자신이 쓴 ‘설교’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존 스토트, 『설교』, IVP, p,183)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설교는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기록되어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라는 도구를 통해 해석되어지고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마치 에스가가 나무 강단에서 모세의 율법 책을 들고 해석한 경우와 같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 말씀을 듣는 것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전적으로 시모함과 기대함으로 듣는 지발적인 일이 될 때 그 안에 기적이 있고, 능력이 있고, 감동이 있고, 승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에만 세속적 욕망으로 인해 편안하게 살려는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고, 영적인 짓눌림으로 인해 매우 불편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영적인 편안함을 줄 것입니다. 나는 오늘, 느헤미야 8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예루살렘 백성들이 너무 그립고 그립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