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본문: 느헤미야 7:5-72
서론)
아주 오래 전 읽으면서 저 또한 울었던 안산제일교회를 섬기셨던 고훈 목사께서 지은 시 한 편 소개하며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신학생 담임전도사 시절/눈은 온통 땅 위에 쌓이고/쌀은 떨어지고 나무도 다 땠다./저녁밥을 굶고 나니/첫 아이 갖고 배부른 아내가 가엾고/ 왠지 무능한 사람 같아 서글퍼졌다./40일도 금식한다던데/눈 오고 날씨 찬데/돈 꾸러 갈 수도 없고/그렇다고 결혼반지 팔아/쌀 팔아먹을 수도 없고/한 끼 굶자 신앙으로 합의하고 누웠다./밤 10시 다 되 가는 데/계시 받고 온 사람처럼/집사님, 쌀 한 말과 나무 가지고 와서/부엌에다 놓고 간다./늦은 밤 저녁상 앞에 놓고 감사 기도하다가/우리에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니 감사하나이다하는/대목에서 나는 울었다./예수 믿는 날 부터/수천 번을 주기도를 외웠으나/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훈 목사의 목회일기 중에서)
제가 이 시를 접했을 때, 저는 진해성결교회라는 조직 교회를 섬겼을 때였기에 나름 잘 나가던(?) 젊은 목사 시절이었습니다.
39세에 조직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당회장 호칭도 받고 있었으니 주변 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동기 목사들도 나름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지만, 40대가 되지 않아 조직교회 담임자가 되었다는 것이 나름 성공의 척도로 보고 은근히 즐기는 목사였으니 얼마나 속물근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바로 이 때, 고훈 목사님이 이 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는지 지금도 다시 되 뇌이면 기억이 오싹하고 오롯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그냥 오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 눈물의 기도, 중보 하여 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마치 홀로서기를 해서 독립군처럼 담대히 투쟁해서 지금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고 착각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랍비 마틴 부버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정신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p,60.)
현자의 이 고언을 목도하며 살기만 해도 우리는 결코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본론)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 전체의 글을 통해 받아야 할 은혜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고비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전, 우리는 성경봉독을 통해 본문을 읽었습니다.
발음하기조차도 쉽지 않은 본문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상 성경통독을 하려면 세 번의 고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고비는 레위기입니다.
한글로 되어 있어 읽기는 읽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해하기 쉽지 않은 텍스트가 레위기이기에 성경통독의 위업을 이루려면 반드시 이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두 번째 고비는 민수기와 역대상입니다.
끝도 없이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과 숫자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드는 책이 민수기와 역대상입니다.
하지만 숫자를 통해, 사람 이름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면 그 감동 역시 지대하기에 민수기, 역대상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고비가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산부인과 복음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읽기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설교자인 제게도 당혹스럽지 않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하기에 저 역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본문을 나누어서 설교를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힘든 본문 해석은 한꺼번에 하는 것이 제게도 교우들에게도 덜 부담이 될 것 같아 7장에 남아 있는 본문 전체를 아우르며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로 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설교가 오늘 교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밝힙니다.
오늘 본문은 바사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 중에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향민의 수와 그들이 갖고 돌아온 가축의 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언급한다면 귀향민을 이끌고 온 지도자들의 이름(6-7), 그들이 속했던 가문(8-25), 지역 공동체(26-38), 제사장들(39-42), 레위 사람들(43-45), 성전 막일꾼들(46-56),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57-60), 신분이 불확실한 자들(61-65:포로기간 동안 자신들의 족보를 잃어버린 사람 642명)들의 명단을 차례로 기록하여 보고해 줍니다.
이들을 총 합치면 31,089명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본문 67절입니다.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 있었고”
분명히 느헤미야 역사서 기자는 귀환 행렬에는 노비와 노래하는 자들을 보고하고 있는데 노비는 7,337명, 노래하는 자들은 245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68-6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말이 칠백삼십 육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 오마리요 낙타가 사백삼십 오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였느니라”
저자는 귀환자의 수와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그들과 같이 온 동물들의 수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부유한 자들의 이동 수단이었던 말은 736마리, 가난한 자들의 교통수단이었던 나귀의 수는 6,720마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귀환자들 중에는 부유한 자들보다 가난한 자가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70-72절을 통해 본문 역사가가 말하고 싶어 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내 보십시다.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화이트칼라들이었던 족장과 총독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이 드렸던 헌금과 헌물들을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주목할 것은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전제할 때,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 헌물과 헌금을 드린 자는 귀환자 중에 한 명도 빠짐없는 온 백성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선 구절들 즉 6-65절까지의 보고에 대해 조금 더 해석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31,089명이라는 인원수는 에스라 2장에 기록되어 있는 1차 귀환자의 명단을 느헤미야가 다시 입수하여 재해석한 자료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스라 2장이 열거되어 있는 이름과 수를 본문이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전 이해는 연대기적으로 에스라 2장의 이름 열거는 주전 538년의 기록이며, 오늘 본문 7장의 이름은 그로부터 93년이 지난 주전 445년의 기록이라는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에스라 2장에 기록된 인원과 이름에 비해 본문 느헤미야 7장의 인원과 이름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이 차이는 성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약 100년 전의 히브리어 기록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 구조와 난해함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서기관들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이 점을 전제하면서 6-65절 이해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⓵ 첫 번째 그룹은 귀향민들을 이끌고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도자입니다. (6-7절입니다.)
총 12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역사서가 증언하는 잘 알려진 이름은 제일 앞에 기록된 두 사람, 스룹바벨과 예수아입니다.
⓶ 두 번째 그룹은 가문에 따른 귀향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8-25)
이 그룹은 총 18개 가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⓷ 세 번째 그룹은 지역별 귀향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6-38)
총 15개 지역을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⓸ 네 번째 그룹은 제사장 그룹입니다. (39-42)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느니라”
총 4개 가문에 4,289명이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림잡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환 제사장이 귀향민 대비 10%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는 점은 귀 담아야 할 대목입니다.
⓹ 다섯 번째 그룹은 레위 사람들입니다. (43-45)
43-45절에 근거해 보면 이들의 수는 341명이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들은 귀향한 제사장의 수에 비해 10%도 안 되는 인원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맡은 일들은 성전 문지기였습니다.
이들이 있어야 제사도 원활하게 진행될 터인데 그 인원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시대를 들춰 보면 당시 레위인들의 수가 38,000명에 달한다고 역대상 23:3절이 보고합니다.
아마도 제사장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분이 높이 평가되지 못했기에 레위인들은 귀향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여겨집니다.
⓺ 여섯 번째 그룹은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막일꾼들이었습니다. (46-56)
성경은 이들을 지칭하여 ‘느디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귀향민 중에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그룹입니다.
왜 이들을 주목할까요?
성경의 내증에 의하면 이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의 역할입니다.
에스라 8:20절을 봅니다.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이들의 미션은 성전 일꾼이라는 미션입니다.
영어성경 NIV에 보면 이들을 ‘temple servant’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성전의 허드레 일을 하는 종의 신분, 그러니까 ‘막일꾼’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신분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신분이 높이 평가되는 부류들이 아니었습니다.
송병현 교수는 이들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성전 막일꾼들은 성전에서 레위 사람들을 도와 온갖 잡일을 하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이스라엘이 여러 전쟁 중에서 얻은 이방인 노예들의 후손들이 섞여 있었다. 오래 전부터 랍비들은 이들이 여호수아를 속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또한 이들 중에는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의 포교를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된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명단 중에 상당수가 비(非)히브리어 이름이라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송병현, “에스라-느헤미야-엑스포지멘터리 주석”,298.)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이들에게 주어진 이권이나 혜택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막일꾼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느디님 사람들에게 약속된 신분 상승의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저는 이들에 대한 감동이 더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말은 순수하게 야훼 신앙으로 무장한 자들이 바로 느디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참여한 성벽 재건의 역사는 실로 아름다운 사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⓻ 일곱 번째 부류들은 솔로몬 시대에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신하들의 후손이었습니다.(57-60)
⓼ 마지막으로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귀향민 부류는 기타 사람들입니다. (61-65)
이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포로기 기간 동안 족보를 상실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족히 개인적인 소회이지만 이들이야 말로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가장 컸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족보가 없었기에 대우 받을 수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던 자들입니다.
말 그대로 공중에 붕 떠 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자, 저는 여러분에게 제가 흔히 하지 않는 방법인 열거법을 통해서 여덟 부류의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 재건을 이루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마쳤음을 다시 한 번 재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왜 이렇게 복잡다단한 시도를 했을까요?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설교 제목을 통해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지루한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레마는 바로 이것입니다.
※ 성벽 재건이라는 야훼의 사역은 귀환 공동체 모두의 수고가 이루어낸 쾌거였음을 알려줍니다.
귀향 공동체 안에는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지역적, 가정적 구분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이었습니다.
특별한 계층만의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 그룹이 있었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성전 문지기의 역할을 묵묵하게 감당했던 소수의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압권은 아무런 특권이나 신분상승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야훼 하나님의 도성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는 한 가지 일념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귀국하여 성벽을 쌓았던 느디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옛 영화가 그리워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체성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소망의 끈을 버리지 않았던 기타 사람들의 수고도 일익을 감당했습니다.
종합하면 결론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불과 52일 만에 여럿 위기를 극복하고 이루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포로귀환 공동체 모두가 합력했기 때문이라는 감동이 결론입니다.
누구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지 않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뛰어나게 헌신하여 굴러가는 교회는 자칫 잘못하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사람이 독불장군이 될 가능성이 100%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5-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땅에 세워진 교회들이 여럿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교회가 있고, 또 어떤 교회는 그 반대로 진보적인 성향이 농후한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예정론이 가장 위대한 교리라고 믿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또 어떤 교회는 인간의 지유의지를 가장 중요시 여겨 예정론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 운동을 강조하여 은사에 대해 강조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은사 운동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은사 운동에 대해 꺼려하는 정 반대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만들어질 때의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생각을 달리는 신학적, 신앙적 차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향을 달라도 한 가지는 같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전제하는 교회는 다양한 생각, 문화, 습관, 언어, 인종, 경제적 차이, 지식의 차이를 갖고 있는 자들이 공히 모여 있기에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있는 자들이 ‘너’와 ‘나’라는 객체적인 관계를 벗어나 ‘우리’라는 공동체로 합력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 너는 너라는 편 가름이 있는 교회는 대단히 불행한 교회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몇 달 전에 읽은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 안에 담겨 있는 글을 발견하고 심장이 쿵쾅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려지고 있는 존재다.” (박노해, “걷는 독서”, 느린 걸음,p,640)
이 문장은 저의 심장뿐만이 아니라 생각의 여백까지도 타격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 때문에 ‘너’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교만입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어떻게?
‘너’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으로 바꾸십시오.
시인이 말한 대로 ‘나’는 ‘너’ 때문에 살려지고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자는 홀로 걷지 않습니다.
같이 걷습니다.
세인 교회의 지체들은 ‘너’라는 존재가 있어 ‘나’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인정하고 함께 걷고 같이 어깨동무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그분 기뻐하시네/그분 기뻐하시네/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