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6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9:1-4 제목: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서론) 오늘 예배 찬양으로 부른 찬송가 9장 4절 가사입니다. 주 앞에 나올 때 우리 마음 기쁘고 그 말씀 힘 되어 새 희망이 솟는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자랑과 기쁨 생명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나는 개인적으로 4절 가사 중에 이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부도옹(不倒翁)’ 정신입니다. 쓰러질 것 같은데 결코 쓰러지지 않는 이 저력(밑힘)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입니다. 어떻게 가능하지? 찬송가 가사의 고백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에 잇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라는 시제 중에 어느 하나의 시제만을 믿고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천로역정이라는 고난의 행군은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1:10절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렇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도 믿는 것이고, 더불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도 믿기에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잇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잇대다’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서로 이어져 맞닿게 하다.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연결시키다. 오늘 설교 제목을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로 정했습니다. 왜 이렇게 정했는지 이제부터 느헤미야 26번째 강해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저는 느헤미야 8장의 시대적 정황을 지난 설교를 통해 에스라 8장과 9장 사이에 두고 해석했고, 설교를 했습니다. 나름 힘들었지만 그래야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회가 제 2 성전 봉헌을 앞둔 영적 갱신과 회복의 메시지로 별 탈 없이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나누게 될 9장은 8장과 같은 맥으로 해석할 경우, 헤쳐 나갈 난제에 봉착하기 때문에 에스라 8장과 9장 사이에 들어가는 텍스트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주 뚜렷한 이유 하나를 교우들에게 제시하겠습니다. 본문 2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미야 9장의 정황은 포로귀환자들이 이미 이방인들과의 결혼이나 혼례를 행한 것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선언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에스라 9:1-2절의 분위기는 느헤미야 9:1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에스라 9:1-2절입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에스라 9장의 포로귀환자들은 이렇게 이방인들과의 혼합된 결혼에 대해 아무런 죄책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이런 일들이 잘못된 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시대적 정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느헤미야 8장은 에스라 9장 직전에 놓여야 하는 텍스트라고 전제하며 설교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 9장도 에스라 9장 직전에 병행하여 위치해 놓아야 하는 장이라고 설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 9장의 위치는 어디에 속해야 할까? 민경진 교수의 해석을 빌려봅니다. “요컨대 느헤미야 8,9,10장은 본래 연속된 사건이 아니라, 서로 독립된 자료에서 기원한 셈이다. 즉 느헤미야 8장은 본래 에스라 8장과 9장 사이에 있었고, 느헤미야 9장은 독립된 기원을 갖고 있고 느헤미야 10장은 느헤미야 13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민경진, 『느헤미야 8-10장 주해와 적용』, 두란노 HOW 주석 중에서, 281쪽) 무슨 말입니까? 오늘부터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누게 될 느헤미야 9장을 굳이 에스라 시대나 느헤미야 시대로 구분하지 말고 적절한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지침입니다. 독립된 자료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설교자인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 9장을 느헤미야 시대보다는 에스라 시대로 적용하는 것이 교우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강도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기에 굳이 본문을 에스라 9장 끼어 맞추지는 않겠지만 시대적 정황은 에스라 시대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이미 살폈듯이 에스라는 제 2차 포로귀환자들과 함께 주전 458년에 고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는 이미 주전 538년에 조국으로 귀환한 제 1차 포로귀환자들에 비해 무려 80년 뒤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셈입니다. 80년이라는 세월의 틈새 속에 1차 포로귀환자들은 주전 587년에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대안으로 제 2성전이라고 부르는 스룹바벨 성전을 주전 515년에 완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술적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진 것은 72년만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면 야훼 하나님께서 건축한 당사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외쳤던 학개 예언자의 약속이 하나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학개 2:20-23절을 소개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아홉째 달 이십사일, 기억할만한 이 날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두 번째로 학개에게 임했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전하라. 내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모든 것을 뒤집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정부를 전복시키고, 강대국들을 멸할 것이다. 무기와 병기들을 없애고, 군대를 혼란에 빠뜨려 저희끼리 서로 죽이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다. 그날에 내가 너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을 내 종으로 삼을 것이다. 내 주권과 권위를 보이는 징표, 나의 인장으로 쓸 것이다. 내가 밭을 살펴보고, 너를 이 일의 일꾼으로 택했다. 만군의 하나님의 메시지다.” 학개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의 완전한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515년에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하고 난 뒤 57년이 지났는데도 그 약속의 성취는 요원한 일이었고, 조금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1차 포로귀환자들 사이에는 하나님께, 예언자에게 속았다는 푸념들이 속출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1차 귀환 공동체의 사람들은 서서히 영적으로 망가져 갔습니다. 야훼 신앙에서 이탈하고 영적 질서는 빠르게 와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는 당신의 선민 공동체를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에스라를 택하셨고, 그를 2차 포로귀환자들의 인솔자로 선임하셔서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에스라는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또 다시 망가진 예루살렘에 있는 1차 귀환자들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 선정하신 것입니다. 에스라 7:10절을 보십시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주전 458년,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의 영적 정황은 말할 것도 없이 만신창이 상태였습니다. 유다가 멸망당했던 이유는 야훼 신앙을 버리고 이방 종교를 선택하여 우상을 섬기게 된 제일 원인이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 때문이었습니다. 에스라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귀환공동체의 적나라한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나라가 멸망하게 된 단초인 이방인들과의 혼합적인 결합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참담한 그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저들이 에스라의 귀환에 즈음하여 다시 한 번 일어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문 앞 광장 앞에 부흥회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음을 지난 8장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부흥회가 열린 날을 나팔절 즉 7월 1일이었습니다. 이 날 무려 6시간 이상 진행된 부흥회를 통해 모세의 율법을 다시 복기하게 된 포로귀환자들은 연이어 초막절을 지켰고, 초막절이 끝난 그 다음 날인 7월 23일에 다시 성회를 열어 은혜가 임하기를 사모했습니다. 본문은 성회가 다시 열린 그 다음 날인 티스리월 즉 7월 24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읽어주는 율법 낭독, 그리고 그 율법에 대한 해석은 연이어졌을 것입니다. 연이어 임한 은혜에 대해 이스라엘이 보인 반응을 본문 1-2절이 보고합니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본문은 제 2차 성회에 따른 결과물들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⓵ 금식을 시행했다. ⓶ 굵은 베옷을 입었다. ⓷ 이방 사람들과 절교를 시행했다. ⓸ 죄에 대해 자복했다. 이렇게 제 2차 부흥회를 참석했던 자들이 보여준 네 가지의 행위들은 오늘 우리 세인교우들에게 묵직한 영적 울림을 선사합니다. ※ 임한 은혜가 지속되려면 삶과 말씀과 기도가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소개된 네 가지 행위 모두가 과거 시제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에스라와 함께 했던 2차 부흥회 이후, 예루살렘 거민들은 금식을 이미 시행했습니다. 굵은 베옷으로도 갈아입었습니다.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들였던 잘못을 되돌려놓았습니다. 더불어 선조들의 죄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까지 함께 자복했습니다. 모두가 시행하겠다고 말로만 선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이 말한 것을 실천한 상태였음을 본문이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은 대단한 감동을 줍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 버전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하루)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 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단 위에는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가 올라서서, 주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가 외쳤다. "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부흥회의 결과물들이 연이어 보고되고 있는 데 전율하게 하는 감동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금식을 시행했고, 굵은 베옷을 입었고, 이방 사람들과 절교를 시행했고, 죄에 대해 자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실천과 더불어 공동체가 병행했던 것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하루 시간의 1/4을 할애하여 율법 책을 지속해서 읽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또 하루의 1/4을 할애하여 야훼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보고합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 우리들이 진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것은 부흥회를 경험한 자들 모두가 삶을 살아내는 것과 그 삶을 살아내도록 알려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더불어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실천 강령인 기도하는 삶이 잇대어져 있었다는 감동을 우리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율법을 지속해서 읽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적인 신앙의 행위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적인 신앙의 행위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죄에 대해 자복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지적인 신앙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결국 부흥회의 승리는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지정의 신앙을 잇대며 살겠다고 결의하며 실천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지난 독서여행 시간에 함께 참여한 지체가 이런 소회를 밝혔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생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상대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과 상대하며 살아야 하는 저였기에 특히 학부형들과 만남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제가 아프지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유아들의 지도를 하다보면 정말로 힘든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입니다. 타종교를 믿거나 아예 종교를 갖지 않고 있는 부모들은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는데 유독 힘들게 한 사람을 추적하다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방어기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나 또한 그리스도인인 것을 표명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러는 것일까요? 단발마적인 문장으로 답을 낼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추론은 가능합니다. 이런 자들의 대부분은 지,정,의를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 말씀과 기도가 잇대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율배반의 삶을 살아도 그것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도리어 대들기까지 합니다. 삶과 말씀과 기도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분리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정의라는 건강한 신앙의 3요소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 같이 열리는 열매인데 그렇게 여기지 않기에 생겨나는 괴물들이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홍굴부추칼국수를 보면서, 또 근래에는 플레이스 영을 보면서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너무 손님이 많으면 거의 그로기 상태에 몰려 있는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 손님 좀 작작 보내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손님이 없으면 하나님, 이러실 겁니까? 반 협박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맛대로 기도한 셈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면 오늘 비 때문에 거래처를 다니는 것이 힘든 지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 비를 내리실 거죠?” 그러다가 비가 안 오면 장사가 잘 안 되는 경영터를 운영하고 있는 지체 때문에 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비를 안 주십니까?” 이렇게 기도했는데도 이강덕 목사를 살려두신 것을 보명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대단히 잘못되고 왜곡되어 있는 그릇된 신앙의 소유자들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자기 입맛대로, 감정대로 종교 생활을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신앙의 균형추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랭던 킬키가 『산둥 수용소』에서 밝힌 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수용소 생활이 깨닫게 해준 것이 있다. 인간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중략) 모든 사람은 영적 중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영적 중심을 통해 행위의 목적, 의미를 얻으며 그래서 존재의 일관성과 방향성을 얻게 된다. 이 영적 중심이 흔들리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하고 뒤죽박죽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되면 우리 존재는 아무런 방향성 없이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하며, 그래서 의미 없는 일련의 사건과 행위의 연속으로 전락하고 만다.”(랭던 킬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429쪽) 지난 독서여행 중에 지체 한 명이 이 어려운 랭던 킬키의 글을 이렇게 쉽게 풀어 말했습니다. “목사님, 산둥 수용소를 보면 배운 자, 못 배운 자, 지식인, 비지식인, 있는 자, 없는 자 모두 고난이 임하면 똑같아지는 것 같아요. 예외 없어요.” 정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분모는 삶과 말씀과 기도라는 지정의의 신앙의 3요소를 분리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적어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삶과 말씀과 기도가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이원화시키거나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단절시키거나 이원화시키지 않고 잇대어 있는 자는 결코 천박해지지 않습니다. 균형추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정의의 잇대기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인들의 요소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말씀대로 사는 삶 33.3%를 행하고, 기도하는 삶 33.3%를 행하며, 말씀과 가까이하는 삶 33.3%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말씀대로 사는 삶 100%를 행하고, 기도하는 삶 100%를 행하며, 말씀과 가까이하는 삶 100%를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지정의의 올바른 신앙의 균형추를 갖고 사는 신앙의 잇댐임을 명심하고 그렇게 경주하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