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표현합니다. 이 표기를 직역하면 ‘나이가 많은 목사’입니다. 아마도 연장자를 의미하는 ‘senior’ 라는 단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기법은 우리나라가 유교적인 문화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많이 좌우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담임목사를 ‘senior pastor’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담임목사 표기를 ‘pastor in charge’ 라고 표기합니다. 이 말을 우리나라 말로 직역하면 ‘의무를 가진 목사’ 혹은 ‘짐을 진 목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미국식 표현이 가장 적절한 담임목사라는 직책의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부산 서면 교회에서 전담 파트 사역으로 11개월을 감당한 적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을 섬기면서 사역했던 11개월은 너무 일이 많아 육체적으로, 체력적으로 정말로 힘이 들고 어려웠습니다. 반면의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안수집사회와 당회가 이모저모로 내홍이 있어 시끄러웠지만 저는 정신적으로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담임목사(pastor in charge)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저와는 반대로 제가 섬기던 담임목사께서는 이 일로 인해 무척이나 곤고하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이후 저는 단독 목회지가 결정되어 그 교회를 사임했는데 그 후 들렸던 소식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담임목사님께서도 내홍을 잘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교회를 사임함으로 이 일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담임목사는 책임을 떠안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짐을 짊어진 목사라는 미국식 표현이 담임목사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해석이라는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짐’이라는 헬라어 단어 ‘폴티온’은 문자적으로는 ‘화물, 궤짝’ 같은 말 그대로 ‘짐’이라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의무’(duty)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는 물론 ‘화물, 짐짝’ 같은 내용으로 주님이 사용하셨겠지만 성경 전반에 걸친 적용을 전제할 때 성경에 언급된 ‘폴티온’은 ‘영적인 부담’ 혹은 ‘의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닙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먼저 2절부터 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바울은 본 서신을 마감하는 6장에서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지고 있는 짐을 서로 짊어지라고. 왜 이렇게 바울이 말했습니까? 그렇게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2절 후반절이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짐이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을 풀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답을 본문 1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울이 말한 어떤 사람이 범한 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갈라디아 전 지역에 만연해 있는 일반적인 죄라고 말을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안의 사건으로 조금만 더 좁혀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범한 죄는 아마도 배교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잠겼던 어떤 이들이 할례의 유혹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탈락한 뒤 배교한 사람들의 죄로 좁혀 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이런 배교자들이 즐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던 것처럼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1장에서 단호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2-4장에 걸쳐서 복음의 원리와 율법주의의 위험성을 다시 강론하며 배교한 자들의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어리석은 짓인지에 대하여 재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돌이킬 것을 종용했습니다. 이미 살핀 대로 바울은 5장에서 갈라디아 교회 전 지체들을 향하여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어떤 일이며, 인격적인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들을 소개하며 적어도 이 성령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하였음을 우리는 지난 강해들을 통해 공부 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본 서신을 마무리하는 6장에서 이제는 교회 공동체의 완숙한 회복과 다시 올바로 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지키려고 노력한 성도 공동체를 향하여 조금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이렇게 읍소하고 있는 바울의 음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울이 십자가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무엇을 권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8번째 열매인 온유의 열매를 맺어 그런 배교한 자들을 바로 잡고 품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 역시 그런 죄에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경책하며 조심할 것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본문 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분명 2절에서 서로 짐을 지라고 역설한 바울은 불과 두 절 너머로 이제는 짐을 각 자 지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 당혹스럽습니다. 앞뒤의 말이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2절과 5절이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2절의 의미는 배교한 자들을 향하여 온유의 마음을 품고 다가서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에 반하여 5절은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않고 굳건히 예수의 은혜를 사수한 성도 개인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5절의 의미는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적용입니다. 내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하라는 바울의 주문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 영적인 짐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짐에 대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5절의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 부분은 개역개정판 번역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지를 않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이제 조금 선명해졌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나름 십자가의 은혜를 사수하며 달려왔던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잘못하면 할례주의자들에게 범할 수 있는 교만을 경계하면서 이렇게 그들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사수한 형제들은 결코 할례주의로 돌아선 배교자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범죄자로 낙인을 찍으며 정죄하는 일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당신들은잘 난 자이고 저들은 버려진 자들이라고 비교하거나 우쭐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내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바울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당부한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결정적으로 이렇게 명령이자 권면을 남긴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다른 사람을 비교 평가하지 말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개인의 영적인 부담을 짊어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바울의 종용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찰스 카우만은 3-4절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적어도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범죄 한 동료에게 쉽사리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울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당연히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평가를 하려면 범죄 한 동료를 측정의 표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범죄 한 동료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찰스 카우만, “현대성서주석-갈라디아서”,p,199.)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해석입니다.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침이 이러하기에 다른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대로 실천하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성경을 통하여 영적 교훈을 삼아야 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설교 제목에 맞추어 오늘 설교의 교훈을 적용하려면 과연 어떤 짐을 져야 하겠습니까? ⁜ 나에게 엄격해야 하는 짐을 져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감흥 중에 하나, 나이가 들면서 생긴 것이 있습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너무 힘들다는 소회입니다. 해서 다른 사람의 일까지 관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목회는 관계인데, 그래서 나이가 들면 그만큼 순발력도 떨어지고, 체력적으로도 힘이 든다는 선배 목사님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면과는 달리 긍정적인 면도 아울러 있습니다. 집중력입니다. 젊었을 때는 여기도 기웃거리고, 저기도 기웃거렸지만 이제는 목회적인 생각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을 향하여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나를 성찰하려고 합니다. 나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바른 목양의 방법이 도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9절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구절의 배경은 세례자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강력한 주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유대의 종교적인 정황은 헤롯 성전을 주축으로 삼는 건물 종교, 산헤드린의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권력 종교라는 참담함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라는 본연의 구약적인 은혜는 사라진지 오래된 때였습니다. 해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능력과는 담을 쌓은 무능력, 무기력의 종교 시대였습니다. 당연히 유대의 민중들은 종교적인 착취에 고통당했고, 예루살렘 종교에서 아무런 능력도 기대하지 못했던 정말로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때 유대 광야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영적인 광풍이 밀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유대의 기득권 종교를 향하여 비수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선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벼락을 던졌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영적인 신선함에 민중이 열광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는 자들이 비일비재하자 위기감을 느꼈던 유대 종교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그를 경계하여 유대 광야에 집결한 것을 보고 유대 종교의 폐부에 치명타를 날리는 결정적인 검을 꽂았습니다. 마태복음 3:7-8절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렇게 직격한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품고 있었던 껍데기 신앙의 종교적 위선들을 박살냅니다. 마태복음 3:9절은 압권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유대 종교의 가장 추악한 뒷모습은 출신 배경을 자랑삼는 것이었습니다. 기고만장한 선민 공동체의 교만한 몰골이었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막 살아도,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한 가지의 명목으로 우리만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괴물들이었습니다. 전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위선적인 거짓 하나님의 사람들이면서도 이방인들을 벌레 취급하였고, 개 취급을 하였던 아주 질 나쁜 종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치명적인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후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유대 광야에 깔려 있는 이 하찮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유대인들의 버릇없는 종교적 가식을 박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대단한 대리적인 은혜와 만족을 얻습니다. “나의 출신 성분이 이렇다. 나는 금수저 출신이다. 나의 조상들의 계보는 황금 계보다. 내 뒤 배경이 어떤지 아는가?” 지금 이게 조국 사태의 본질이 아닙니까? 여기에 대다수의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이것보다 더 큰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더 경계합니다.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나는 목사인데, 장로인데, 나는 신앙의 연수만하더라도 십 수 년인데,” 더 웃기는 것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대형교회 목사야, 내 식솔 중에는 기독교 엘리트가 비일비재해!” 진해에서 목회할 때 그 지방을 휩쓸고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파 목사들이 연합회 모임 할 때마다 이렇게 비아냥댔습니다. “우리는 장자 교단인데, 어디 성결교회 목사가 목소리를 내냐”고. 건방짐의 극치였습니다. 마태복음 3:9절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선포한 선언을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이런 종교적 이력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종교적 캐리어의 능숙한 경력을 갖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많은 신비적, 은사적 경험을 했다. 나는 성경공부도 이만큼 했다. 나는 성경을 백 번 읽었다. 난는 40일 금식기도를 수차례 경험 했다. 나를 우습게 여기지 말고 대우해라. 나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 같은 진골, 성골 출신이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게 자랑거리입니까? 그게 내세울 이력서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오늘 이런 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이런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갈무리하며 경고합니다. “다 쓸데없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내고 있느냐다. 지금 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느냐다.” 차준희 교수가 구약 톺아보기 강사로 와서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선포했던 본문 텍스트를 기억하십니까? 미가 6:6-8절을 상기해 볼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말로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열매를 맺고 있는 나입니다. 오늘 이 은혜에 민감하려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강조합니다. 나에게 엄격한 것입니다. 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성찰하는 것 중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목사인 저는 물론 우리 세인 교회에 속해 있는 일체의 지체들이 겉멋 든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는 치열함입니다. 겉 멋드는 신앙을 추구하는 자는 저와 싸워야 합니다. 아니 우리 세인 교회에서는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건 우리 세인 교회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내 짐은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지체의 짐이 있다면 그 짐은 서로 짊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나는 내 신앙의 여행 여정을 철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는 점수가 후해서는 안 됩니다. 야박해야 합니다. 그때 나는 나를 성찰하여 성장할 수 있습니다. 중세 영성신학의 대가였던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지어 붙일 경우,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시다.” (메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분도 출판사,P,98.) 몇 년 전에 이 글을 만났을 때 참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뛰어 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따르는 하나님의 기막힌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주군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조금만 무엇을 남보다 뛰어나게 하면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추악한 존재가 바로 ‘나’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를 바로 보는 짊어짐, 바로 그 짐을 짊어지는 것, 그것만이 내가 선택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인 것을 명심하고 그렇게 겸손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대해 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