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성령으로 행할지니2024-02-28 17:09
작성자 Level 10

2019년 9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6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5:25-26

제목 성령으로 행할지니

 

서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목회에 별로 소질이 없는 목사인데 어떻게 지난 30년간을 달려 올 수 있었을까?

아무리 제게 후한 점수를 스스로 많이 주면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개인 중심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더니 의외로 쉬웠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조금은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난처할 때 하기 쉬운 말로 항상 그렇게 말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주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어도 제 대답은 정말로 언급한 답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니까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 가지 첨부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단지 목사 한 사람만의 신앙적 간증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에 앉아 예배하는 지체들에게 아주 깊은 묵상을 통해 회고해 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비밀 공격무기가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치명타를 입힐 만큼의 비밀 공격 무기가 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긋도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결정적인 방어무기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통해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난 16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교우들에 한해서 말씀을 소급해 드린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없이 여러분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건더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때를 따라 인도하셨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년 저와 함께 울고 웃었던 성도들만 그렇습니까?

또 그럴 리가 있습니까라고 대뜸 말하고 싶습니다.

이후에 이강덕 목사를 만난 지체들이 우리 교회에 1/3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서도 저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세월도 돌이켜 보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예외는 없습니다.

지난 주일우리 교회에 등록한 안승춘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동역자로 섰습니다.

대화를 하는 중에 안 집사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어떻게 우리 교회를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제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하소동에 살고 있지만 직전에 다른 지역에서 살았을 때직장 관계로 우리 교회가 서 있는 내토로 15길을 참 많이 지나다녔습니다그래도 전혀 세인교회를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직전에 나가던 교회를 개인적인 일로 나갈 수 없게 되었고섬길 교회를 찾기 위해 우연히 중고 오프라인 장터인 당근마켓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한 자매가 저에게는 기억에 한편에 어렴풋하게 있었던 세인교회를 소개했습니다그리고 난 뒤 이윽고 온라인상의 세인교회를 만난 뒤교회의 정체성을 알고 이제는 세인 멤버십이 되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안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필연적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직장 관계로 이 도로를 지나가도록 하신 것도오프라인 상에서 만난 자매에게 우연히 교회에 대한 대화를 하게 하신 일도그 자매를 통해 눈으로 보고 지나쳤던 세인교회를 소개받게 하신 것도 모두가 성령의 계획이셨다고.

우리들이 곧잘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맞습니다.

적어도 성령의 은혜로 내 삶을 인도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찬양은 하나님께 드릴 신앙인들이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감동의 보고서를 작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이제부터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오늘 갈라디아서 5장을 마감하는 본문이 이 결단을 하는 자들에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본론)

저는 앞서 분명히 교우들에게 적시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우리의 삶의 여정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힘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마땅한 일입니다.

어떤 의미로 접근하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으로 사는 방법은 성령으로 행하면 된다고.

그렇다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 26절 전반절에서 그 방법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이 구절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오늘 교훈하고 있는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인 RSV는 헛된 영광이라는 단어를 아주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self-conceit” 즉 자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이 단어가 헬라어 원어성경에 무언가를 헛되이 자랑한다.’는 의미로 쓰는 케노독쏘스라는 단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누구보다 자기가 타인에 비해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다분히 할례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에 비해서 뛰어난 민족이며 다윗의 자손으로 먼저 택함을 받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극단적인 종교적 교만함을 드러냈음이 분명했기에 그 저의에 대한 반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들만 그렇게 잘난 체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에게도 할례를 받으며 당신들도 그런 혈통적인 우월한 선민이 될 수 있다고 부화뇌동했을 것에 대한 분명한 제동이 26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표현과 함께 더 세밀한 경고를 남깁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암적 바이러스를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퍼트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의 심각성이 이렇다고 적시한 것입니다.

⓵ 서로를 노엽게 하는 파괴입니다.

⓶ 서로 투기하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공동체는 할례 논쟁으로 인하여 할례를 받은 배교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절대로 십자가 외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바울이 가르쳤던 복음을 사수하던 신앙적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치열하게 대립했을 것입니다.

해서 서로를 반목하는 분열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노엽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프로칼레오는 신약성경에 바로 이곳에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누구에겐가 싸움을 거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투기하다.’로 번역된 프쎄네오는 더 가까운 의미로 질투하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는 반목과 갈등으로 인해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그렇지 않다고 역설하는 바울주의자들이 서로 깊게 반목하며 질투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서로 싸우게 된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헛된 영광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 공동체에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일의 원인을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종합하면 한 가지로 대변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로 표현한다면 성령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삶에서 떠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다가 톰 라이트 교수의 주석에 천착했습니다.

그는 25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성령의 방향에 맞춥시다.”(톰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 P,113.)

저는 오늘 톰 라이트 교수의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설교 교훈의 테마로 삼고자 합니다.

명심하십시다.

우리들이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투기하게 만드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내 힘으로내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려면 대 전제가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보폭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도 대단히 피상적인 표현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해는 되는 표현이지만 실상 그 삶이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하면 난처해집니다.

선명하게 확 들어오는 그 무언가의 의미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난처함과 곤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을 참고해야 합니다.

메시지’ 갈라디아서 5:25-26절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삶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니그 삶을 그저 머릿속 사상이나 마음의 감정으로 여기지 말고그 삶에 담긴 뜻을 우리 삶 구석구석에 힘써 적용하십시오마치 우리 가운데 누구는 더 낫고 누구는 모자라기도 한 것처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는 살면서 해야 할 훨씬 흥미로운 일들이 많습니다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제 유진의 도움으로 조금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개념으로 여겨지는 성령의 방향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여기까지 은혜로 달려왔다면 이제는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내야하고 적용해 나아가야 합니다.

상당히 많은 그 일 중에 하나를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 비교하는 삶을 살지 말자.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인 도우심은 철저한 포용력을 나타났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품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일체의 차별을 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1절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성령 하나님은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 족속의 사람이었던 바나바를 세우셨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한 열매인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도 세우셨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세우셨는데 이 사람은 로마식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로마의 문화권에서 공부를 했거나 아니면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이방적인 색채가 또렷한 사람입니다.

마나엔은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과 함께 유모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권력의 상층부에서 권력의 맛을 본 요주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그도 포용했습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지금 보는 갈라디아서의 저자입니다.

사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파라는 당시의 지성인 출신입니다.

그는 율법의 달인이었고 잘 나가던 인텔리였습니다.

그도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에서 세워진 인물입니다.

만에 하나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가 이 사람들의 면면을 비교했다면 이방 선교의 전진기지였던 안디옥 교회는 존재할 수도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하지 않고 포용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3:2-3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오게 된 첫 번째 선교사 파송이라는 엄청난 사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노던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는 배제의 시대포용의 은혜라는 책에서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품어야 하는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pp,196-203)

Ⓐ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세상을 감싸 안아야 한다.

Ⓑ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감싸 안아야 한다.

Ⓒ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감싸 안아야 한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성도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사탄적인 행태인 배제와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나와 관계되어 있는 개인과 공동체를 포용하고 감싸 안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루어내는 삶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1절을 읽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누가가 보고한 성령 행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도행전 1:1절의 보고입니다.

누가는 그가 먼저 쓴 글인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과 가르치셨던 일을 소개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누가가 누구였습니까?

바울의 주치의였습니다.

바울이 순교를 당하던 로마까지 함께 동행 하여 그를 끝까지 돌보아 주었던 동역자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과의 공생애를 같이 따라다녔던 제자가 아닙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앞서 설명한 수리아 안디옥 출신입니다.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 시에 복음을 접했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바울이 순교를 당하던 로마까지 동행하며 그의 육신을 돌보아 주던 의사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위대한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증인이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로 끝까지 그를 지켜보았던 누가는 훗날 주후 약 80년 즈음에 제 3복음서인 누가복음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을 저술한 이후 약 10년 후에 그의 최고의 걸작인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 1:1절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념비적인 한 구절을 남깁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는 이렇게 데오빌로 형제에게 말합니다.

나의 롤 모델이었던 바울의 주군이셨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셨던 일체의 일들을 먼저 행하셨다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대에 가르침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친 것에 대한 행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도 성령에 의해 살았습니다.

더 주목할 것은 주군이셨던 예수께서도 가르치시기 전먼저 행하셨다는 누가의 보고가 적어도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크게 공명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도 삶에 천착하셨다면 저와 여러분이 삶을 살아내야 함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스캇 맥나이트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은혜의 대적은 개인주의이다.” (앞의 책,p,162)

성령에 행하신 대로 사는 삶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주군이 감당하셨던 감싸 안으심의 은혜를 살아내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

다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 임재 안에서 이제 내 영혼 자유해

내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리

어린 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 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