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5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5:22-24 제목 : 금하지 못합니다.(4) 서론)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정말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사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의 희락: 풍성한 삶 화평: 고요함 같은 것들 인내: 끝까지 견디는 마음 자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양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다는 확신 충성: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마음 온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 것. 사람들은 유진 피터슨의 역작인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일상으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해석한 성경 메시지는 다가오는 감동이 훨씬 더 강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메시지’ 번역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 관점이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피게 될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를 무엇이라고 일상의 언어로 표현했을까 궁금해집니다. 본론) 유진 피터슨은 절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9) 절제: 우리의 에너지를 슬기롭게 모으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엥크레테이아’의 번역입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우리 성경의 단어는 ‘자기 절제’입니다. 저는 이 번역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기 절제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관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언젠가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고민을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여보,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혹시나 이 다음에 손주들이 근처에도 안 오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아내가 1초도 안 기다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잘 닦고 몸 관리를 잘 해요.” 말을 듣고 새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 샤워하여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한다고 내 몸이 관리되는 것일까? 몸 관리는 그러면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엥크레테이아’의 관리에는 턱없이 부족한 관리입니다. 이제는 식탐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십시다. 목회를 하다가 가끔은 소리는 내지 않지만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디 모임에 가서 식사를 할 때 이렇게 저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요즘 제가 도통 입맛이 없어요. 그래서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성도님, 힘내세요. 건강위해서 기도할게요.” 그날 그 성도가 이후 먹은 음식을 보다가 뜨악했습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 독한 마음을 먹고 음식 먹는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다이어트에 몰두해서 이모저모로 살을 빼는데 성공했습니다. 자기 관리에 성공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기 관리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엥크레테이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엥크레테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설명을 위하여 성경적인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자기 관리에 있어서 완벽한 롤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 성경에 누가 있을까를 추적하다가 지난 수요일 저녁 설교에 인용했던 누가복음 20장의 내증이 생각났습니다. 지난 주간 새벽에 읽었던 말씀의 조명이 저를 감동시키는데 충분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막바지에 들어설 즈음의 위상은 거의 절대적인 위상으로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교권력을 행사하던 유대 종교의 뿌리를 흔드는 강력한 영적 회오리였습니다. 위기의식을 느꼈던 산헤드린 종교 지도부는 누가복음 20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들추어보면 이제 예수 죽이기에 사생결단을 할 정도의 비상사태를 선포한 듯 보이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해서 바래새파, 사두개파, 서기관, 율법의 교사인 장로들까지 총동원되어 예수의 빈틈을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막강한 의원 분포도는 레위지파 계열로 전수된 제사장 그룹인 바리새파와 사독 제사장 계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거의 동수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율법적인 해석의 구도도 서로 간 차이를 갖고 반목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죽이기에는 같은 마음을 품는 현상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당시 유대 종교계의 위기의식은 대단히 중대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을 보면 맨 처음 바리새파가 주를 이루고 있었던 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의 권위에 시비를 걸고 싸움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비를 요한의 세례가 누구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담론으로 방어하심으로 그들을 넉 다운 시키셨습니다. 1:0의 참패를 당한 바리새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세금 논쟁으로 다시금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 논쟁에 앞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누가는 이렇게 아주 세밀하게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20:20-21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저는 이 구절을 보다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하나였음을 누가는 고발합니다. “예수의 책잡기” 그런데 그날 새벽에 저에게 임했던 감동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책잡기를 분연히 물리치실 수 있었던 이유가 보였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3년을 보내시면서 어떤 외압에도 책을 잡히시지 않았던 강력한 이유는 외모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에 집중하셨기 때문임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 영적 집중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오직 진리였던 하나님의 도 즉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였기에 그토록 견고한 아성인 산헤드린의 무자비한 공격에서 책잡힐 일을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훗날 예수를 신성모독의 죄로 몰고 가서 주님을 십자가에서 그들은 죽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범죄일 뿐 주님이 무언가를 실수하거나 죄를 범함으로 인해 책을 잡히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을 살아내시면서 온전하게 집중했던 것은 아버지의 뜻이자,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 고개를 돌리신 적이 없습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집중하셨습니다. 그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야할 길, 지켜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한 자기절제의 힘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 결과 주님은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도 자기절제라는 삶을 살아내시기 위해 집중하셨다면 하물며 우리가 나를 절제하는 삶에서 실패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절제는 주님을 향하여 집중할 수 없게 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며, 그것들을 내 안에서 제거해 가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집중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절제와 관련하여 교우들과 메시지를 나눌 때 항상 제일 먼저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로 설명한 사람은 언제나 바디매오입니다. 먼저 본문 마가복음 10:46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길가에 앉았다가’입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일행들이 여리고라는 성읍에서 무언가 이벤트를 펼치고 그곳에서 어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펼칠 계획 때문에 경유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이제부터 올리브 산을 통과하여 해발이 높은 지역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힘이 든 여정을 감내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리고에서 지체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행 발길을 재촉하신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관점에서 해석학적으로 먼저 집고 가야할 점이 있습니다. 길을 재촉하시던 주님은 운명적으로 바디매오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리적으로 여리고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때 나가는 길이 한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밀한 바디매오의 작전을 살피겠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나갈 때 반드시 길이 하나이기 때문에 유일한 그 길을 통과할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눈이 멀어 있는 바디매오는 자기 스스로 여리고를 빠져나가는 길에 혼자 도착할 수 없었고,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여리고의 지인들에게 사전적인 도움을 받았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주님이 반드시 통과할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또 하나 난관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사전적으로 미리 계획한 것은 청각에 의한 소리 지름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나름의 주님 만나기 프로젝트를 세웠고 드디어 D-day 그 시간에 청각에 집중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벌 떼처럼 몰려다니는 군중들의 아우성과 소리에 최대한 집중했습니다. 가장 소리가 바디매오 본인이 자리를 잡고 있던 그 장소에 가까이 들리기를 기대하던 바디매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잘 아시는 것처럼 첫 번째의 절규가 제자들의 방해로 무산될 수 있는 최대의 위기를 맛본 바디매오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소리를 쳤습니다. 그 내용이 마가복음 10: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여러분! 보이십니까? 바디매오가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는지를. 그러나 바디매오가 주님께 집중한 사실에 대한 압권은 아직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바디매오의 기사를 살핍시다. 주님이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소리를 방해하던 자들을 통해 듣게 됩니다. 얼마나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었겠습니까?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은 바디매오의 반응을 나눕시다. 마가복음 10:50절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구약성경을 보면 거지들이 입고 있었던 겉옷은 그의 전 재산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채권자라고 해도 거지의 겉옷은 빼앗을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해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22:26절과 신명기 24:12-13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먼저 출애굽기 22:26절입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신명기 24:12-13절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이렇듯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가지고 있었던 겉옷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하는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팔레스타인 기후인 여리고 성에서 바디매오는 낮에는 구걸을 위해 깔고 앉았던 자리로 겉옷을, 밤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이불로 겉옷을 사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본문에 기록된 겉옷은 단순히 바디매오에게 옷의 의미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자신의 전부였던 겉옷을 버리고 주님께로 뛰어갔다고 보고한 마가의 기록에서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마가 기자는 이 대목을 이토록 집중하여 보고했을까? 마가복음 10:50절에 기록된 ‘내버렸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발로’는 더욱 강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급하니까 당분간 누구에게 맡겨놓은 뒤 다시 찾겠다는 의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그것을 다시는 찾지 않겠다는 의미로 버리는 버림을 말할 때 쓰는 강한 단어입니다. 왜 바디매오는 이런 과감한 결단을 했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집중해야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은 것이며,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지막 이 기사의 압권을 살핍시다. 주님을 만난 바디매오는 아마도 대단히 감정적으로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흥분 상태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0:51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제 그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가 그토록 지긋지긋한 걸인의 삶에서 해방될 일생일대 최고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주님이 이루어주실 요량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정말로 굿 찬스였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영적 집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51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구절을 해석한 글 중에서 제가 가장 감동적으로 본 해석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I want to see You.) 주님 보기를 원한 바디매오는 자기 절제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인 ‘엥크레테이아’의 주인공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성령의 9가지 열매 해석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안경을 새로 개비했습니다. 그 동안 미루고 미루던 다 초점 렌즈로 안경을 바꾸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책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강을 하던 날 출석을 부를 때 학생들 이름을 무려 5번이나 틀리게 불러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결심하고 안경을 바꾸었습니다. 다 초점 안경을 착용하시고 있는 교우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생전 처음 다 초점 안경을 끼고 보니 첫 날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정면에서 조금만 상하가 흔들려도 물체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좌우를 볼 때도 직각으로 돌려야지 물체가 잘 보입니다. 책을 볼 때도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력이 나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안경사 왈, 목사님, 며칠 고생을 하면 익숙해집니다.” 지금 4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조금은 불편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다 초점 안경에 포한되어 있는 렌즈의 성격이 다르기에 거기에 걸 맞는 반응을 내 스스로 보이지 않으면 시력에 난처함을 당하는 것을 사소한 일이지만 경험했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 집중력에 소홀하면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시력도 무력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내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임을 명심하고 집중력에서 탈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정답 중의 정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