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금하지 못합니다.(3)2024-02-28 17:07
작성자 Level 10

2019년 9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4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5:22-23

제목 금하지 못합니다.(3)

 

서론)

 

젊은 목사 시절에 제 무기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었습니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제 무기는 말씀 목회에서 빗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회 후반기에 들어서기 직전제 목회는 무엇이 무기인가를 되 뇌일 때가 많아졌는데 너무 아이러니한 것은 이제 와서 제가 추구하고 견지하려는 무기는 바로 기본기 목회입니다.

사실기본기라고 한다면 목회 초창기에 더 많이 회자되고 집중해야 할 요소인데 목회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기본기에 천착하는 것은 분명히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사실입니다.

나이가 늘어가면서목회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아주 교묘히 나를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투성입니다.

상투성이라는 말을 풀어 말할 때 가장 많이 대치하는 용어가 이것입니다.

전에도 그랬어!”

그 정도면 훌륭한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야!”

적어도 이 정도의 마인드를 갖고 목양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험에 나서보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진보되고 발전할 수 있는 목양의 방법론이 뭐 없을까?

대박을 칠 수 있는 무슨 목양의 방법론은 없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목적보다는 수단이나 방법을 찾는 괴물로 변질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 눈을 팔아 교회를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같은 기형적인 산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을 불쌍히 여기셔서 완전히 그런 기형적인 교회 괴물로 만들지 않으시고 정말로 중요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닫게 해 주심에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선한 뜻은 영적 기본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힘을 많이 상실한 것은 외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 즉 영적 기본기를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영적 기본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목사의 권위를 잃어버린 이유는 목사가 견지해야 할 영적 기본기의 상실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가 주목하고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방법론이나 교회 부흥의 수단이 아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제시하신 영적 기본기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터치한 영적 기본기를 뜯어 맞추기라는 억지춘향 식의 적용이 아니라 아주진지하게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바로 목사와 성도가 추구하고 목적해야 하는 영적인 기본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3주에 걸쳐 나누고 있는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9가지의 열매를 맺도록 집중하는 것은 곧바로 한국교회가 상실한 영적인 기본기를 회복하는 일이라고도 생각하기에 무게감이 새롭습니다.

지난 주간에 승용차 스마트키의 배터리 잔량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미 다 소진해서 폐기처분해야 하는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가지고 있는 옛 구습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내가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억해야 합니다.

 

본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2주 전부터 교우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까지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 있었던 사랑희락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있는 인내자비양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열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내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게 되는 열매들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그룹에 있는 나머지 세 가지의 열매 중에 두 가지의 열매를 나누고 다음 주일에 나머지 한 가지를 나눔으로서 성령의 열매 공부를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7) 7번째 성령의 열매는 충성(믿음)입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열매를 말하면 군사문화 속에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져 있기에 군인들의 상하 관계에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충성이라고 번역된 7번째의 열매는 전혀 다른 개념의 열매입니다.

바울이 말한 7번째의 열매인 충성은 헬라어 단어 피스티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충성보다도 믿음이라는 단어로 더 많이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7번째의 열매는 믿음이라는 열매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바울이 7번째 자리에 믿음을 그 순서에 두었던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의도적인 자리매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헬라적인 풍토에 젖어 있는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에게 있어서 7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숫자적인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7이라는 숫자를 완전수로 보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지했듯이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사랑을 위치시켰습니다.

제일의 자리 다음으로 중요시여기는 숫자인 7에 위치해 놓은 열매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함을 각인시킬 수 있는 무게감이 있는 열매여야 했습니다.

이런 신학적인 의미로 바울은 일곱 번째 자리에 충성’ 즉 믿음을 고정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바울 신학의 의도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를 믿음이라고 낙점한 것입니다.

이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해석을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 교재를 저술한 헤리 웬트 목사는 믿음의 3요소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⓵ 지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그가 어떤 분이시고그 분이 타락한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또한 왜 그의 사역이 필요했는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⓶ 동의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그와 교제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⓷ 확신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저 역시 헤리 웬트의 이 갈파를 처음 만났을 때복잡했던 믿음에 대한 여러 이론이 선명한 구도로 한 눈에 들어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적어도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해서그 분을 중재자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혜에 동의하고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 대한 확신을 갖는 자이어야 한다는 구도가 정리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세 가지의 믿음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믿음은 내가 갖고 싶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열매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인 열매로 갖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9:12절을 읽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저를 거듭나게 해 준 말씀입니다.

저를 자연인 이강덕에서 목사 이강덕으로 그 신분을 변화시켜준 말씀입니다.

저는 출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설교를 정말 잘 하시는 목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행운아였습니다.

군목 출신이셨던 당시 담임목사님은 설교의 은사가 있으셨던 분이었기에 그 분이 선포하시던 말씀이 얼마나 잘 들렸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설교 시간에 이렇게 설교를 하시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습니다구약 시대에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이었기에 죄를 용서받으려면 7월 1-10일까지 속죄기간 동안 죄를 용서받을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면 성소를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제물인 소염소비둘기 등등에게 넘겨 그 동물들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 죄를 대속해 주었습니다그런데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딱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대신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허나 이렇게 번거로운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예수님이 직접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이제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선명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이 구원의 도를 가르쳐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저는 1981년이 될 때까지 이 기막힌 은혜의 메시지를 수없이 들었는데 믿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 얼마나 많이 섬기던 출신교회 담임목사님을 통해 이 내용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 구원의 도가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981년 여름 어느 날히브리서 9:12절을 만났습니다.

이 구절이 무슨 뜻입니까?

앞서 설명 드렸던 출신교회 목사님의 설교 내용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날저는 그 동안 수없이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즉 기독교 구원의 유일한 은혜인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메시지가 그날은 믿어진 것입니다.

믿어진 그날 저는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꿨고지금 여러분을 목사로 만나고 있습니다.

똑같은 교리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이 분명한 차이는 무슨 차이입니까?

너무나 중요한 차이입니다.

헤리 웬트 목사의 말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셨던 구원의 도에 대한 지식을 지식으로만 갖고 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성령 하나님께 그 도에 동의하게 하시고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성령 하나님께서 저에게 믿음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바로 너를 위한 흘림이었다는 것을 성령 하나님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기본기는 믿음(충성)입니다.

이 기본은 성도가 가져야 하는 절대 요소입니다.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충성의 열매를 날마다 맺어가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8) 8번째의 성령의 열매는 온유입니다.

 

8번째로 바울이 제시한 온유라는 열매는 온유라는 단어 자체보다 더 중요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단어입니다.

프라우테스’ 는 겸손이 전제된 온유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심성이 온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선행되는 한 가지의 덕목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겸손입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겸손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인 예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9:52-56절을 읽겠습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예수께서 이제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작정하셨습니다.

당시 주님을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여러 가지의 복심을 갖고 경유하시기로 마음먹은 듯합니다.

무슨 말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역사적으로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남북 분열왕국의 정치적 갈등의 화약고였고종교적으로도 불씨 투성이의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전 722년 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난 뒤 그 지역은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자행했던 혼합적인 정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실한 이방의 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후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를 이방인들로 치부했고 언제나 배신자 그룹 그리고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족속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유대 정책의 반향으로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 역시 유대를 적국으로 여길 정도로 경계했습니다.

특히 유념해야 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5절을 주목하십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 구절은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신 후에그들을 파송하시면서 당부하신 메시지입니다.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사마리아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의미 있는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왜 주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도 주전 1세기의 정치종교적 역학 구도를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내려가기로 결심하신 주님은 도대체 당신은 스스로 만류한 사마리아 행을 결심하셨을까요?
앞서 설명한 대로 여러 가지의 영적의미를 담보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마리아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장소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선언하시기 위함이 그 첫째 이유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역의 효율성을 위해서입니다.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베레아로 우회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3일이 소요되는 고난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지역인 사마리아로 내려가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리아에 도착한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합니다.

이런 거친 행동을 보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하여 요한과 야고보가 강하게 요구한 내용이 사마리아 소멸 요구였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과격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과 야고보의 분노는 역사적 배경보다 더 근원적인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월의식입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인식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깔봄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 엄청난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면서 하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신 주님의 능력이라면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 정도를 처리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쉬운 일이라는 우월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요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9:54절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주님이 야고보와 요한은 요구를 들으시고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누가복음 9:55-56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꾸짖으시고는 성경 구절 중에 또 다른 중요한 구절과 연관해서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1-22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를 말씀하시자마자 격하게 반응한 단어 중에 항변하여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바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이 꾸짖으셨다는 단어인 에피티마오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항변을 격하게 꾸짖는 베드로라고 교우들에애 여러 차례 주지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주님도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듣고 강하게 야단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아주 매섭게 호통을 치셨을까요?

사마리아 백성들을 멸하자는 폭력성에 대한 비난이었을까요?

물론 전혀 그런 요소가 배제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준엄한 경고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본인들은 적어도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격이 있는 자들이며수준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강하게 비난하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학장이셨던 이상훈 박사께서 강의 중에 이런 교훈을 주셨던 것을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지났지만 심비에 새겨 놓았습니다.

성자가 본인이 성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미 성자가 아니다.”

너무 의미 있는 촌철살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반드시 겸손합니다.

찬송가 212장 1절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기쁜 일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겸손하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온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그 겸손함이 저와 여러분이 성령이 주시는 온유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불패 경영아카데미 원장인 김종춘 목사가 쓴 서른내 인생의 글쓰기에 보면 이런 문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네 선수들은 시합에 더 치중하고프로 선수들은 훈련에 더 치중한다.”(p,51)

아마추어들은 기본기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승리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는 승패보다는 기본기에 목숨을 겁니다.

?

기본기가 결국 승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바울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절대도 금할 수 없다고 선포한 충성(믿음)과 온유(겸손)는 성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놓치지 않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 내게 먼저 오사 내 맘을 만지고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날 먼저 안으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모든 걸 덮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안아주시는

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