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5:22-23
제목 : 금하지 못합니다.(2)
서론)
지난주에 전국 빨간차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임홍택이 쓴 ‘90년생이 온다.’라는 도발적인 책을 읽었습니다.
90년생이라 함은 지금 20대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작가는 책 후반에 우리나라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와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에 대한 점유율을 분석했는데 눈여겨 볼만한 글이라 소개합니다.
인터넷 분석 사이트인 인터넷트렌드에 의하면 2017년 7월의 네이버 점유율은 87.58%, 구글 점유율은 0.18% 이었다고 합니다.
보기에는 수치상으로 네이버가 압도적인 비율로 구글을 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러한 통계를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네이버는 16.44%가 줄었고, 반면 구글은 18.96%가 상승한 숫자입니다.
원인을 분석한 작가에 따르면 이런 무시하지 못할 변화는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 시청에서 승패가 갈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 중에 90년대 생과 연관한 내용 하나를 소개합니다.
네이버 사이트에 링크되어 있는 동영상을 하나 시청하려면 전혀 보고 싶지 않은 광고 동영상을 무조건 15초 동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동영상은 5초만 보아도 건너뛰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보기 싫은 광고를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는 네이버 동영상을 90년생들은 싫어하는 반면, 유튜브 영상은 선호하기에 그렇게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국적에 상관없이 지루한 것을 못 견뎌야 하며,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10초도 거부하는 세대가 90년대 생이라는 분석은 예리했습니다.
또 하나 90년대 생의 특징 중에 주목할 것은 재미라는 콘텐츠입니다.
2017년에 우리도 잘 아는 24시간 프랜차이즈 편의점인 CU에서 다음과 같은 생크림 케이크를 출시했는데 대박 상품이 되었다는 보고였습니다.
‘ㅇㄱㄹㅇ ㅂㅂㅂㄱ’ (이거레알 반박불가)
쇼콜라 생크림 케이크라고 하는 이 제품이 대박을 친 이유는 맛보다는 재미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초성체로 붙여진 제품 이름 때문에 90년대 생들은 열광했고 결국 그 제품은 대박 히트 상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20대에 대하여 별로 좋은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꼰대입니다.
지난 주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SNS 상에 올렸습니다.
서평의 논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생의 삶, 이해는 되지만 아멘은 못하겠다.”
저는 위에서 15초와 5초의 상극을 말씀드렸습니다.
90년대 생은 10초에 대한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풍속도, 삶의 스타일, 그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누가 저에게 저들의 삶을 평가하라면 위에서 말한 대로 이해는 하겠지만 아멘은 못하겠다는 심정이 솔직한 저의 마음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하여 오늘 본문 성경 주석을 통해 말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부터 성령의 9가지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사랑, 희락, 화평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4) 성령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열매는 인내함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도 참기를 좋아하지 않는 90년생들의 라이프 스타일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념일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10초도 견디지 않으려는 속성의 사람들이 90년생인데 성경은 10초가 아니라 모든 것을 참으라고 역설합니다.
본문 22절을 읽어 봅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바울은 네 번째의 성령의 열매를 참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음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헬라어 단어 ‘마크로쎄뮈아’를 ‘오래 참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마크로쎄뮈아’를 영어성경 중에 제일 잘 번역을 보니 KJV 성경 같았습니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Longsuffering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이 말에 제일 잘 어울립니다.
“인고(忍苦)하다. 참을성이 깊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삶의 영역에서 ‘마크로쎄뮈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0절을 읽어 봅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저는 이 구절은 100% 베드로의 신앙 간증이라고 확신하며 읽는 구절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배경은 사도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가 있기 직전, 폭풍 전야의 공포가 휩쓸고 있을 때에 로마 근동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로마 근동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두려움을 상쇄시키기 위해 베드로전서 2:19-20절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암전이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부인한 죄인이었다. 그 죄는 철저하게 나의 연약함과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죄인이었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내 삶의 체험 수기다. 나는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죄인인데 주님은 나에게 참아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다. 나는 주님의 그 참아주신 은혜를 받은 뒤에 지금 이곳 로마에서 복음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다. 그렇다면 하물며 너희들처럼 애매하게, 부당하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여기시겠는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한 가지만 간절히 부탁한다. 잘 참아내자. 잘 견디어 내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잘 참아내면 잠시 뒤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디아스포라 형제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잘 참아 내자고.
조금도 참아내고 견디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 성령의 4번째 열매는 그래서 의미가 남다른 열매입니다.
예언서 요나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은 참으심입니다.
요나서의 압권으로 여겨지는 구절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나 4:9-11절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만나는 감동이 이 부분입니다.
하룻밤과 또 하룻밤 사이에 존재하는 박넝쿨의 섭리도 하나님이 이끄시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부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감동이 밀려옵니다.
정말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식물도 하나님은 그것의 생장과정을 지켜보신다는 은혜가 분명한데 어찌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이자 피조물 중에 120,000명의 걸작인 인간을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강조가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죄악에서 머물러 있고, 깨닫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 있더라도 그들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왜 성령의 4번째 열매가 오래 참음인지를 넉넉하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장이라는 고린도전서 13:4절과 7절에서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
4절 전반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7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조금도 참기를 거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그 반대급부의 진리인 오래 참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5) 성령의 5번째 열매는 자비입니다.
22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우리나라 성경에는 자비(慈悲)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선입관으로 앞서는 강한 이미지가 하나 있습니다.
大慈大悲입니다.
부처님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자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크레스토테스’를 조금은 다른 스펙트럼으로 해석하겠습니다.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kindness’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직역하면 ‘자비’보다는 ‘친절’이 가깝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친절한 사람을 뽑으라면 저는 서슴없이 보블리오를 추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를 가기 위해 아드라뭇데노 배에 승선을 했다가 유라굴로 태풍을 만납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예고대로 바울의 일행 276명은 멜리데(지금의 몰타)라는 섬에 도착하여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가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웬일인지 그 섬의 원주민들은 특별한 동정을 하며 바울의 일행을 환대합니다.
그 와중에 바울이 독사에 물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죽지 않고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 것을 본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두려워하며 경외를 합니다.
그 섬의 추장이었던 보블리오는 바울을 비롯한 일행을 대하여 선을 대합니다.
그 기록을 누가는 이렇게 적시했습니다.
사도행전 28:7-10절입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단어 ‘필로프로노스’ 즉 ‘친절히’라는 부사는 ‘마음을 다하여’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친절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을 기울이는 관심입니다.
이방인도 이런 친절함을 갖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상태에서도 이런 친절함을 존재합니다.
하물며 성도의 마음에 이 친절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성도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때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마태복음 9:36절을 읽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러 차례 소개한 주께서 유리하는 백성들을 보시고 가지셨던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단어의 의미는 ‘내장이 흔들리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베푸는 친절은 내장의 흔들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돕는 기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누가 있습니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도와주는 행위, 그래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주막으로 가서 보살펴 주는 행위는 학습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학습으로 가능하지 않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압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누가복음 10:35절이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 구절을 개역판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기에 기록된 ‘부비(浮費)’라는 단어는 압권입니다.
부비가 무엇입니까?
‘additional charge’ 즉 ‘부차적으로 부가 된 금액’입니다.
이 부가세의 지불 약속은 학습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행위는 내장이 움직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장이 움직여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의림동 하나로 마트에 가면 아주 단신의 남자 분을 만납니다.
외모 상으로 볼 때는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을 정도의 민낯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에 대한 소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로 마트를 찾는 고객들의 물건들을 같이 날라주고, 실어주고, 이동용 카트는 본인이 솔선수범하며 원자로 가지고 가면서 고객들을 돕습니다.
아내만 좋게 평가한 줄 알았는데 지난 주에 주차장에 잠시 장을 보는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주차 관리원으로 있는 그 분에 대하여 칭찬하는 많은 주민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친절은 곧 마음 씀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각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이스라엘의 민초들을 보며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분이 주군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주군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도 이웃들을 향하여, 또는 나와 관계있는 일체의 지인들을 향하여 친절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모의 명대사를 읊었던 영화 ‘친절한 금자 씨!’의 ‘너나 잘하세요!’의 그 비아냥의 대상자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적어도 모든 이에게 친절을 마음으로 베푸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 성령의 6번째 열매는 양선입니다.
양선은 언뜻 보기에 앞에서 언급한 자비라는 열매와 비슷해 보이는 단어입니다.
양선(良善)을 한자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헬라어 단어 ‘아가도쉬네’를 번역한 ‘양선’은 영어 단어를 보면 그 뜻이 분명해 집니다.
Goodness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굳이 번역하면 ‘착함, 선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교우들에게 이런 설교를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목회자 중에 착하기만 한 사람은 목사 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
우격다짐을 한 말이 아니라 마음이 착하기만 한 사람은 목회를 하면서 너무 많은 상처만을 입고 목회가 어려운 동역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목회라는 영역에 대한 지난함을 피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속내를 이제 말하겠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세상이 너무 아픕니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매번 희생만 당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이용만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도 어느 경우에는 교우들에게 착하게만 살지 맙시다. 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 감정적인 노가 있을 때의 생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속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손해가 되더라도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교우들에게 힘든 것을 종용합니까?
이런 생각이 저에게 첨예하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착하게 살지 않으면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2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46절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작가 정여울은 ‘마흔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불편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옳지 않음이다.”(P,56)
목사로 살아온 저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하여 답변하라면 바로 이것을 대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게 사는 것들과의 투쟁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의 목회 현장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피를 거꾸로 쏟게 하는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본질이 아닌 이상, 그 모든 일들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참 힘들고 외로운 상황이었지만 그것들과 싸우는 방법을 맞대응하는 방법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Goodness’ 는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분명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적용했습니다.
다시 한 번 재 강조합니다.
착하게 사는 인생은 쉽지 않습니다.
바르게 사는 인생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열매이기에 성령을 따라 행하면 이 같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면 나를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가 신 사사시대를 살고 있어 결코 만만치 않은 그리스도인의 정로 걷기 속에 있지만 적어도 옳지 않은 것과는 싸우며 바르게 삶을 살아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끝까지 잘 감당해 주는 귀한 동역자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90년대 생들이 이제 20대에서 30대로 접어들고, 30대에서 40대로 접어드는 역동의 세월 동안 과연 오래 참음과 친절한 마음가짐과 바르게 사는 삶을 견지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다보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성과 개인주의와 가족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그 시대의 자화상을 갖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전 세대에 걸쳐 이 고민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희망의 빛을 끄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일련의 열매는 내가 내 힘으로 거두는 열매가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철저한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견인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얻을 수 있는 열매임을 성경이 약속하기에 우리 세인교회가, 그리고 세인 지체들이 철저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령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며 경주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오소서 은혜의 성령님/하늘 가르고 임하소서/거룩한 축복 하늘로서 임하사/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주의 영광 위에 이제 일어나/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